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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역사와 함께 한 경양방죽 그리고 태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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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광주 경양방죽의 수축과 운영 / 변동명 / 11
조선시대 기록을 통해 본 광주 경양지 / 김희태 / 59
경양방죽 설화의 전승 담론과 서사 전략 / 이옥희 / 99
근현대 시기의 경양방죽 / 배재훈 / 139
광주 태봉산 전설의 재구성 / 조상현 / 187

간행후기 / 219

저자 소개 5

전남대학교 사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한림대학교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전남대학교 교수 저서 『고려후기 성리학수용연구』 (일조각, 1995) 『한국중세의 지역사회연구』 (학연문화사, 2002) 『여수해양사론』 (전남대학교출판부, 2010) 『한국 전통시기의 산신·성황신과 지역사회』 (전남대학교출판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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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熹台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목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조선대학교 대학원과 전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공부하였다. 전남도청 문화재전문위원을 역임하였고, 전라남도문화재위원과 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공저로 『문화재학 이론과 실제』, 『향토사 이론과 실제』, 『오횡묵의 ?여수잡영?-120년 전 여수를 읊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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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2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220쪽 | 153*224*20mm
ISBN13
9788968497186

출판사 리뷰

경양방죽은 광주의 상징이다. 무등산이 그러하듯이 광주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정겨운 단어가 경양방죽이다. 그런데 이 방죽은 현재 찾아볼 수가 없다. 도시의 팽창과 함께 주거지 등으로 개발되는 과정에서, 무등산 자락인 경호대鏡湖臺를 깎아내 채우고 끝내는 태봉산胎封山을 헐어다 메움으로 해서 없어진지 오래이다. 함께 사라진 태봉산과 더불어 경양방죽은 이제 나이든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나 추억의 장소로 오르내리는 지명일 따름이다.

방죽이란, 사전의 풀이에 따르자면 물이 밀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둑을 가리킨다. 흔히들 한자로 방축防築이라 표기하곤 하는 그것이다. 방죽이라는 단어가 본시 그와 같은 한자어에서 유래한 것인지, 혹은 겨레의 고유한 단어였는데 한자를 빌려 표기하는 과정에서 방축防築으로 굳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방죽이라고 하면 대개는 그냥 물막이 둑만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저수시설 전체를 가리키는 게 보통이다. 말하자면 경양방죽은 곧 ‘경양’이라는 이름의 저수지를 가리키는 명사이며, 실제로 광주지역에서는 지금도 그런 뜻으로 사용들을 하는 게 관행이다. 한편 전통시기의 자료에는 이 저수지의 칭호가 경양방축景陽防築을 비롯하여 경양언景陽堰, 경양제景陽堤, 경양지景陽池, 경양호景陽湖, 금교방축金橋防築, 금교제金橋堤, 경호鏡湖, 서방지瑞坊池, 방지芳池, 연지蓮池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나름의 유래라든지 의미를 지닌 칭호들이거니와, 이 글에서는 지역사회의 오랜 관행에 따라 이 저수지를 그냥 경양방죽이라 칭하도록 하겠다.

경양방죽은 전통시기 호남에서 손꼽히는 저수지 가운데 하나였다. 가령 다산茶山이 당시 전국의 이름난 대형 저수지를 꼽으면서 광주의 경양지를 거명한 게 그러하였다. 조선후기에 경양방죽이 호남을 대표할 만큼 커다란 저수지로 유명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그런 만큼 허다한 시문詩文에서 경양방죽은 자주 오르내리는 소재였으며, 벌써 사라진지 오래임에도 근자에 이르도록 잊힐 만하면 언론에서 한 번씩 다루곤 하는 게 이 방죽이다.

그런데 관심이 그처럼 컸던 데 비하면, 막상 경양방죽에 관해 정확하게 알려진 사실은 그리 많지를 않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일수록 그 정도는 더욱 심한데, 이를테면 경양방죽이 누구에 의해서 또 언제 수축되었는지조차도 분명하지를 않은 게 현실이다. 이 방죽의 수축을 둘러싼 설왕설래는 무성하지만 대체로 설화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를 못한 탓이다. 나아가 수축된 경양방죽의 관리라든지 운영의 문제는 거의 언급조차 되어본 적이 없다. 한층 정밀한 논의를 거쳐 사실 하나하나를 밝히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하겠다.

