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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시선

책소개

목차

제1부

가야할 길이 뒤틀려 끊기더라도 그게
또 다른 길이 되나니
몇 개의 산 넘고 물 건넜다고 힘들다고
죽겠다고 소리치지 마라

내가 낸 산길
한 해의 마지막 날
스님들과 목욕을 하며
뒷골목의 빨간 우체통
바람에 흩날리는 저 깃발
봄밤에
정구지꽃은 앙증맞다
수상한 이발소
길을 걷다가
산중의 밤은 언제나 처음 묵는 것처럼
아, 지리산
나는 다부다
어머니는 구례병원에 와불로 누워 계시고


제2부

점잖지 못하고 초연하지도 못하고
아파 몸을 부르르 떨었으니 내 살 속에
나를 원망하는 핏기가 퍼진다 붉게
나를 붉히리라

가시를 움켜 잡고 뜯으니
각설이 여가수
내 집 옆
매화
멀거이 배가 불룩하다
봄물 소리
사진을 찍는데
산골의 밤
아침, 차를 마시는데
악양정 마당에 서서
결국 세상을 버리고 만 삼촌
다시 소학을 읽으며


제3부

차마 기계 댈 수 없어 올해도 낫으로
혼자서 내 살보다 더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다루는 내 안타까운
무식함이여

시집 온 수선화
낫질 하다 쉬며
개복숭아꽃
꽃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목압다리
삼정마을에서
새벽에 차를 마시며
장마
억새를 잘라내며
어머니와 찻집에 앉아
예쁜 일기장을 사다
구들방을 손보며
점순이를 집적거리는 깡패사촌


제4부

먹고 사느라 대대로 힘들었던 화개골
사람들에게 먹물이 가득해진다면 여윈
몸의 나는 더 이상의 희망도 절망도
없어질 게니

화개골에 먹물이 가득해지면
저 차산 중턱의 농막은
내 마음을 수양하는 것일까
누군가 고사리를 뜯어간 후에
멋쟁이 할머니들
마을회관서 밥을 먹으며
성내는 마음
고로쇠나무를 심으며
올케 대신 밥상 머리에 이고
어머니를 여동생에게 떠 넘겼으니
오준석 군
노아의 죽음

저자 소개 2

1987년 [오늘의문학]과 1989년 [한국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생선상자수리공』 『마방지마을』 『공산당』 『노랭이 새끼들을 위한 변명』 등 20여 권의 저서가 있다. 지리산 화개동에서 차농사를 지으며, ‘청학동’으로 인식되던 불일폭포에 다니는 걸 낙으로 삼고 있다.

사진문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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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소외계층과 사라져 가는 주변의 풍경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불감시대/1993년] [비정도시/2017년]을 포함 20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저서로는 『하야리아』 『비정도시』를 포함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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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257*188*20mm
ISBN13
9791162445372

출판사 리뷰

1987년 [오늘의 문학] 제2회 신인상으로 시작활동을 시작한 조해훈 시인이 최근 시집 『내가 낸 산길』을 ‘도서출판 역락’에서 펴냈다. 역락의 기획시집 시리즈 ‘오후시선’ 일곱 번째 시집이다. 50편의 시편마다 문진우 사진가의 흑백사진이 각각 실려 있다.

조 시인의 개인시집으로는 16권 째인 이번 시집에는 그가 2017년 봄 지리산에 들어가 녹차농사를 지으며 쓴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화개골 쌍계사 위 목압마을의 농가를 얻어 산중 생활을 하고 있다. 고려와 조선, 일제시기에서 해방 이후까지 신선들이 사는 청학동으로 인식되던 불일폭포로 올라가는 마을이다.
4부로 나눠진 시집에는 화개골의 자연, 주민들의 생활모습, 계절의 변화, 차산에서 농사일을 하는 일상 등이 담겨 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화개골에서 있었던 빨치산과 관련한 이야기도 삽입되어 있다.

이번 시집에 들어있는 조 시인의 시편들은 몇 개의 특징이 있다. 첫째는 산문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마치 선방의 수행자처럼 담담하고 솔직한 어조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차산에서 일을 하고 천천히 내려오다 뒤돌아본다 한 사람만 다니는 실뱀 같은 산길이 꼬불꼬불 나를 따라 내려오고 있다…”(시 [내가 낸 산길] 부분)이나 “삼라만상 모든 잘못이 당신에게 있다고 스스로 죽비를 내리치시다보니 몸이 견디지 못하여 주저앉으신 것…”(시 [어머니는 구례병원에 와불로 누워계시고] 부분) 등의 표현이 그렇다.

