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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벽이 벽을 바라보며 창을 생각하는 동안 내가 나를 바라보며 너를 생각하는 동안 꽃잎이 떨어지는 이유 괜찮다고 말하면 사월 흔들리며 균형 잡는 나무, 홀로 푸르다 단식을 하면 냉동기억창고 게으른 세잔 조춘 두 송이씩 지는 섬 만난 적 없는 내가 걸식 신의 한 수繡 제2부 나는 매일 꽃을 그리고 너는 전송받은 꽃을 물병에 꽂는다고 했다 풀잎의 마음 그는 여러 사람이다 빈틈엔 꽃 다행이다 멈춘 시간 난청 손발이 따뜻한 사람 저 맹인의 눈이야말로 진정 평등한 눈이 아니겠느냐? 파리에서 비를 만나면 결핍이 만들어내는 표정 나는 매일 꽃을 그리고 생걱정 제3부 가까워지기 위해 점점 멀어지고 있다 우린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다른 시선 카프카는 평범이 기적이라 했다 무의식중에 벙어리 빗방울 뱃사람의 말 지평선지평선 삼촌 제주도 말 안녕을 빌 만한 문장 거울 속 가을 한낮 위도에서 하룻밤 뺄셈이 필요한 집 제4부 그러니까 어떤 것은 많은 것과 바꾸고도 두고두고 좋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춤을 추듯 서쪽 꽃밭 삼월 일 년 뒤 만난 당신 굽은 길 2020년 3월 23일 풍찬노숙 다시, 몽마르트르 가을 안쪽 함께 가는 저녁놀 혼자 말하고 혼자 듣는다 눈 온 날 |
작은詩앗·채송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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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몽마르트르에 왔었지만 몽마르트르만한
기억이 없어 다시 몽마르트르에 왔다 그림보다는 그림 그리는 화가들을 바라보는 눈이 생겼고 사크레쾨르 성당 앞에선 파리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을 올려다봤고 언덕을 내려오는 길에서 우연히 달리 씨를 만났다 문 닫은 오베르 쉬즈 우아르의 라부여관과 만나지 못한 아를의 랑글로아 다리처럼 여행은 다시 올 이유를 곳곳에 숨기는 것만 같다 한 번의 여행은 본 것과 볼 것을 구분해주고 두 번의 여행은 몇 번 와도 좋을 곳과 너무 많은 곳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너는 비염이 거의 나았다고 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듣기 좋은 말이었다 마지막 날 우리는 종일 아무도 만나지 않는 대신 오르세에서 고흐 씨를 한 번 더 만났다 그러니까 어떤 것은 많은 것과 바꾸고도 두고두고 좋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 「다시, 몽마르트르」 실물처럼 그려야 한다는 너와 실물과 다르게 그려야 한다는 나처럼 사라질 것만 찍고 싶다는 사진가와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만 찍고 싶다는 시인처럼 우린 같은 곳에서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다 가까워지기 위해 점점 멀어지고 있다 우린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카프카는 평범이 기적이라 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기를 바랐지만 같은 시각 아침을 먹고 FM을 들었고 몇 사람을 만나며 주워 담지 못할 말을 또 하고 혼자 저녁 찬거리를 걱정하고 빨래를 걷고 산책하며 쓸데도 없는 잡념을 채집하고 달력을 넘기며 오지 않은 날을 체념하고 화장을 지우며 멀리 있는 나를 불러와 독대하는 무덤,덤한 하루였다 --- 「다른 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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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시가 서로 낯설게, 또 서로 너그럽게 어우르고 스며드는
줄여 쓴 말과 촘촘한 고요 속 긴 울림 공감과 위로의 따뜻한 시선 제자리에서 깊어지는 삶의 방식 아들은 파리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엄마는 일상을 시로 쓰고 어제의 나와 다른 오늘의 나, 매번 다른 사람으로 다가오는 너 가까워지기 위해 점점 멀어지고 있는 우리들 우리의 지난한 삶을 위무하고 에너지로 환원하며 빛나는 서정의 한 면목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온 나혜경 시인의 네 번째 신작 시집 『파리에서 비를 만나면』(도서출판 역락)이 출간되었다. 나혜경 시인은 전북 김제 출생이며, 1991년 사화집 『개망초꽃 등허리에 상처난 기다림』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시집 『무궁화, 너는 좋겠다』, 『담쟁이덩굴의 독법』, 『미스김라일락』을 상재한 바 있다. 이번 시집은 짧은 시 40여 편과 프랑스에 관한 시 등 모두 50편을 파리의 이야기를 담은 사진 50편과 함께 실었다. 나혜경은 [작은詩앗·채송화] 동인 활동을 통해 짧은 시를 써 왔다. 물론 짧은 시만 쓰는 건 아니지만, 시를 줄여 쓰는 동안 말도 줄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말을 줄인 시는 여백이 길다. 여백은 고요와 함께 긴 울림으로 확장되기를 바라며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비워둔다. 