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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으로 동양 인문학을 꿰뚫다
알마 201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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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이끄는 말|자신과 만물을 하나로 융합하는 생명초월의 미학

1강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의 즐거움
2강 불이법문不二法門
3강 가는 것이 이와 같다
4강 굴원의 여운
5강 기화우주
6강 떨어진 꽃은 말이 없다
7강 영적 공간
8강 사시四時의 바깥
9강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보다
10강 큰 기교는 서투르게 보인다
11강 화엄의 경계
12강 자연의 큰 기운을 들이마신다
13강 현문의 오묘한 깨달음
14강 형신의 사이
15강 ‘정’과 ‘성’을 기르다

저자 소개 2

朱良志

1955년생 안후이성 추저우저에서 태어나 1982년 안후이사범대학 중문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동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1993년 파격적으로 교수로 임명되었다. 안후이사범대학 문학원文學院 원장을 역임했으며, 1999년에는 베이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2007년까지 베이징대학교 철학과 미학교연실美學敎硏室 주임을 역임했으며, 2004년부터 교육부 중점연구기지인 베이징대학교의 미학여미육연구중심美學與美育硏究中心 부주임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예술의 생명정신中國藝術的生命精神][편주일엽, 이학과 중국화학연구扁舟一葉-理學與中國?學硏究][곡원풍하, 중국예술론
1955년생 안후이성 추저우저에서 태어나 1982년 안후이사범대학 중문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동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1993년 파격적으로 교수로 임명되었다. 안후이사범대학 문학원文學院 원장을 역임했으며, 1999년에는 베이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2007년까지 베이징대학교 철학과 미학교연실美學敎硏室 주임을 역임했으며, 2004년부터 교육부 중점연구기지인 베이징대학교의 미학여미육연구중심美學與美育硏究中心 부주임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예술의 생명정신中國藝術的生命精神][편주일엽, 이학과 중국화학연구扁舟一葉-理學與中國?學硏究][곡원풍하, 중국예술론 10강曲院風荷-中國藝術論十講][중국미학명저도독中國美學名著導讀][석도연구石濤硏究][팔대산인연구八大山人硏究][진수무향眞水無香] 들이 있다.
1955년 경남에서 출생해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속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논문 〈혜강의 기화적 세계관과 그 윤리적 함의〉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 랴오닝대학교 한국학과에서 객원교수로 근무했으며, 2003년부터 현재까지 영산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조선말 실학자 최한기의 철학과 사상》(공저) 《혜강 최한기》(공저) 《인문으로 읽는 주역》《윷경》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남회근 선생의 《주역계사 강의》《금강경 강의》《불교수행법 강의》《중국문화 만담》《정좌수도 강의》《역경잡설》,《능가경 강의》등이
1955년 경남에서 출생해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속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논문 〈혜강의 기화적 세계관과 그 윤리적 함의〉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 랴오닝대학교 한국학과에서 객원교수로 근무했으며, 2003년부터 현재까지 영산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조선말 실학자 최한기의 철학과 사상》(공저) 《혜강 최한기》(공저) 《인문으로 읽는 주역》《윷경》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남회근 선생의 《주역계사 강의》《금강경 강의》《불교수행법 강의》《중국문화 만담》《정좌수도 강의》《역경잡설》,《능가경 강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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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3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648쪽 | 970g | 154*224*35mm
ISBN13
9788994963679

책 속으로

1강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의 즐거움
장자는 사물과 나를 회통시키는 순수체험의 경계를 ‘물화物化’라 칭한다. 사물로 변화하니 나는 곧 사물로서, 사물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경계가 없다. 물화의 개념은 [장자][제물론齊物論] 편 마지막 부분, 꿈속에서 나비로 변한 이야기에서 나왔다. 물화는 대상화의 상대적 개념으로, 장자는 사람을 대상화 상태로부터 끌어냄으로써 생명이 저절로 드러나게 했다. 장자는 그림자 이야기를 꺼낸다. 자기 그림자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움직이면 그림자가 따라오고 내달려도 그림자가 쫓아왔다. 그는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려고 있는 힘을 다해 내달렸지만 실패했고, 도리어 지쳐서 죽고 말았다. 장자가 말했다. 세상 사람은 사실 그림자와 경주하고 있다. 그림자 같은 목표를 쟁취하려 좇아간다. 지식이나 이익, 욕망은 모두 자신을 부대끼게 하고 찔러대는 대상으로, 자신과의 전면적 충돌을 조성한다. 장자는 일찍이 혜자를 이렇게 비평했다. "형체와 그림자가 경주하는구나, 슬프도다!" 장자의 말은 이렇다. "자네는 왜 커다란 나무 밑에 들어가 쉬지 못하는가? 커다란 나무 아래라면 그림자가 없어지지 않는가" ‘커다란 나무 아래’란 다름 아닌 자연의 온전한 물화세계다. 물화세계에서는 자연 속에서 만물이 하나가 되어 충돌도 없고 이것과 저것의 구별도 없으며,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구별도 사라진다.
--- p.23