이 글에서는 가능한 한 연구의 기본 원칙에 충실한 접근을 시도하려 한다. 누가, 어느 시기에, 이 방죽을 왜 수축하였으며, 또 어떻게 운영 관리하였는지 등에 집중하여 문제를 풀어가려 한다. 관련 기록이 매우 빈약하다는 한계가 크지만, 시대 상황에 비추어 차분히 그 내용을 음미하다 보면 그나마 실상에 가까운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먼저, 경양방죽이 수축된 시기를 둘러싼 논란을 정리하겠다. 이제까지의 분분했던 설들을 따져보는 것과 함께 수축의 시기를 가늠하며, 그리하여 이어지는 논의를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 다음으로, 경양방죽이 수축되기에 이른 경위를 추적하겠다. 특정한 시기에 어떤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그곳에다 무슨 이유에서 저수지를 수축하려 들었던가를 곰곰이 헤아려 그에 담긴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 마지막으로, 수축된 이후의 경양방죽을 검토하겠다. 경양방죽이 수축된 이후의 관리라든지 운영을 더듬어 전통시기 경양방죽의 존재 양상을 살피고자 한다. 이상의 계획에 따른 논의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전통시기 경양방죽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작은 디딤돌이나마 마련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수축 시기를 둘러싼 논란

경양방죽이 수축된 시기를 둘러싼 논란은 크게 둘로 나눠 생각할 수가 있다. 지역사회에서 막연하게 설왕설래되는 수준의 고대古代 축조설과, 나름의 논거를 제시하며 주장되는 조선시기朝鮮時期 축조설이 그것이다.

고대 축조설의 경우, 구전 설화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는 수준이어서 논의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경양방죽이 백제?신라의 시대에 축조된 이래 보수를 거듭하면서 조선에 이르도록 유지되어온 고대 저수지 중의 하나라느니, 혹은 후백제왕 견훤의 어머니가 흉년을 극복하고자 관개시설로 경양방죽을 축조하였다느니 하는 등이 그것이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오가는 얘기들로 그다지 신빙성이 있어 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한 마디로 부정하고 나서기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경양방죽이 처음 축조된 시기를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이나 증거를 제시하기가 어려운 형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막연한 언설을 학문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도 또한 명백하다. 그러한 이야기가 지역민들 사이에 전해진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정도에 그칠 뿐, 그 진위를 따지는 건 소임 밖이다.

다음으로, 경양방죽이 조선시기에 처음 수축되었다는 견해를 살피겠다. 경양방죽의 조선 축조설은 다시 조선전기설과 조선후기설로 나뉜다. 조선전기 구체적으로는 세종대에 경양방죽이 수축된 것으로 이해하려는 측과, 임진왜란 이후인 1620년대 즈음에 축조되었을 것임을 내세우는 주장이 그것이다.

경양방죽의 세종대 수축설은 그와 관련된 인물로 하나같이 김방金倣을 꼽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세종대에 김방이라는 이가 경양방죽을 축조했다는 이른바 김방의 경양방죽 수축설이 그것이다. 다만 김방에 의해 처음 이 방죽이 축조된 시기가 언제였던가를 두고는 생각들이 엇갈린다. 1420년대에서 1440년대까지 대략 세종대(1418~1450) 즈음에 김방이 경양방죽을 수축하였다거나, 혹은 세종 22년(1440)이나 23년 또는 25년에 그러하였을 것임을 지적하는 등 제 각각이다. 김방이 광주에서 활동했을 법한 시기를 저마다 달리 추정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김방은 사서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다. 조선초기인 태종과 세종대에 활동한 사실이 실록 등에서 확인된다. 토목공사에 남다른 재능을 지녔던 듯,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를 수축하고 서울의 태평관太平館을 보수하는 일을 맡았던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다만 전통시기의 자료에서 김방이 광주의 경양방죽을 수축했음을 전하는 기록은 아직 대한 적이 없다. 조선시기를 통틀어 김방과 경양방죽을 연결지어 생각할 만한 자료는 미처 찾지를 못하였다. 관청의 기록은 물론이고 개인의 시문詩文이라든지 지지류地誌類에서도 김방의 경양방죽 수축을 입증할 만한 내용은 쉬이 눈에 띄지를 않는다. 관련 설화까지 수록하곤 하는 읍지류邑誌類의 경양방죽이나 김방 항목에서도 그와 관련된 내용은 확인하지를 못하였다.

