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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옮기며
박래겸과 《서수일기》 1822년 윤달 3월 16일 암행어사로 임명되다 3월 21일 첫날의 여정을 떠나다 3월 22일 개성 땅을 지나다 3월 23일 일련정에 가다 3월 24일 가리탄에서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3월 25일 호로천을 구경하다 3월 26일 평안도와 황해도의 경계를 지나다 3월 27일 온천물이 나오는 것을 보다 3월 28일 가창촌을 가다 3월 29일 소경이 점을 쳐주다 4월 1일 만류제를 보다 4월 2일 승경에 사는 백성의 고초를 듣다 4월 3일 빗속에 길을 나서다 4월 4일 연광정에 오르다 4월 5일 영명사에서 자다 4월 6일 미친 사내를 만나다 4월 7일 연광정에 오는 사람들을 보다 4월 8일 무료한 4월 초파일 밤 4월 9일 비 때문에 여관에 머물다 4월 10일 기자묘를 보다 4월 11일 은산 땅에 들어서다 4월 12일 마을 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4월 13일 맹산현에서 자다 4월 14일 기생과 쌍륙을 하고 놀다 4월 15일 말이 아파서 고생을 하다 4월 16일 관서의 돌로 된 집들 4월 17일 점쟁이가 점을 쳐주다 4월 18일 삼탄에 도착하다 4월 19일 참봉 현심목을 만나다 4월 20일 유생들과 과거시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4월 21일 노파와 이야기를 나누다 4월 22일 읍교의 무리에게 신분을 밝히다 4월 23일 염탐한 기록을 정리하다 4월 24일 망경루에 오르다 4월 25일 해주 고을에 도착하다 4월 26일 영유현에 들어서다 4월 27일 옛 친구인 수령과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다 4월 28일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목도하다 4월 29일 삼화에 도착하다 5월 1일 진사 홍희규를 만나다 5월 2일 보통문에서 일행들이 모두 모이다 5월 3일 만수대에서 계현과 홍성구를 만나다 5월 4일 일행이 많아 매우 조심하다 5월 5일 백성들이 수령의 유임을 요청하다 5월 6일 빗줄기가 세차서 유숙하다 5월 7일 열파정에 오르다 5월 8일 대동문에서 이기연과 만나다 5월 9일 이기연, 끝내 기생과 헤어지지 못하다 5월 10일 신분을 속이고 원님을 만나다 5월 11일 저녁에 평양 땅에 들어서다 5월 12일 경란의 어머니 빙심이 암행어사를 알아보다 5월 13일 순안현에서 출두를 외치다 5월 14일 중종조가 귀양살던 곳을 찾아가다 5월 15일 하루 종일 조사하다 5월 16일 옛 친구를 조사하다 5월 17일 관리들이 동태를 엿보다 5월 18일 삼화읍에 도착하다 5월 19일 그대로 머물다 5월 20일 기생과 잠자리를 가지다 5월 21일 그대로 머물다 5월 22일 황룡산성에 오르다 5월 23일 평양에 들어와서 잠을 자다 5월 24일 암적의 가게에서 자다 5월 25일 신분이 드러날까 노심초사하다 5월 26일 암행어사 출두를 외치다 5월 27일 비가 내려 조사를 하다 5월 28일 계속 조사하다 5월 29일 현심목을 방문하다 6월 1일 영원군으로 들어가다 6월 2일 업무를 조사하다 6월 3일 기생들이 알아보지 못하다 6월 4일 가창에서 잠을 자다 6월 5일 암행어사의 행방을 묻는 사람을 만나다 6월 6일 백상루에서 암행어사 출두를 외치다 6월 7일 업무를 조사하다 6월 8일 업무를 조사하다 6월 9일 업무를 조사하다 6월 10일 길 닦는 사람을 만나다 6월 11일 어사출두를 외치다 6월 12일 서울에서 온 편지를 받아보다 6월 13일 업무를 조사하다 6월 14일 신분을 밝히고 증산현에 들어가다 6월 15일 업무를 조사하다 6월 16일 평양성 안에서 자다 6월 17일 백마문에서 출두하다 6월 18일 업무를 조사하다 6월 19일 신분을 밝히고 성천으로 향하다 6월 20일 부용을 만나다 6월 21일 부용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짓다 6월 22일 업무를 조사하다 6월 23일 점심 때 온정원에 도착하다 6월 24일 암행어사에 대한 유언비어가 돌다 6월 25일 업무를 조사하다 6월 26일 영빈 수령 정선지를 만나다 6월 27일 평양에 다시 들어가다 6월 28일 심한 더위에 길을 떠날 수 없다 6월 29일 또 머무르다 6월 30일 어사출두를 외치다 7월 1일 객지에서 생일을 맞다 7월 2일 순찰사를 방문하고 돌아와 자다 7월 3일 비가 심하게 내리다 7월 4일 서울의 괴질 소식을 듣다 7월 5일 배를 정박시키다 7월 6일 밤에 순찰사를 