장자가 말한 큰 온전함의 아름다움은 미의 기본 특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이것은 중국미학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마음이 천지와 더불어 갖추어지니, 어찌 몸의 유무를 알겠는가" 사람이 세계 속으로 녹아 들어가면, 즉 혼돈의 세계로 진입하면 "혼돈 속에서 광명을 방출한다." 장자의 관점은 중국인의 미관에 영향을 미쳐 과학적 분석이나 공리적 목적에는 ‘미’가 수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또 ‘미’는 외재적 인식에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 생명의 체험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인식의 창을 닫아걸고(일곱 구멍이 통하지 않음) 생명체험의 문을 여는 것이다. ‘미’는 감성적 경험에서 오지 않으며, 심지어 감성적 경험을 배제하기까지 한다. 혼돈의 미는 흐리멍덩하거나 마구 뒤섞인 것이 아니라 밝고 또렷하게 생명을 파악하는 것이다. 혼돈의 미는 모호한 미학이 아니라 생명의 발현이다. 장자가 말하는 혼돈의 미, 크게 온전한 미는 세계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아름다움이다. 여기서 우리는 장자의 관점이 감성에 토대를 둔 서양미학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도가철학이
유행하고 선종禪宗이 다시 도가철학에 자극을 줌으로써 초월과 체험을 중시하는 중국미학의 전통이 강화되었다.
--- p.39

2강 불이법문不二法門
중국미학은 당대 이후에 이르러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는데 심미관에 큰 변화가 일어나며, 미학이론에도 많은 새로운 특징이 나타난다. 총체적인 경향으로 말하자면 텅 비어 담담한 경계를 추구했고, 오래되고 서투르며 무성하고 우거진 기상을 중시했으며, 쓸쓸하고 황량한 의미를 높이 샀다. 고요함과 깨끗함으로 거침과 광대함을 대체했고, 평화와 그윽함으로 격앙과 괴로움을 대체했으며, 담담함과 소박함으로 현란함과 웅대함을 대체했다. 이론상으로는 경계를 중시해 오묘함을 강조했고, 기교적인 측면을 폄하하고 배척했다. 이는 모두 당시의 심미적 변화의 표출이었다. 당나라 중엽 이후 중국미학과 예술에 현저한 변화가 생긴 것은 근본적으로 철학적 영향 때문이었다. 또한 불교의 전래는 중국사상사에서 하나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한나라 말엽에 시작된 불경 번역 사업은 위진 시기를 거쳐 수, 당나라에 까지 이르면서 중국불교를 크게 번성하게 했다. 삼론종, 법상종, 천태종, 선종 등 불교 학파가 생겨 맥을 이었고, 그중에서도 선종(특히 남종선)은 중국의 도가와 인도 대승불교를 새롭게 결합함으로써 "가장 절실하고, 가장 미묘했는데", 이런 사고는 원래부터 미학적 가치를 구비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단도직입單刀直入이나 불립문자不立文字, 차가운지 따뜻한지는 마셔보면 절로 안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이전의 심미관이나 예술관에 충격을 던졌다. 선종이 중국미학과 예술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이다.
--- p.54

하루는 여러 보살이 같이 앉아 도를 논하는 자리에서 유마힐이 물었다. "불이법문이 무엇인지요" 32명의 보살이 각각 자신이 이해한 불이법문에 대해 말했다. 대답의 내용에는 분별지를 초월한 부분이 약간 포함되어 있었다. 여러 보살이 모두 말하자 유마힐이 문수에게 대답을 청했다. 문수가 대답했다. "일체의 법에는 언설이 없으니, 둘이 아니라 말하면 이미 둘입니다. 선생님께서 저희들을 위해 어떤 것이 진정한 불이법문인지 알려주십시오." 그러자 유마 대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유명한 유마의 침묵이다.
--- p.56

3강 가는 것이 이와 같다
중국철학과 미학에서 옛것을 새것으로 삼는 관점은 사실 심령이 드러낸 현실이다. 중국미학은 특히 옛것 속에서 새것을 추구하고자 한다. 절대적인 옛것도 없고 절대적인 새것도 없다. 새로움은 생명이 체험한 새로움으로, 체험 속 경계다. 새로움은 외재적 표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심령이 생명을 대하면서 드러난 것이다. 이 점은 미학에서 그 의미가 무척 크다. [이십사시품]에는 "섬농"이라는 품이 있는데, 그중 이런 구절이 있다. "타고서 나아갈수록, 아는 것이 더욱 진실해진다. 만약 다하지 못함이 있으면, 옛것과 더불어 새롭게 된다." 그 의미는 이렇다. 만약 이 창조의 세계로 녹아 들어간다면 그 진정한 경계를 알 수 있다. 항상 보는 새로움은 비록 보통의 모습으로 옛것이 끝나고 나서 보이는 것이지만, 눈과 마음이 합쳐진 것이므로 신선하고 영통하다. 새로움은 심령으로 체험하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심령 속에서는 도처가 새로우니, 옛것이 곧 새것이다. 아름다움의 창조에는 중복된 것이 없어 심령이 체험하는 세계는 영원히 새로우니, 마치 이름 없는 호수의 버드나무와 같다. 사람들이 날마다 바라보는 버드나무는 내 눈앞에 있는 버드나무가 아니다. 단지 내가 창조적인 마음으로 다가가서 알아내기만 한다면, 버드나무는 미풍에 흔들리면서 담담한 달빛에 휩싸여 몽롱한 저녁놀 속에서,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 속에서, 또다른 인연으로 만나는 심령 속에서 다른 감각으로 다가올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의 감각은 영원히 새롭다.
--- p.126