둘째는 지리산 화개골의 현재 및 과거의 역사를 소묘하듯 그리고 있다. 시인이 사는 골짜기에서 50년 넘게 이발소를 운영하는 할아버지를 소재로 지은 시에서 “가위로 느리게 느리게 이발을 해주곤 의자 젖혀 얼굴 면도를 해주곤 낮은 세면대에 앉혀놓고 머리를 감겨주신다…”라며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산골의 현재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 또한 “아지트에 도착하니 며칠 전 보았던 그 젊은이들이 토벌대의 총에 맞아 모조리 죽어 땅에 뒹굴고 있었으니…”(시 [올케 대신 밥상 머리에 이고] 부분), “여순사건 한국전쟁으로 이곳에서 눈 감긴 사람들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왜 자꾸 그들을 이렇게 찾아 나서는가…”(시 [삼정마을에서] 부분)이라며,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마치 발굴하듯 불러내고 있다.

셋째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간에 그들의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저간에 깔고 있음도 읽을 수 있다. “잠시 뒤에 보니 새끼가 몸에서 나오다/ 노아도 새끼도 이미 목숨이 끊어진 상태였으니/ 충격 크고 마음 아프지만 정이 많이 든 노아/ 아, 죽음이든 삶이든 그저 한 세상 아니던가/ 어디일지 모르지만 너와 새끼들 영혼 편히 잘 가거라”(시 [노아의 죽음])라며, 어느 날 모르는 새끼 고양이 노아가 집 현관에 나타나 매일 밥을 주며 함께 지냈는데 새끼를 낳다 죽자 명복을 빌고 있다. “세상의 생명은 모두 각자의 가치를 지닌다 내 키의 두 배가 넘는 차산의 억새도 마찬가지이니 …너흰들 낫으로 자르면 육체의 아픔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가 없을까만 …”이라며, 차산에 대나무처럼 자라는 억새를 낫으로 자르면서 그들도 생명이 있어 아플 것이라고, 모든 생명체의 존엄성에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아프고 외로운 생명들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서 밀려나고, 눈길 받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그윽하고 섬세하다 볼 수 있다.

넷째는 50편의 시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차산에서 일을 하는 모습과 찻잎을 따 제다를 하는 과정을 읊은 내용이다. “차나무 사이로는 낫으로 베어낸 억새가 시위하듯 드러누워 나를 바라본다 …놀라 베어 내려고 왼손으로 잡고 있던 가시를 나도 모르게 쭈우욱 훑어버렸으니 아야, 실장갑 꼈다지만 가시들이 손에 그대로 다 박혀버렸다…”(시 「가시를 움켜잡고 뜯으니」 부분), “이렇게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 적은 없었다 다섯 번째 덖어 덕석에 뜨거운 차를 올려 비비곤 허리 잡고 잠시 쉰다 밤, 초록의 찻잎 갖고 마술을 부리는 중이니…”(시 「나는 다부다」 부분)에서 보듯 차농사를 짓는 일이 무척 고단함을 역설하고 있다. 차농사를 기계로 편하게 짓는 현실에서 가장 높은 곳의 차산에서 무식하게(?) 낫 한 자루로 옛날 농민들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힘들게 일을 하는 모습은 마치 스스로 고행을 자처하는 듯하다.

다섯 번째는 한시나 한문 문장에 종종 쓰이는 ‘乎(호)’·‘耶(야)’ 등의 어조사 및 감탄사의 뜻을 나타내는 ‘아,‘자(字)를 많이 쓰고 있다. 한시 전공자인데다 한시를 짓고 있는 시인의 의도적인 습관일 수도 있다. 이는 고전시가와 현대시를 접맥하려는 차원에서 고전문에 쓰이는 어조사를 대입시킨 것이다. 산문시가 주를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아, 솜털처럼 줄줄이 달린 진한 분홍빛 꽃이라니 삼신마을 B카페 앞 내 눈빛과 마주친 꽃들”(시 「개복숭아꽃」), “아, 그 분들에 대한 먼 그리움으로 풀어놓는다”(시 「악양정 마당에 서서」) 등에서 그러한 시작 형태를 간파할 있다.

