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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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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주야, 난 가끔 구덩이를 생각해.’ 그 이야기를 할 때 형석의 목소리는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그래서 세주는 아마도 익살스러운 이야기일 거로 생각했다. ‘처음엔 그저 장난같이 시작하는 거야. 뭔가를 잡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딱히 꼭 잡으려는 것도 아니야. 그저 그런 기분으로 열심히 구덩이를 파. 그리고 그 입구를 나뭇가지와 잎을 얹어 그럴싸하게 감추는 거야. 그리고 나선 제법 잘 만들었다고 스스로 대견해하지.’ ‘그리곤?’ 세주는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었다. ‘그런데 그만 잊고 말아. 내가 만들고도 어디에 만들어놓았는지. 어쩌면 만들었다는 것까지도.’ ‘저런.’ ‘어느 날 결국, 피융, 그 구덩이에 빠지는 거야. 내가 파놓은 구덩이에.’ ‘맙소사.’ 어찌 보면 내용의 전개상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형석의 목소리에 배인 자조적인 웃음은 간파하지 못한 채, 그 뒤가 자못 궁금했다. ‘빠지고 나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이를테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거야. 내가 만든 구덩이에 스스로 빠지는 건 너무 어처구니없으니까. 그런데 상황은 그렇지 않아. 훨씬 심각해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지.’ 그땐 그 구덩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면서도 세주는 형석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부부도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내 마음속에 그런 구덩이가 있어. 빠졌는데 나오는 방법을 모르겠어.’ --- p.233 겨울엔 눈조차 제대로 오지 않았다. 유주는 아침이면 코끝이 시릴 정도로 슬픔의 냄새를 맡았다. 낯설고 매캐한 그 냄새는 스산한 겨울바람처럼 어디선가 불어와 가슴 안으로 휘몰아쳤다가 흩어지듯 사라졌다. 그러면 그제야 실은 아주 익숙한 냄새라는 것을 알아채고 몸서리치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겨우내 맨발로 눈 덮인 벌판을 헤매듯 걸었다. 유주는 아슬아슬한 곡예처럼 하루하루를 버티며 생각했다. 이건 병이고 나을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나을 거라고. --- p.007 과연 사람을 가질 수 있을까.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거라면 세상은 얼마나 단순해질까.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거라면. 소유하는 동안 내 것이 틀림없다면. 하지만 사람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그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 p.088 세상에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유주는 의심했다. 아마도 이전이었으면 어렴풋이 진우를 떠올렸겠지. 그에게 받은 과분한 애정에 감사와 가책을 느끼면서. 그런 이유로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음을 변명하고 안도하며. 그 얼마나 달콤한 자기기만이었는지. --- p.178 세주 “섣불리 물을 수 없었어. 진실이 무엇이 되었든, 너희가 스스로 말해 주기 전까진.” 유주 “사람들은 감당할 수 있는 진실만 궁금해하는 법이에요. 감당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선 결코 알고 싶어하지 않죠.” 비주 “아무도 내겐 묻지 않았어요.”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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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비밀과 오해’는 약혼자의 죽음으로 인해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세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사건은 5년 전, 4월 5일 큰 언니의 약혼자가 자살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현장에서 세 자매는 마주하게 되죠.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의심과 오해가 생겨납니다. 제 상처는 감추기에만 급급하고, 상대의 상처는 제대로 들여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세 자매의 긴장감 넘치는 서스펜스가 펼쳐집니다. 정신없이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약혼자가 죽은 그날 새벽,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거리낌 없이 누군가의 비밀에 관해 묻습니다.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채로 말이죠. 중간중간 삽입된 삽화는 글을 쓴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읽는 이들에게 다정한 감성 길잡이 역할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등장인물 소개 세 자매 한세주, 32살 : 첫째 딸. 수학 학원 강사. 한유주, 27살 : 둘째 딸. 작은 출판사 편집 디자이너. 한비주, 22살 : 셋째 딸. 인터넷 쇼핑몰 운영자. 세 자매의 남자 오형석 : 세주의 전약혼자. 5년전 세주와의 결혼식 새벽에 자살한 문제적 남자. 유승현, 25살 : 세주의 남자. 세주가 근무하는 학원 앞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모델. 강진우, 30살 : 유주의 남자. 금융회사 직원. 작가. 유주가 다니는 출판사 사장의 친한 후배. 김동욱, 35살 : 비주의 남자. 회사원. 비주가 사는 연립 주택의 이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