4강 굴원의 여운
초사(楚辭, 전국시대 초나라의 가요. 그것을 모방한 한대의 작품도 포함된다-옮긴이)는 왜 적막한 아지랑이로 이런 향기로운 세계를 덮었을까? 이것이 바로 초사의 높고 오묘한 곳이요, 신녀의 미묘하고도 아름다운 곳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은 전통 중국예술의 변함없는 경계라 말할 수 있으며, 거기에는 일종의 독특한 미감이 있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는 것은 해소할 방법이 없다는 뜻으로, 일종의 성령의 집착이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스스로 잊기 어렵고, 떨치려 해도 떠나지 않는다. 스스로 위로하고 해소하여 억지로 만족하려 하니, 그 만족이 애처롭다.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 속으로 던져지고 피할 수 없는 위험에 직면하니, 봄을 아쉬워해도 봄이 절로 가버리고 가을을 애처로워해도 가을바람이 거세진다. 눈물을 흘리며 꽃에게 물으나 꽃이 대답하지 않고, 높이 나는 새에게 마음을 기대보나 새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세월은 마치 물과 같은데도 취약하고 민감하기 짝이 없는 심령으로 응대하고, 운명은 헤아리기 어려워 매번 운명의 희롱을 참고 견딘다. 조각난 구름과 잔인한 비에는 아무런 정취가 없어 아침저녁이 적막하며, 돌아갈 길이 어딘지 몰라 끝없이 유랑한다. 적막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초사의 이런 경계는 미학적으로 대단히 높은 가치가 있다.
--- p.158

5강 기화우주
중국 고대미학에서는 항상 기운을 "활발히 움직이는 것"으로 해석했다. 고정된 존재가 형인데, 형에는 기가 없고 심령이 움직이지 않아 죽어 있는 것이다. 중국예술에서 제일 기피하는 것이 바로"죽어서 꿈적도 않는" 것이다. 중국예술은 세계의 "생생한 향기를 뿜으며 살아 있는 모습"을 강조한다. 전통철학의 동정動靜이론에서는 고요한 데서 움직임으로 나아가는 것을 강조한다. 움직임이 없다면 고요함이란 텅 빈 것에 불과하니,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고요함이 없다면 움직임 역시 발 디딜 데가 없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결합되면 고요한 것은 움직이며, 형태를 지닌 것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세계, 움직이는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중국예술의 철칙이다. 예를 들면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영국의 풍경화가인 터너Joseph Turner는 죽은 꿩을 그렸는데, 중국회화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기는 중국예술의 근원이요, 생명수다.
--- p.199

중국화는 왜 꾸밈없이 수수한 기상을 품격이 높은 것으로 쳤을까? 첫째, 꾸밈없이 수수한 기상은 생명이 가진 전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유董?가 말한 ‘일기一氣가 하나로 뒤섞여 무성한’ 것은 일기가 관통하고 기상이 엄정하며, 하나로 뒤섞여 나누어질 수 없고, 뭇 경관이 수습됨으로써 일기가 흘러넘치는 세계가 된 것이다. 중국예술이 강조하는 하나로 뒤섞인 기상은 사실 생명의 전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둘째, 진백사陳白沙가 "내가 천지 사이를 살펴보니, 만고 이전부터 항상 두루 흐른다"고 한 것처럼, 하나로 뒤섞인 기상은 원기가 두루 흘러 통하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런 막힘이나 장애가 없는 생명의 정신이 힘차게 두루 채우고, 막힘없이 통하며 동서를 아우른다. 생명의 기가 산과 하천이라는 서로 다른 존재 속에서 흘러 넘쳐, 왕복순환하는 생명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로 뒤섞인 기상은 만물이 생성되는 초기의 홍몽鴻? 상태를 나타낸다. 이는 넘쳐흐르는 ‘원기’의 내재적 맥락, 일종의 창망蒼茫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다. 넷째, 하나로 뒤섞인 기상은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연계에 대한 층차감을 강화한다. 그 결과 서로 박하지 않고 두텁게 한다.
--- p.221

6강 떨어진 꽃은 말이 없다
무언의 아름다움은 침묵의 방식으로 사물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이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언어’를 버리고 ‘하늘의 언어’에 도달한 경계다. ‘하늘의 언어’는 인간의 지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본연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장자는 "천지에는 큰 아름다움이 있으나 말이 없다"고 했다. 이 구절은 무언의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미학의 대표적 관점이다. 이 구절에는 몇 개의 이론적 층차가 있다. 첫째, 말 없는 아름다움은 ‘큰 아름다움’으로 ‘작은 아름다움’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근본적 아름다움이자 아름다움의 본체로서, 일체의 아름다운 형체는 모두 이것의 형상이다. 둘째, 천지는 ‘그침’을 아름다움의 근본 특징으로 삼으므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도로 복귀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치는’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의 최고 준칙이 된다. ‘말 없음’은 인위적인 것과 구별된다. 인위적인 아름다움은 제한적이고 단편적이며 ‘언어’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지식으로 제어할 수 있는 상대적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무언의 아름다움은 절대적 아름다움이다. 셋째, 천지의 아름다움은 결코 인간세계와 무관하지 않다. 중국미학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최고라고 강조한다. 인간이 창조한 것은 자연보다 못하다. 이 때문에 중국철학에서는 천지가 순전히 외재적인 물질세계가 아니며, 서양미학에서 말하는 감성적 실재도 아닌, 인간의 생명이 비추어진 세계다.
--- p.236