조 시인은 인간의 실존을 역사에서 살펴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보니 이번 시집에서도 지리산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에 속하는 화개골에서의 삶과 주민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또는 ‘지나간 일을 상기하며’ 지은 시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 도시민들이 살아가는 것과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화개골 사람들의 모습뿐 아니라 의식까지 시로 읽어내고 있다. “…이곳 할머니들은 살면서 마음에 만들어진 어떤 막 같은 게 있는 것 같으니 그건 결코 허물 수 없는 한 집안의 여자라는 생각의 장벽이다 누구의 강요라기 보단 생존을 위한 경험에서 나온 지혜일지도”(시 「멋쟁이 할머니들」 부분)처럼 말이다.

한편 조 시인은 1988년 첫 시집 『생선상자 수리공』(도서출판 시로)를 발간한 이후 『히줄래기』(1990)? 『마방지마을』(1999)을 비롯하여 『노랭이 새끼들을 위한 변명』(2018) 등 10여 권의 시집을 펴냈다. 또한 역사와 고전문학을 전공한 학자이기도 한 그는 [필사본 『화랑세기』로 보는 『풍월주의 세계』 『조해훈의 발굴 유적 순례』 등 대중역사서도 펴냈고, 지리산 화개골에서 ‘목압서사’와 ‘목압고서박물관’?‘목압문학박물관’을 운영하며, 화개골 주민들과 역사와 인문학 등 다양한 공부를 함께 하고 있다.


[시인의 말]

거대한 지리산의 품에 안기기 위하여 고교시절부터 그의 미세한 혈관까지 더듬고 직접
발바닥으로 다 밞아봤다. 정작 그 넓고 깊은 가슴에 들어오니 산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대를 이어 산짐승처럼 온순하게 살아온 사람들, 계곡의 바위, 풀 한 포기에게 먼저 말을 건네라고 이른다.

2020년 6월
목압서사에서 조해훈



역락 「오후시선」 소개

오후, 일상의 시선이 멈춘 곳에 「오후시선」이 있다. 분주한 오전의 일상을 뒤고 하고 여유가 있는 오후의 시간을 우리네 삶에 전하고자 한다. 시를 읽고 사진을 보며 정서적 충만을 독자들이 마음 깊이 느낄 수 있는 시선집이 되고자 한다.


1. ‘시와 사진, 꽃과 이슬의 만남’

누구나 느끼듯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 변화의 틈 속에서 문학은, 시는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그 애씀이 세상의 변화처럼 변화를 통해 달라지려고 한다. 우리는 그 변화의 길 위에서 시와 사진의 만남을 기획했다.

「오후시선」은 그렇게 시작의 첫 발자국을 딛는다. 시의 행간과 사진의 여백에서 스며 나오는 느낌은, 두 장르의 충돌에서 오는 충만감을 안겨줄 것이다. 때로는 잔잔하게 더러는 파격적으로, 시와 사진의 만남은 독자들에게 경계의 충격을 선사할 것이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진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시집을 읽는 또 다른 기쁨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시와 사진의 경계에서 은밀하게 연결되는 그 지점에서 파장처럼 퍼지는 묘한 어울림. 그 관계미학이 주는 처음은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출렁거린다.

「오후시선」은 앞으로 해외 시인들과 사진가들이 함께 하는 작업도 계획하고 있다. 젊은 해외 사진가와의 작업은 진행 중에 있다.

세상의 좋은 시와 좋은 사진이 만나서 전하는 여유와 안식. 「오후시선」은 시와 사진이 따로이면서 함께 하는 길 걷기로 느리지만, 앞으로 가길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해설과 표사도 없이, 오롯이 시와 사진만으로 「오후시선」은 독자들에게 조용하게 다가 갈 것이다. 기획 시집으로는 처음 시도 되는 작업. 첫 시집은 우리나라 대표 서정시인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복효근 시인의 열 번 째 시집 「고요한 저녁이 왔다」이다.
도서출판 역락이 정성을 다해 만든 「오후시선」에 애정 어린 질책과 응원을 부탁드린다.

“사진과 시는 순간적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 이런 작용은 사토리(satori:홀연히 깨달음)로 연결된다. 현대사회는 고유한 사고가 존재하고, 그 사고에 적합한 매체를 요구한다. 시와 사진은 바다처럼 넓은 지성과,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 사진평론가 김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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