만나다 7월 7일 순찰사를 만나다 7월 8일 암행어사 탐문 때문에 비극적인 일이 생기다 7월 9일 순찰사가 보낸 기생과 동침하다 7월 10일 평양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7월 11일 순찰사와 부벽루에서 온종일 놀다 7월 12일 순찰사와 다경루에 올랐다가 새벽녘에 돌아오다 7월 13일 비가 내려 순찰사와의 달구경 약속을 취소하다 7월 14일 신분을 드러내고 다니다 7월 15일 업무를 조사하다 7월 16일 부용과 〈적벽부〉를 낭송하다 7월 17일 업무를 조사하다 7월 18일 월파루에 올라 바라보다 7월 19일 늙은이에게서 여러 이야기를 듣다 7월 20일 해서 지역의 수해를 목도하다 7월 21일 고려 때의 유적을 두루 감상하다 7월 22일 선죽교를 찾아가다 7월 23일 머물면서 장부를 수정하다 7월 24일 서계와 별단을 정서하는 일을 시작하다 7월 25일 머물러 있다 7월 26일 머물러 있다 7월 27일 머물러 있다 7월 28일 상감을 뵙다 해제 《서수일기》, 암행어사의 생생한 발자취를 담다 주석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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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일기》,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생생한 발자취
암행어사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 혹은 어려운 일들을 해결해 주거나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치며 탐관오리를 색출하여 봉고파직封庫罷職을 명하는, 서늘한 위엄을 갖춘 정의의 화신이 제일 먼저 연상되지 않는가? 아마도 널리 알려진 《춘향전》이나 박문수의 일화, 그리고 암행어사를 다룬 드라마들이 이러한 이미지 형성에 한 몫을 했을 듯 싶다. 그렇다면 실제 암행어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우리가 상상하는 바로 그런 서슬 퍼런 정의의 화신이었을까? 여기 자신이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직접 보고 듣고 행했던 일들을 담담하게 서술한 일기가 있다. 홍문관 부교리로 있던 박래겸朴來謙(1780~1842)이 43세 되던 1822년 3월 16일부터 동년 7월 28일까지 장장 126일 동안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활약했던 당시의 기록 《서수일기西繡日記》가 바로 그것이다. 다른 어떤 기록보다 생생한 암행어사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서수일기》는 암행어사의 참모습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 암행어사와 일기, 그리고 박래겸과 《서수일기》 암행어사暗行御史는 조선 시대 왕명을 받고 비밀리에 지방을 순행하면서 악정惡政을 규명하고 민정을 살핀 임시 관직으로 수의繡衣·직지直指라고도 불렸다. 몇몇 암행어사는 지방을 암행하는 동안 일기를 남기기도 했는데, 문헌상으로 남아 있는 암행어사 일기는 대략 15종으로 추산된다. 박래겸의 《서수일기》도 그 가운데 하나다. 박래겸은 1829년 영의정 이상황李相璜이 심양정사審陽正使로 갈 때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수행했고, 1833년 조봉진曺鳳振이 북경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갈 때 부사로 임명되어 수행했다. 이후 그는 43살에 평안남도 암행어사의 체험을 담은 《서수일기西繡日記》, 48살에 함경도 북평사北評使 때의 공무를 기록한 《북막일기北幕日記》, 50살에 서장관으로 심양瀋陽을 다녀온 견문을 담은 《심사일기瀋使日記》 등 3권의 일기를 남겼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서수일기》는 박래겸이 1822년 3월 16일부터 동년 7월 28일까지 126일 동안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피던 당시의 일들을 기록한 일기다. 박래겸은 1822년 3월 16일 봉서封書를 받고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나가게 된다. 사목책 한 권, 마패 하나, 유척 두 개를 하사받았고, 수행원은 모두 12명이었는데 신분 노출을 꺼려 몇 개의 무리로 나누어 임무를 수행했다. 