7강 영적 공간
어떤 시골 화가가 있었는데 어떤 것을 그려도 닮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그림을 팔기 좋아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종이로 된 부채를 가져왔는데, 선지宣紙로 만든 고급품이었다. 그런데 그 좋은 부채를 내놓고는 거기에 그림을 그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화가가 미인을 그려주겠노라 말하자 그 사람이 좋다고 했다. 화가가 한참을 작업해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언뜻 보아도 영 잘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화가가 말했다. "내가 장비張飛로 고쳐주겠소." 그러자 맡긴 사람이 좋다고 했다. 장비 그림이 완성되자 화가가 말했다. "장비 수염이 너무 진하오. 내가 괴석으로 고쳐드리리다." 괴석이 완성되자 그림을 청한 사람이 곁눈질해보더니 말했다. "이 그림도 너무 이상한 것 같소." 그러자 화가가 이렇게 말했다. "좋소, 그냥 까맣게 칠해드리리다. 다른 사람을 찾아 금金으로 글자를 써보시구려." 이 우스갯소리는 솜씨 없는 화가를 풍자한 것이다. 이 화가는 동양화에서 크게 금기시하는 것을 범했다. 바로 있는 그대로 충실히 그리려다 가득 차서 막혀버린 것이다. ... 그림은 위아래가 비어 있고, 사방이 소통하며 시원하게 뚫려야 절로 영롱해진다. 만약 화면 가득 천지를 채워 넣는다면, 도리어 아무 멋이 없다. 생명체는 하나의 기장氣場으로, 빈틈없이 채워놓으면 생기가 소통할 곳이 없다. 이런 예술은 생기가 없는 죽은 것이다. 비어 있어야 생기가 있으며, 막히면 죽는다. 소위 "비어 있으면 신령스러운 기운이 왕래한다."
--- p.274

중국예술에 등장하는 멀리 끊어진 곳, 예를 들어 빈 계곡의 그윽한 난초나 높은 산이나 큰 강 사이의 한 떨기 난초꽃은 보잘것없이 미미해 사람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그럼에도 담담하고 은은한 향기를 뿜으며, 있는 듯 없는 듯하고 담담한 듯하나 진한 듯하기도 해서, 그 신비로움을 다 파악할 수 없다. 텅 빈 신령함의 극치요 아련함의 극치니, 하늘가의 한 점인 학 그림자요, 숲 속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연무와도 같다. 명나라 서위徐渭는 남송 하규夏圭\의 그림을 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규의 이 그림을 보면 무성하고 아득해 사람으로 하여금 형체를 버리고 그림자를 기꺼이 따르게 한다." ‘형체를 버리고 그림자를 기꺼이 따른다’는 이구절에는 중국화를 그리는 규칙이 잘 나타나 있다. 일본의 학자 마쓰오카 세이고松岡正剛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과 일본의 예술은 모두 ‘무상無常’철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예를 들면 일본의 파초, 풀 우거진 시골의 시가詩歌, 눈 덮인 시골 산수화에는 모두 생명 무상의 사상이 진하게 배어나온다. 흘러 지나가는 환영의 관점으로 세계를 본 것이다." 그의 이런 시각은 일리가 있다. 중국의 예술가가 바라보는 세계 또한 바로 환영의 세계다.
--- p.290

8강 사시四時의 바깥
시간적 존재란 일종의 표상적 존재다. 중국예술에서 예술가는 세계의 진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시간에 휘둘린다. 세계를 드러내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을 초월한 진실한 존재자가 되어야 한다. 예술의 주요 기능은 ‘드러냄’에 있지 기록에 있지 않다.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시간이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시간을 듣는 마음을 지닌다. 그렇지만 중국철학과 예술에서는 시간에 대해 회의한다. 우리는 이미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계속해 이어지는 질서에 습관화되어 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차갑고 따스한 사계절의 흐름을 마치 해와 달이 갈마들고 아침저녁이 꼬리를 물고 바뀌는 생명의 과정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조주를 비롯한 많은 중국예술가들이 볼 때, 이들은 모두 습관화된 일상적 사유일 뿐이다. 이런 의념意念은 뿌리가 몹시 깊어, 사람들은 쉽게 시간에 휘둘리고 억눌려 노예가 된다. 사람들이 시간의 눈으로 세계를 인식하면 세계의 진실한 의미는 인간의 심령으로부터 부지불식간에 사라져버린다.
--- p.317

중국 고대에 "사시를 묻지 않는" 예술의 창작 방식이 이미 유행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중국의 회화 속에서 자연적 시간은 자주 화가들에 의해 ‘으깨졌다.’ 당대의 장순張詢은 [삼시산三時山]15이란 그림을 그렸는데, 그는 하루 중 아침과 대낮, 그리고 저녁에 본 산의 모습을 한 화면에 동시에 표현했다. 송대 왕희맹은 [천리강산도千裏江山圖]란 그림을 그렸는데, 이 기백 있고 탁 트인 그림 속에는 사철마다 다른 산수의 형태가 어느 한 시점에 얽매이지 않고 한 주머니에 담기듯 들어 있다. 그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산수에 대한 화가의 감각세계였다. [양주개원중揚州個園中]에 나타난 사계절의 가산 역시 또다른 전형이다. 중국에는 시간의 리듬을 뒤섞어버리는 것이 흔히 예술가의 창조정신과 연계된다.
--- p.346