이번 시집에서는 김동현의 사진과 컬래버 작업을 하였다. 특별히 의미 있는 건 김동현은 파리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있는 시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어떤 약속도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활동하다가 시사진집을 내보자는 제안을 받고 시와 사진을 한 권에 담았다. 시인은 아들의 빈 자리를 절절히 체험하며 시를 쓰고, 아들은 사진 공부에 몰두하며 외로운 시간을 견뎠을 것이다. “나는 매일 꽃을 그리고/ 너는 전송받은 꽃을 물병에 꽂는다고 했다”에서와 같이 애틋함을 해결하는 방식이 각자의 자리에서 깊어졌고, 시인은 이제 아들이 엄마를 걱정할 만큼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고 말(「나는 매일 꽃을 그리고」에서)하고 있다. 빈자리와 외롭고 그리운 시간은 깊어지고 단단해져서 이국적 풍경과 함께 오히려 위안으로 다가온다. 한 발 나아갈 수 없을 땐 제자리에서 저렇게 깊어지는 겁니다 -「나무, 홀로 푸르다」 전문 나무는 왜 푸른가. 부동의 성질을 가진 나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바에야 제자리에서 깊어지는 삶의 방식 때문이다. 힘든 시기를 견디며 몰두하고 매진하다 보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나무의 푸르름처럼 성장하고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것이다. 오늘의 내가 두 줄짜리 문장을 쓰다 나가면 내일의 내가 네 줄로 늘여놓고 모레의 내가 열 줄로 늘이느라 고심하다 그만두면 글피의 내가 지방을 발라 근육만 남겨놓고 그글피의 내가 조금 더 살을 붙이고 -「만난 적 없는 내가」 부분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가 되기 위해 ‘지금, 여기의 나’가 되어 현재에 충실하다. 어제의 내가 아닌 오늘의 나는 어제까지의 삶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어제와 지금이 모여야 내일이 되고 미래가 되는 평범한 우리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룻밤 묵어가려고 풀잎의 등을 꼭 붙들고 있는 나비 한 마리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다 편히 쉬다 가게 나비를 꼬옥 보듬고 있는 풀잎 -「풀잎의 마음」 전문 저녁때쯤 시인은 풀잎의 뒷면에 붙어 있는 나비 한 마리를 포착했나 보다. 하룻밤 이슬이나 피하자는 게 사실이겠지만, 시인은 풀잎의 너른 마음을 헤아려본다. 나비가 하룻밤 편히 쉬다 가도록 풀잎이 나비를 꼬옥 안아주고 있다고 상상해본다. 시인의 동심이 투영되었다. 시인은 평등을 실천하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작고 사소한 것을 포착하고, 결핍이 만들어내는 표정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또한 괜찮다, 걱정하지 말라며 불안한 마음을 다독인다. 시인의 평범한 고백과 위로를 통해 우리도 그의 문장에 공감하고 위안을 받는다. 꺾이고 휘고 뒤틀린 나무 살기 위해서 죽기 위해서 다시 살기 위해서 그렇게 몇 고비를 넘기고 푸르름 한 그루 얻은 나무 -「굽은 길」 전문 생의 굽이굽이엔 고난이 있다. 꺾이고 휘고 뒤틀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낸다면 고비를 넘기고 반드시 “푸르름”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푸르른 나무 한 그루에 새겨진 삶의 물결무늬는 훈장이다. 시를 줄여 쓰는 동안 말도 조금씩 줄었습니다. 고요가 좀 더 촘촘해지길 바라며 말과 말 사이에는 파리의 풍경을 끌어다 두었습니다. 사진 속에 담긴 시간과 장면이 시가 되고 시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서로 낯설게, 또 서로 너그럽게 어우르고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가끔 이곳에 없는 나를 데려오는 일은 즐겁기도 하고 고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조차 바람처럼 왔다 가는 일. 그러니 모두가 무겁고도 가볍습니다. ‘시인의 말’에서처럼 시를 쓰는 일, 삶을 살아내는 일은 즐겁기도 하고 고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이조차 순간이며 바람처럼 지나가는 일이다. 그러니 시인에게 삶은 무겁다고 생각하면서도 참으로 가벼운 것이기도 한 것이다. [시인의 말] 시를 줄여 쓰는 동안 말도 조금씩 줄었습니다. 고요가 좀 더 촘촘해지길 바라며 말과 말 사이에는 파리의 풍경을 끌어다 두었습니다. 사진 속에 담긴 시간과 장면이 시가 되고 시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서로 낯설게, 또 서로 너그럽게 어우르고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가끔 이곳에 없는 나를 데려오는 일은 즐겁기도 하고 고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조차 바람처럼 왔다 가는 일. 그러니 모두가 무겁고도 가볍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