자신도 철저히 신분을 위장했고, 가급 행색을 추레하게 꾸며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지 않으려 했다. 대부분의 암행어사 일기에는 암행暗行이나 명행明行, 수행원들의 모습, 신분 노출에 대한 불안, 어사출두 등 다양한 활동이 담겨 있다. 특히 《서수일기》에는 다른 어떤 기록보다 그러한 암행어사의 활동이 사실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암행어사 신분을 숨기기 위해 애쓰다 《서수일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대목은 암행어사 신분 노출과 관련된 일들이다. 암행어사를 사칭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던지 이들을 징치懲治하는 내용도 보이고, 예전에 유람했던 고을을 지나다 평소 안면이 있던 관리들을 만나자 자신의 목적지를 둘러대는 모습도 보인다. 박래겸은 신분을 속이며 고을 수령과 만나기도 하고,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을 보고 의심한 역졸에게 탐문을 당하기도 한다. 뱃사공이 자꾸만 캐물어서 곤욕스러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으며, 암행어사가 성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자신이 직접 듣는 등 난감한 일을 여러 번 겪었다. 가짜 암행어사 문제는 4월 28일 기록에도 언급된다. 읍교邑校들이 암행어사 일행을 가짜 암행어사로 의심하여 끈질기게 미행을 하다가, 죄인들을 겁박하는 철삭鐵索을 보여주면서 위협하는 심각한 상황에까지 이른다. 암행어사도 이에 질세라 마패를 꺼내 보이자 읍교들이 혼비백산하는데, 그 모습이 아주 희화적戱畵的으로 그려져 있다. 당시 가짜 암행어사가 얼마나 활개를 쳤는지, 또 암행어사가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기녀들은 평소에 많은 사람을 상대하여 눈치가 여간 빠른 것이 아니었다. 5월 12일의 기록에는, 41살의 퇴기退妓 빙심氷心이 등장한다. 초라한 행색에도 박래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예를 갖춰 대접을 한다. 빙심의 딸 경란鏡鸞도 뒤늦게 찾아와서는 부용과의 일화를 들며 그가 암행어사 신분임을 짐작한 듯한 태도를 취한다. 이에 결국 박래겸은 서둘러 자리를 뜬다. 이처럼 신분을 끝까지 들키지 않으려는 암행어사의 고군분투가 《서수일기》 곳곳에 보인다. 이밖에도 고을의 수령이 옛 친구였지만 신분 노출을 우려해 만나지 못한 일, 자신의 신분에 대해 밀고한 이를 잡아 가둔 일, 일행이 너무 많아 신분 노출의 위험이 있어 일부 사람들을 먼저 돌려보낸 일 등을 통해 신분을 숨기는 것은 암행어사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였지만, 암행暗行에 많은 노력을 쏟아 부어도 그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기란 현실적으로 무척이나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암행어사 출두를 외치다 암행어사가 출두할 수 있는 지역은 추생抽?에 의해 미리 결정된다. 박래겸은 총 21개 고을을 조사했다. 그중 어사출두는 순안順安, 삼화三和, 개천价川, 안주安州, 강서江西, 강동江東, 숙천肅川, 평양平壤 등에서 총 8회에 걸쳐 실행된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인접 고을에서 순차적으로 출두를 하지 않고 상당히 불규칙적으로 진행했다. 아마도 보안상의 이유인 듯하다. 그러나 짧은 기간 평안도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두했었기에 실효가 있었을지는 상당히 의문스럽다. 박래겸은 5월 13일(고을 수령 부재중, 저물녘, 문루門樓), 5월 18일(고을 수령 부재중, 아침나절, 관문), 5월 26일(고을 수령 부재중, 오후, 관문館門 앞), 6월 6일(고을 수령 있음, 점심 무렵, 백상루), 6월 11일(고을 수령 부재중, 저물녘, 아문衙門), 6월 17일(고을 수령 있음, 저물녘, 백마문), 6월 24일(고을 수령 있음, 저물녘, 문루), 6월 30일(고을 수령 있음, 저물녘, 대동문 문루)에 각각 출두했다. 주로 저물녘에 암행어사 출두를 외쳤고, 고을 수령의 부재에 크게 개의치 않았으며, 장소는 높은 문이나 관아의 문 앞에서 행해졌다. 암행어사의 주요한 권한은 봉고파직封庫罷職이라고 알려져 있다. 