9강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보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보는 데에는 중국미학의 내재적 초월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앞에서 명나라 장대張岱의 [호심정간설湖心亭看雪]이란 단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는 큰 눈이 내리는 3일 동안 친구와 함께 서호 호심정湖心亭에서 눈 구경을 하자고 약속했다. 그들이 정자에 도착했을 때, "하늘과 구름, 산과 물, 상하가 모두 하얗게 변해, 호수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곤 긴 제방의 흔적과 한 점이 된 호심정, 그리고 내가 탄 겨자씨만 한 배와 배 속에 탄 두세 명의 쌀알만 한 모습밖에 없었다." 하늘과 땅이 하얗게 되어, 이 백색의 세계 속에서 정자에 있던 나도 한 점이 된다. 망망한 우주의 새하얀 나라 속에 위치한 이 한 점은 일종의 회귀이자 펼침이기도 하다. 이 한 점이 비록 작다고 해도 망망한 세계로 하나가 되어 들어가니, 과연 이것을 작다고 할 수 있을까? 이 한 점은 심령의 초월 속에 세계를 끌어안는다. 만물이 모두 내 속에 갖추어지니, 비록 한 점이긴 해도 만물과 그 조화를 같이 한다.
--- p.361

청나라 대희가 말했다. "버드나무 그늘에 배 한 척이 한가로우니, 텅 비고 넓은 취향은 천 개의 바위, 만 개의 골짜기보다 낫다." 예술가의 의도는 흥취, 즉 생명의 감흥에 있지 그 사실에 있지 않다. 당나라 중엽 이후 도가와 선종의 영향으로 인해 중국화가들은 일반적으로 심령의 체험을 중시하며, 사실적인 것을 취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무한한 산천을 파노라마식으로 보여주지 않고 산의 한 모퉁이, 계곡의 한 부분을 보여주었다. 가급적 화면을 간략히 처리해 심령이 날아오를 수 있는 공간을 제공
하려 했다. 근현대 화가였던 심매사沈邁士 선생도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중국화는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는’ 수법으로 광활하고 중첩된 풍경을 표현하는데, 이런 수법은 수당隋唐 이래 점차 성장해 북송에 이르러 신묘한 경계에 도달했다." 흔히 말하는 ‘말의 뿔 하나’ ‘여름의 반쪽’이 바로 그 전형이다. 예를 들면 마원의 산수화는 자주 쓸쓸한 일각一角이나 미미한 한 모퉁이를 취해, 경물景物이 적고 붓놀림이 간략하다.
--- p.384

10강 큰 기교는 서투르게 보인다
노자 시대의 번거로운 속박과 허위적 영화는 당연히 현재와 비교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말하면 그 당시에도 고도의 문화가 있었다. 바로 공자가 "찬란하도다, 문文이여!"라고 했던 문화였다. 문화가 가져온 허영과 사치가 휩쓸던 그 시기는 짐승 같은 음악, 허위와 가식적인 순종, 여색에 정신을 잃은 음탕함, 번거롭기만 한 예절, 번지르르한 말과 꾸민 얼굴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사실 그 시기는 ‘욕망의 시대’이자 ‘눈을 위한’ 시대였다. 욕망의 충족을 중시했고 세계를 객체화 혹은 대상화했으며, 또한 적대시했다. 노자는 이런 ‘문화의 유행’을 반성했다. 소위 문화라는 것이 과연 인간의 진정한 본성에 부합하는 것인가? 노자가 제창한 "배를 위하는" 것에 대해 왕필은 "배를 위하는 자는 물질로 자신을 기르지만, 눈을 위하는 자는 물질로 자신을 부린다"고 했다. 바로 세계와 하나가 된 상태에서 세계와 더불어 노니는 것이지, 따지는 마음으로 이 세계를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와 함께하며 "크게 어리석은" 지혜로 생명을 기른다.
--- p.405

노老는 중국미학과 예술의 숭고한 예술적 경계다. 이는 오래되고 서툴고 담담한 것을 숭상하는 미학의 풍격과 관계가 있다. 노경은 결코 이마의 주름과 백발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경은 성숙과 자연의 완전함, 현란함과 중후함, 무성함과 고색창연함을 의미한다. 노경은 일종의 고목의 경계다. 인간은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중국예술은 오히려 늙는 것을 특별히 좋아한다. 노경은 담담하고 물질의 모습이 없다. 천진하고 순박하며 광채가 나고, 쇠하고 스러지는 중에도 찬란함을 뿜는다. 평정 속에 지혜가 있고, 법도가 제거된 뒤에 얻는 자연의 화해로움이 있다. 마치 공자가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다. 노경은 유치함 속에 사랑스러움이 있고, 평화로움 속에 소탈함이 배어나온다.
--- p.420

11강 화엄의 경계
경계란 세계에 대한 인간생명의 체험이 쌓인 것이다. 상이한 경계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이한 행위방식을 갖게 한다. 예술창작의 관점에서 볼 때, 상이한 심령경계는 상이한 예술을 창조하게 하고, 상이한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상이한 흉금과 기상을 드러낸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일등의 흉금에서 일등의 예술이 나온다고 했다. 심령의 경계와 예술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사람의 심령경계를 말할 때, 흔히 우리는 그 사람의 심령 속 세계를 말한다. 이 세계는 각각 다르므로, 결국 경계는 강렬한 개성의 색채를 띠게 된다. 이 세계는 층차의 구별이 있게 되며, 이 때문에 사람의 경계에 높고 낮음이 있다는 설법이 나온다.
--- p.438