현재까지 검증한 바 김방의 경양방죽 축조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일제강점기의 중추원조사자료이다. 1913년에 작성된 『수리水利에 관關한 구관舊慣』(水利ニ關スル舊慣)이 그것으로서, 제2장 ‘수리시설의 종류 및 성질’, 제1 ‘관개용 시설’, 갑甲 ‘제언堤堰’의 ‘민유제언民有堤堰’ 중 ‘공유제언共有堤堰’ 항목에, 광주의 부호인 김방이 경양방죽을 수축했다는 설이 수록되어 전한다. 구체적인 증거에 입각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지역사회에 구전되던 내용을 옮겨 적은 듯 보이거니와, 더불어 일제강점 초기인 당시에도 지역민들이 그와 같은 김방의 공덕을 칭송한다는 점을 특기해 이색적이다. 이후 김방의 경양방죽 축조설은 『광주군사光州郡史』(1933)와 『경양景陽방죽의 역사歷史』(1968)에 수록되면서 거기에 세종대 축조설이 더해졌고, 더불어 관련 구비전승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김방이 조선전기인 세종대 즈음 경양방죽을 처음 축조하였다는 주장은 이제 지역민들 사이에서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양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채 운위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광주 지역사회에서의 그와 같은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정작 김방이 조선 세종대 즈음에 경양방죽을 처음 축조했음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김방의 경양방죽 수축설은 20세기 초반인 일제강점기에 들어 비로소 기록에 등장하며, 그 뒤로 김방의 주된 활동 시기를 참작한 듯 세종대 축조설이 거기에 덧붙여져 기록되는 게 1930년대 초반의 일일 따름이다. 조선 세종대는 말할 것이 없고 조선시기에 작성된 기록의 어디에서도, 김방이 세종대에 경양방죽을 수축하였음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찾을 수가 없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러하다.

나아가 경양방죽의 김방 수축설은 그만두고, 이 방죽이 세종대를 포함하여 조선전기에 실재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도 이제까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전기의 실록이라든지 또는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지류地誌類에서, 경양방죽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기록은 아직 대하지를 못하였다. 또한 조선전기에 활동한 인물들의 저술에서도 경양방죽은 그 자취를 쉬이 드러내지 않는다. 문집류 각별히는 광주지역과 관련이 있는 조선전기 인물들의 시문에서도, 경양방죽의 존재를 입증하는 기록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세종대를 포함한 조선전기의 경우, 경양방죽은 그 실재 여부마저 불분명한 존재라 할 밖에 도리가 없다.

전통시기의 자료에서 조선 세종대에 김방이 경양방죽을 축조하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믿을 만한 근거를 찾기가 어려우며, 더욱이 경양방죽이 세종대를 포함한 조선전기에 실재하였던가의 여부마저도 입증하기가 쉽지 않음을 살폈다. 이른바 김방의 세종대 경양방죽 수축설은 그 신뢰도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가 어려운 견해임을 확인한 셈이다.

한편 최근에 들어 경양방죽이 1620년대에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냈으리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눈길을 끈다. 김방의 세종대 경양방죽 수축설을 부정한 셈이거니와, 조선시기의 자료에서 경양방죽과 관련된 기록들을 더듬어 도달한 결론으로, 나름의 근거에 입각해 신중히 접근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다만 범위를 좀 더 넓혀 헤아리며 더욱이 관련 자료를 한층 세심히 살펴 음미하는 데 집중하지 못한 듯 보여 아쉽다. 발표 지면이 일반 대중을 독자로 삼은 매체였다는 점에서 제약이 있었으려니와, 그러한 한계를 참작하더라도 제시된 견해를 그대로 따르기에는 주저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1620년대 경양방죽 축조설에서 내세우는 주요한 근거 자료는 제호霽湖 양경우梁慶遇(1568~?)의 시詩이다. ‘경양방축景陽防築’에서의 고기잡이 구경에 나선 광주목사光州牧使 죽음竹陰 조희일趙希逸(1575~1638)의 시에 양경우가 차운次韻하여 읊은 것인데, 그 조희일이 광주목사로 부임한 게 1624년이었으므로 경양방죽도 그 즈음에 들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냈으리라는 이해인 것이다. 시의 제목에 벌써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저수지로서의 경양방죽이 등장하는 등, 당시 이 방죽이 실재하였음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더불어 당시 장성부사長城府使였던 양경우로 하여금 예의 ‘경양방축’ 운운하는 차운시次韻詩를 짓도록 이끌었던 조희일의 시詩 제목에도 ‘경양언景陽堰’이 등장하여 거듭 그것을 확인시켜주기도 한다. 광주목사 조희일과 장성부사 양경우가 시를 주고받던 1624년 무렵 경양방죽이 실재하였음을 의심할 이유는 없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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