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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행의 시작
마음껏 사랑할 자유 | 그 여행자의 지갑 | 여행 아니면 이혼! | 목적지를 지운 항해의 끝에서 | 꿀 먹은 벙어리 | 나의 스페인어 이야기 2. 발렌시아는 언제나 맑음 빨래 | 무모한 시작 | 스패니시 아파트먼트 | 스페인 사람들을 만나보셨나요 | 의외의 꿀조합 | 화사한 행복 | 소로야가 그린 바다 | 발렌시아를 걷는 시간 3. 인연은 그렇게 가을이 오면 코르도바에 놀러 오세요 | 로즈메리 | 스페인의 빨간 맛 | 그녀는 어쩌다 축덕이 되었나 |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4. 도시와 나 나의 작은 숲 | 뮌헨 중앙역 | 발렌시아에선 길을 잃어도 괜찮아 | 그녀의 타투 | 우리가 불꽃놀이를 보는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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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기서 살아야겠다.’
어느 날 문득 그렇게 결심이 섰다. 걱정이나 의구심 같은 건 들지 않았다. 발렌시아면 될 것 같았다. 오르차타 가게의 여인이 내게 보였던 그날의 확신만큼이나 굳은 결단이었다. 꿈이 참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은 모름지기 꿈을 갖고 살아야 하는 법이고, 꿈을 향해 달리는 인생만이 이상적이고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꿈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인 동시에 때때로 나를 모질게 옭아매는 굴레일 수 있음을, 나는 세월을 통해 시나브로 알아갔다. 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목표에 얽매인 삶이 과연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던가, 나는 수차례 반문하고 번민했었다. 어쩌면 중요한 건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방향성을 잃지 않고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는 거면 충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내 가치관을 잊지 않고 꾸준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한, 그 어떤 예기치 않은 지점에 도착해서도 나는 행복할 거라는 직감을 했다. 그 실례가 이번 여행에 있었다. 여행의 목표에 대한 강박을 지우고 나니 그리도 염원했던 종착지가 비로소 시야에 들어왔다. 목적지를 지운 항해의 끝에서, 나는 발렌시아를 만났다. --- p.48~49 일찍이 다비드는 나에게 발렌시아의 바다 풍경에 너무 큰 기대를 품지는 말라고 일러준 적이 있었다. 흔히들 꿈꾸는 카리브해의 크리스탈 빛깔 바다 같은 건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수정처럼 투명한 바다 색깔, 정열적인 남국의 정취 같은 건 말바로사 해변에 없었다. 바닷물은 내 발이 채들여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탁했고, 여름이면 무더위와 사투하다 바다로 몰려나온 어마어마한 수의 시민들로 인해 모래사장 전체가 누울 자리 하나 없이 빼곡했다. 하지만 말바로사에는 고유의 빛깔이 있었다. 그 유명한 ‘발렌시아 오렌지’를 키워낸 이 도시의 따사로운 햇빛.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 햇빛이 발렌시아인들의 온화한 품성을 키워낸 장본이기도 하리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듯한 그 빛깔이 해변 전체를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말바로사의 이 찬연한 광채는, 그 어떤 호화로운 휴양 도시의 강렬한 색감보다도 내 마음에 오랜 잔상을 남겼다. 발렌시아의 바다는 호사스러운 바캉스 대신 적요한 휴식을 선물하는, 말이 없고 우직한 친구와 같았다. 발렌시아의 여름은 듣던 대로 뜨거웠다. 그 무더위를 핑계 삼아 나와 하우스메이트 마리아(Maria)는 틈만 나면 차가운 라들레르(radler) 한 병씩을 들고 말바로사를 찾았다. 우리의 유월과 칠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마리아는 후에 이 시간을 그녀 인생 최고의 여름이라고 추억하곤 했다. --- p.134~135 “일단 이곳의 날씨가 좋았어. 내가 살던 파키스탄 도시도 이곳처럼 연중 해가 뜨는 곳이었지. 그리고 이곳의 사람들이 좋았어. 친절하고 열려 있는 발렌시아인들은 그야말로 ‘친구들(Amigo)!’이거든. 또 이곳엔 바다가 있고, 역사가 있고, 관광이 있고… 뭐 부족할 게 없는 도시잖아. 나는 발렌시아에 오기 전에 마드리드에서 7년 간 일했었어. 하지만 마드리드 사람들은 차갑고 슬펐어. 난 지금 마드리드에서보다 훨씬 적은 돈을 벌고 있지만, 발렌시아에 살면서 훨씬 큰 행복을 느껴. 그거 아니? 발렌시아에서 운전할 땐 길을 잘못 들어도 괜찮아. 바로 다음 코너에서 되돌아가면 되거든. 하지만 마드리드에서 한 번 길을 잃잖아? 그럼 좋으나 싫으나 그대로 한 10킬로는 쭉 가야만 하는 거야. 마드리드에서의 삶은 얼마나 복잡하던지!” 발렌시아에선 길을 잃어도 괜찮아. 아저씨의 그 한마디가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다. 도시는 그 넉넉한 품 안으로 모든 이들을 차별 없이 끌어안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품 안에서 깊은 안정감을 누렸다. 그 평온에 관한 기억으로 아저씨와 내가 공감대를 이루기까지 우리의 어휘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았다. 다행히도 아저씨는 이번에는 길을 잃지 않았다. 나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었고, 우리는 서로의 행운을 빌며 산뜻한 작별을 고했다. 떠나가는 택시가 시야에서 흐릿해져 갔다. 그리고 내 눈 앞으로 투리아 정원의 진한 녹음이 펼쳐졌다. 치켜든 얼굴 위로는 따사로운 햇살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큰 숨으로 힘껏 들이마셔본 도시의 공기가 제법 상쾌했다. --- p.229~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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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렌시아를 만났다