중국의 고대 미학이론은 서양과는 큰 차이가 있다. 서양의 미학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명석한 개념과 논리적 추리가 특징적이다. 그러나 중국미학은 개념을 중시하지 않으며, 많은 비유와 상징 등의 수법을 활용한다. 구체적인 사물의 상으로써 사물의 이치를 표현한다. 예를 들면 선종은 경으로 철학적 이치를 전달하는데, 서양에서는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중국의 전통 중에는 인물을 품평하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중국미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인물 품평은 한말 이래 사회생활에서 매우 중시되었다. 인물 품평은 사람의 운치와 기개를 중시해, 사람들은 감성적 비유로써 이들의 특성을 표현했다. [세설신어]에는 이런 기록이 많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왕우군王右軍이 떠도는 구름처럼 표표하고, 놀란 용처럼 꼿꼿해보였다"([용지容止]). "어떤 사람이 왕공王恭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봄날 버드나무처럼 깨끗하다고 했다"([용지]). "왕융王戎이 말했다. ‘태위太尉의 자태가 워낙 빼어나 마치 옥으로 만든 나무와 같으니,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합니다’"([상예賞譽]). "왕공이 태위를 보니, 꿋꿋하고 맑아 천 길 낭떠러지 같았다"([상예]). 이런 분위기는 육조 시기의 예술비평에 영향을 미쳤고, 시가 평론에도 이런 분위기가 성행했다.
--- p.459

12강 자연의 큰 기운을 들이마신다
곽희는 왜 고원과 심원의 경계를 발전시키지 않고 유독 평원에 몰두했던 것일까? 평원의 경계가 고원이나 심원보다 사람의 정성情性에 제공하는 바가 훨씬 컸기 때문이다. 평원의 경계가 중국 화단에서 중시된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성령에 편안한 장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평원은 화가에게 가장 편안한 성령의 거주처가 되었다. 삼원 중 심원이나 고원의 작품이 자주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체현한 경계가 사람들의 성령에 일종의 압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심원의 작품은 비록 중국화가의 현묘한 생각에 부합하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신비롭고 어두운 형식은 주체와의 사이에 거리를 생기게 하며, 도리어 주객 사이를 분리시켰다. 고원의 작품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니, 이런 처리에서는 대자연의 높고 기이한 점을 쉽게 표현할 수 있어, 장대한 아름다움을 용이하게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주객 사이의 충돌과 어지러운 전투가 이 경계의 기본 특징이다. 중국의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가급적 이런 충돌을 피하고자 한다. 고원이 비록 뛰어난 경계이긴 하지만 자신의 성령이 머물기 어려우며, 고통스런 체험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원의 경계에는 일체의 충돌이 사라진다. 주체와 눈앞의 대상은 조화롭고 원융한 관계가 되어 주체가 부지불식간에 대상 속으로 몰입한다. 일종의 무아지경이 되어 가볍게 펼쳐진 담담한 봉우리와 아득한 산과 물에 자신의 성령이 이끌려 현실을 초월해 노닌다.
--- p.514

13강 현문의 오묘한 깨달음
오묘한 깨달음은 일반적인 인식방식과는 다른 것으로, 결코 그것이 심미적인 인식형식인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오묘한 깨달음의 활동은 흡사 심미적 인식활동의 기본 특성을 다 갖춘 듯하다. 오묘한 깨달음이란 비과학적, 비공리적, 비지식적, 비논리적 인식활동이다. 아울러 아무 목적 없이 고요히 깨달음에 참여하며, 목적 없는 가운데 최고의 목적에 부합한다. 오묘한 깨달음은 심미적 기쁨의 원칙에 부합하기도 한다. 공리적 쾌감을 추구하지 않고, 생명의 쾌감을 최고의 지향으로 삼는 비공리적인 깊은 쾌감이다. 오묘한 깨달음은 "다른 사람의 적절함을 적절하게 여기고" "그 적절함을 스스로 적절하다 여기는" 데서부터 "적절함을 잊어버리는 적절함"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일반적 쾌감을 초월해 순수한 체험의 경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오묘한 깨달음의 활동은 심미적 활동의 운동 특징과 합치한다. 그것은 생명형식을 재창조하는 활동이다. 오묘한 깨달음의 활동은 표상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표상을 초월하되 동시에 표상을 떠나지 않아, 청산은 절로 청산이요 백운은 절로 백운인 세계를 다시 만든다. 이것이 오묘한 깨달음의 근본 목적이다. 오묘한 깨달음의 활동 역시 심미활동이 세계의 ‘질’적 특징 등을 파악하려 애쓰는 것과도 부합한다. 오묘한 깨달음은 심미적 인식활동의 특성을 구비하고 있다.
--- p.527

동일한 하나의 사물(결코 두 사물이 아니다)에도 유사함과 참됨의 구별이있다(결코 두 가지 표현이 아니다). 사물에는 형태가 있고 본성이 있다. 형태로 말하면 객관적이요, 세계 속에 존재하는 현상이며, 사람이 관찰하는 대상으로서 구체적, 개별적 물상이다. 그러나 산수화가로서 그저 눈으로 관찰하는 물상에만 머문다면 사물의 허구적인 모습만을 반영할 뿐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산수를 그리려면 산수의 본성을 그려야 한다." 여기서 ‘본성’이란 바로 "물상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
에서 ‘근원’이란 산수의 본성이자 ‘본래면목’이다. 이처럼 본성과 근원이 그려진 산수야말로 비로소 진실한 존재요, 여여如如의 경계다.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산수는 참된 산수다. 참된 산수는 나를 위한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 드러난다. 분별적, 허구적 감각을 털어내려 한다면 반드시 오묘한 깨달음에 호소해야 한다.
--- p.548

14강 형신의 사이
중국미학에는 "뜻이 붓보다 앞선다"는 관점이 있다. 붓과 뜻 양자 사이에 뜻이 먼저니, 반드시 뜻으로써 붓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송나라 나대경羅大經이 말했다. "눈을 그리는 자는 그 깨끗함을 그릴 수 없고, 달을 그리는 자는 그 밝음을 그릴 수 없으며, 꽃을 그리는 자는 그 향기를 그릴 수 없고, 사람을 그리는 자는 그 정을 그릴 수 없으니, 이것 역시 도의 오묘함을 모르는 것이다."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하다. 사실 중국 전통회화에서는 뜻이 붓보다 먼저이고, 생명의 리듬이 근본이다. 기운생동이 관건이며 형상은 그다음이다. 북송의 인물화 중에는 오늘날 인물 소묘 방법과 유사한 방법이 유행했다. 한 사람이 저쪽에 앉아 있으면 화가가 "사람의 상을 살펴서" 그림을 그렸다. 소동파는 이런 방법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모습에서 신神을 취해 그 사람의 본래 모습을 얻고자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살아 움직이는 정은 응당 그 행동거지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앉아서 상대를 살피면 상대가 정색을 하고 스스로 자제할 것인데, 그런 상태에서 어찌 그 사람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한 그의 지적처럼, 사람의 본래 모습은 그 사람의 생동하는 활발한 신神의 정情을 그려낼 때 가능하다.
--- p.573

15강 ‘정’과 ‘성’을 기르다
유가와 도가의 양기설이 비록 같지 않은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모두 생명의 원융을 최종 귀결로 삼는다. 천지의 리듬과 합치하는 것이 기본 특징이다. 양기는 인간생명의 배양이다. 예술은 생명을 불어넣는 것으로, 예술가의 창조 과정은 생명의 체험 과정이다. 그러므로 예술 역시 생명의 배양 과정이다. 중국에서는 일등의 경계가 있어야 일등의 예술이 있고, 철저히 통달한 흉금이 있어야 철저히 통달한 예술이 가능하다. 이것은 예술가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예술은 형식적인 도구가 아니라 심성 수양의 신령한 밭이다. 청대의 회화이론가 심종건은 이렇게 말했다. "그림은 하나의 예술로서, 신심身心 성명性命의 학문과 같다." 청나라 심덕잠沈德潛 역시 이렇게 말했다. "문文은 양기로 돌아가며, 시 역시 마찬가지다." 한 시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옛 우물은 연원이 없고, 천추는 스스로 함양한다. 해가 져서 물 긷는 사람이 오면, 빈 구덩이에서 맑은 소리를 발한다." 기르기를 잘하는 자는 이처럼 순수한 아름다움의 샘을 길러내야 한다.
--- p.609

중국예술계에는 사람을 보고서 예술을 품평하는 분위기가 성행했다. 덕이 높은 사람의 작품은 반드시 호평을 받고, 수양이 부족한 사람은 설사 그 작품이 좋다고 해도 호평을 받기 어려웠다. 채경蔡京의 서법은 아주 뛰어나지만 그럼에도 역사상 그의 지위는 미미했다. 동기창은 조자앙趙子?에 대해 민족적 절개 문제로 불만이 있어, 그를 원대 대가의 지위에서 끌어내렸다. 청나라 소송년邵松年이 말했다. "서화는 사람을 중히 여겨 믿고 업신여기지 않는다. 역대 서화에 종사한 자로 송나라 채경蔡京과 진회秦檜, 명나라의 엄숭嚴嵩은 높은 작위에다 서법과 문학 모두 대단히 수준이 높았지만, 어째서 후인들에게 버려져 흔적조차 전하지 않는 것인가? 그 사람의 큰 절개가 무너져버렸으니, 그 나머지 기예는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림을 배우는 무리는 제일 먼저 인품을 강구한다."

--- p.621

출판사 리뷰

동양 인문학의 눈으로 예술작품을 보다

서구가 전 세계로 팽창하던 시기, 유럽인들은 명나라에까지 이른다. 이때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 그림이 들어오게 되는데, 이것은 명나라는 물론 조선 사회에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서양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겼다.

요즘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 온 자들은 대부분 서양화를 사다가 대청 위에 걸어놓는다. 그림을 볼 때는 한쪽 눈은 감고 한쪽 눈으로만 오래 주시해야 한다. 궁궐 네 귀퉁이와 궁궐을 둘러싼 담벼락이 모두 실제 모습 그대로 우뚝하게 솟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화를 묵묵히 궁구한 자가 말하기를 “이는 화공의 신묘한 필법이다. 그 멀고 가까움과 길고 짧은 치수가 분명한 까닭에 한쪽 눈만으로 시력을 집중시켜야만 제 모습이 보이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일찍이 중국에도 없었던 것이다.