“그 해의 발렌시아를 떠올리면 나는 오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꿈이라고 하기엔 분명 1년여의 시간 동안 내 몸이 숨을 내쉬고 들이마신 곳이었고, 현실이라고 하기엔 그 공간도 그 시간도 어딘지 아득한 느낌이 있다. 2018년의 스페인을 나는 꿈과 현실, 그 사이의 어디쯤인가로 기억한다.” 50여 개국 이상을 여행한 저자 한지은이 2018년 2월 스페인에서 운명처럼 만난 도시 ‘발렌시아’에서 보낸 꿈결 같은 한 해를 기록한 책이 바로 『스페인의 빨간 맛』이다. 정착기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긴 여행의 기록이며 다소 몽환적인 생활기다. 발렌시아에서 저자가 보낸 시간은 일상 같기도 했고 여행 같기도 했다. 그래서 성실히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대리만족을, 꿈틀꿈틀 일탈을 도모하고 있는 이들에게 청사진을,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휴식을 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당신의 가슴속에 이미 살아 숨 쉬고 있는 여행을 불씨를 살려보자. 이 도시에서 빨래를 해야겠다 “오래 쉬다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도시를 만나면 나는 그 도시에서 빨래를 돌리곤 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발렌시아가 바로 그런 도시였다. 그즈음 나는 다음 여정에 대한 기약도 없이 발렌시아에서의 체류를 하루하루 늘려가고 있었다. 때마침 스페인에서 모로코로, 그리고 다시 스페인으로 이어진 긴 여정 동안 적잖은 빨랫감이 쌓여 있기도 했다.” 스페인에서 모로코로, 그리고 다시 스페인으로 이어진 긴 여정의 끝에 도착한 발렌시아에서 저자가 이 도시에 살게 될 것을 직감했었던 가장 처음의 순간은 바로 빨래를 돌리기로 결심했을 때였다. 블록 안에서 주택들이 자연히 서로의 후면들을 맞대고 있는 공간은 이곳 주택들의 ‘민낯’과도 같은 곳이다. 그 공간이 자못 친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곳에서 오래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도시의 온유한 기운이 저자의 마음에도 평화를 가져다줄 것만 같았던 그날의 강한 예감이 어떻게 현실화되는지가 이 책의 내용이다. 이곳에서 빨래를 널고 화분을 키우고 바람을 맞고 주민들의 생활을 돌아보는 모습을 통해 스치듯 지나가는 여행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발렌시아의 매력을 느껴보자. 스페인의 빨간 맛 “이제 이곳은 토마토가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정도의 가벼운 사건 현장이 아니었다. 골목 일대가 ‘토마토 강’을 이룬, 그것도 무릎까지 차올라 깊고 진한 강을 이룬 대혼란의 장이었다. 진짜 토마토 싸움이 시작됐다.” 나라에도 색깔이 있을까. 그렇다면 아마 스페인의 색깔은 빨간색일 것 같다. 그것을 증명하는 사례 중 그야말로 마을 전체가 토마토로 강물을 이루는 장관이 펼쳐지는 ‘라 토마티나(La Tomatina)’가 대표적일 것이다. 이 축제에 참가한 저자는 달고 진한 빨간빛으로 오래도록 스페인을 기억하게 된다. 머리, 눈, 코, 귀가 전부 토마토로 뒤덮인 이토록 무질서한 유희의 현장! 태고의 낙원에 살던 사람들의 표정이 저토록 해맑았을까. 끝을 모르고 커져가는 사람들의 환성 소리가 스페인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열을 짐작하게 한다. ‘이건 정말 미친 짓이었어!’라고 탄식하면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행복한 기분을 함께 느껴보자. 아아, 발렌시아여 “아마 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발렌시아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게 되겠지만 그 사실이 슬프지 않았다. 언제고 운명은 나를 다시금 이 도시와 만나게 하리란 은연한 예감이 내 안에 있었다. 2018년 2월에 우리의 첫 만남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 해를 살았어도 발렌시아에 대해 다 아는 것 같았지만 다 아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저자에게 생소한 느낌을 주는 도시의 그 모든 요소들이 반가웠다. 보고 또 보아도 더 보고 싶은 발렌시아. 이미 여러 번 본 것 같고 이제 더 봐도 특별할 게 없을 것만 같지만, 바라볼 때마다 새롭고 바라볼수록 아름다웠던 불꽃놀이와도 같았다. 『스페인의 빨간 맛』을 통해 발렌시아에서의 단조롭고 느린 일상을 그대로 서울로 옮겨오기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생활 속의 소소한 것들을 돌아보고 소박한 만족을 구할 수 있었던 시간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운명 같은 여행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