당시 한중일을 위시한 동양의 전통에서 서양화는 “한쪽 눈만으로 시력을 집중시켜야만” 하는 특별한 감상법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소박한 필치와 여백이 강조된 동양화를 감상할 때와는 사뭇 다른 방법을 요구했다. ‘자연스러운’ 시선의 움직임을 거슬러 ‘인위적인’ 감각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러한 사정은 오늘날 정반대가 되었다. 한중일의 현대인들은 투시원근법과 서구적 합리성에 길들여져 오히려 동양화를 대할 때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동양화는 재미없고, 심심하고, 싱겁고, 심지어는 괴팍하게까지 느껴진다. 화폭에는 부정확한 선 몇 가닥이 얼기설기 그어져 있다, 그 선마저도 때로는 붓이 갈라져 명확하지 않다, 의미 없어 보이는 빈 공간이 너무도 많아 휑하다, 계절이 서로 다른 자연의 물상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도무지 아름답지 않은 고목이나 괴석이 즐겨 표현된다…. 서구미학의 관점으로 볼 때 동양예술은 아직 기교가 완성되지 않은 서툰 작품으로만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지각이란 본래 선택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어떤 생각을 배경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지각의 내용이 달라진다. 동양의 예술작품이 볼품없어 보이는 까닭은 서구적 사상을 인식의 배경에 강하게 깔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화의 사실적이고 화려한 색채를 습관적으로 동양화에서도 찾으려 하니 어떠한 감동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동양예술은 그 사상적 배경이 서양예술과는 사뭇 다르며, 동양사상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있을 때라야 비로소 가치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이 책 《미학으로 동양 인문학을 꿰뚫다》는 동양예술을 감상하는 데 있어 뿌리 깊은 기초를 이루는 동양사상을 깊이 있게 살펴본다. 도교와 선종, 역학, 기화철학, 유교, 명가 등 동양을 풍미했던 여러 철학자들의 논의가 섬세하고 풍부하게 다뤄진다. 칸트, 니체 등 서구철학의 미학 개념이 소개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중심은 동양의 인문학 전통이다. 이를테면 ‘불이법문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를 칸트의 ‘무정’ 개념을 대별시키는 대목을 예로 들 수 있다. 칸트의 ‘무정’이 유도 아니고 무 아닌 불확정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면, 동양미학의 ‘불이법문’은 유와 무의 양변을 초월해버린 상태다. 이처럼 저자는 중요한 사상이나 철학의 마디에 이르면 서양사상과의 비교를 놓치는 법이 없다. 주체적인 비교를 통해 동양미학 개념의 특유한 지평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써 저자는 서양미학으로는 말끔하게 설명되지 않는 동양예술의 진경을 펼쳐 보이는 동시에, 주체적인 동양미학을 정초하려는 소중한 발걸음을 디딘다. 독자들은 동양예술 작품에서 더는 피상적 인상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인식의 바탕 아래 깊고 넓은 예술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더욱이 저자 주량즈는 베이징대학교의 철학과 교수로서, 이 책 또한 그의 대학 강의를 토대로 밀도 높게 손질되었다. 그런 만큼 강의 형식의 쉽고 친절한 설명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동양예술과 동양사상의 뿌리를 이해하는 입문서로서 손색없다. 특히 이 책은 동양예술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주요 동양사상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유?불?도를 위시한 동양 인문학을 통합적으로 꿰뚫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동양미학의 지극한 경계, 생명초월의 정신

철학자 박홍규가 말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근세에 이르기까지 서양사상은 ‘잰다’(측정)라는 관념을 전형적으로 간직해왔다. 즉 시각적 감각을 중시하는 전통과 수학적인 합리성이 사상의 배경의 깔려 있다. 이것이 아마도 대상에 대한 감각적?감성적 경험에 기초한 예술 전통을 낳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달리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동양미학의 핵심은 ‘생명초월’ 정신으로 대표된다. 즉 동양의 예술작품들은 “경험적 세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초경험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서양예술과 관심의 초점 자체가 다른 것이다. 동양의 예술가들은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화폭에서 현실을 초월해 자유자재하고자 했다. 이것은 서양 유파의 하나인 초현실주의와도 구분된다.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으로 여전히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살아 있지만, 동양미학의 생명초월 정신은 주체와 대상의 경계 자체가 사라진 물화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예술가들은 생명초월의 이상아래, 특유의 예술 전통을 형성했다. 시간을 초월하기 위해 시간적 질서를 어기고 화폭 위에 계절이 뒤섞인 물상을 배치하는가 하면, 현재와 아득히 먼 과거를 선회시키기 위해 고목과 괴석을 즐겨 그렸다. 또 인간의 ‘말’을 초월한 하늘의 ‘말 없음’을 아름다움의 본체로 여겨 여백을 중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교함이 아닌 서투름이야말로 자연스럽고 큰 생명의 표현이라 생각해, 갈필을 사용하여 메마르고 거칠게 물상들을 그려냈다. 비단 회화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이 책에 소개되는 수많은 시인들의 시에서도 동일한 사상이 표현되었다. 이를테면 백거이가 “아무 말 없이 홀로 드러누워 그대를 생각하니, 이 밤 그대 마음 오직 나만이 알리”라며 ‘말 없음’의 큰 조화 속에서 노님을 노래하는가 하면, 소동파는 “바깥은 말랐지만 속은 기름져, 담박한 듯하면서도 열매가 아름답네”라며 서투름과 추함의 지극한 경계를 표현했다.

저자 주량즈는 이러한 생명초월 정신을 중심에 두고, 동양미학의 근원론과 형태론, 그리고 범주론을 총 열다섯 장에 걸쳐 순차적으로 펼쳐 보인다. 주목할 만한 점은 저자가 경전의 경구를 단순 인용하거나 신비주의적으로 뭉뚱그리지 않고, 시종일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서술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동양예술을 규명하되, 학문적?대중적 소통의 수단으로 서구학문의 방법을 썼다. 이는 동양의 인문학 전통에서 미학을 개념적으로 이끌어내려는 저자의 야심찬 목표 때문인데, 이를테면 노자의 ‘대교약졸’이나 장자의 ‘물화’, 선종의 ‘불이법문’ 등의 경구들이 저자의 분석을 통해 하나하나의 미학 개념으로 재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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