박래겸의 기록에는 봉고封庫(그의 기록에는 봉폐封閉라고 나온다)만이 나오는데 5월 16일 순안順安과 5월 29일 개천价川에서 각각 실행했다. 5월 13일의 기록에 등장하는 암행어사 출두 장면은 아주 실감나고 인상적이다. 수령이 산사山寺로 유람을 나가 부재중인 상태에서 어사출두를 외치니 사람들이 다급하고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한다. 출두에 놀라 성 안 사람들이 모두 소등을 하고 문을 전부 닫아걸었다는 대목에서는 암행어사의 위의威儀를 짐작할 수 있다. 상황을 파악한 관속官屬들이 분주하게 암행어사를 맞을 채비를 하는 모습도 보인다. 암행어사의 조사 방식이나 태도는 그리 엄정해 보이지 않는다. 피검자被檢者인 고을 수령과 유람선을 타고 유람하며 시를 수작酬酌하기도 했다. 또 출두 후에 조사 기간에 해당하는 6월 20일 기생 부용芙蓉과 시를 읊으며 시간을 보냈고, 5월 20일과 7월 9일에는 각각 기생과 동침을 한다. 그뿐 아니다. 3월 29일에는 어린 시절 친구인 이기연李紀淵을 찾아가고, 5월 8일 대동문에서 다시 만나 밤새껏 담소했다. 당시 이기연의 형인 이지연李止淵이 평안도 자산慈山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동생으로부터 암행어사 정보를 전해 들었을 것이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은 엄정한 암행어사의 처신으로는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인다. 암행暗行이 주가 되긴 했겠지만, 자신의 신분을 노출한 채 조사하는 명행明行도 여러 차례 있었다. 명행의 방식을 왜 취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암행이 불가능해서 부득이하게 신분을 드러낸 것인지, 아니면 암행의 의미가 없어서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7월 8일의 기록을 보면 암행어사의 탐문에 들어갔다가 서로 의심하여 한 가문 사람끼리 상대방을 칼로 찌르고 자신의 배를 찌르는 일까지 발생한다. 이러한 일들은 암행어사의 지나친 조사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의 통념과는 다른 암행어사의 생생한 모습이다. 명승지 탐승 그리고 지역 인사와의 만남 박래겸은 암행 과정에서 해당 고을에 있는 명승名勝을 직접 찾거나 관련된 이야기들을 남겨 놓기도 했다. 바쁜 공무 중에도 가급적 직접 찾아가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가 찾은 서북西北 지역은 예로부터 차별을 받아온 곳이다.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중앙의 관료로 임용되기는 힘든 지역이었다. 그는 이런 서북의 인사人士들에게 관심을 갖고 직접 방문하여 느낀 소회所懷를 남겼다. 황해도 곡산谷山의 명소 여러 곳을 방문한 3월 25일의 기록, 삼십육동천三十六洞天을 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4월 2일의 기록 등이 그 예다. 그러나 이 같은 박래겸의 행보가 단순 관광은 아니었다. 삼십육동천 내 한 고을에서 향임鄕任을 지냈던 이의 말을 빌려 좋은 경치 탓에 손님 접대가 잦아 백성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언급한다. 오죽하면 삼십육동천이 천벌을 받아야만 백성들이 살 수가 있다는 말을 할 정도라고 했다. 이처럼 그는 승지勝地를 유람하면서도 백성들의 고초에 대해 외면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명승뿐 아니라 일반 고을의 풍토나 풍속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은산殷山의 경관이나 분위기 등을 적은 4월 11일, 맹산현孟山縣의 풍속에 대해 기록한 4월 13일 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뛰어난 인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오지의 말단 관리임에도 마다하지 않고 직접 찾아가는 모습도 보인다. 4월 19일의 기록이다. 다른 날의 기록에서도 지역 인사를 찾아갔던 기록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4월 18일에는 정계팔丁繼八을, 5월 1일에는 홍희규洪羲圭를 만났던 일을 각각 기록했다. 이 같은 노력은 평안도라는 지역적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18세기 이후 평안도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하지만 당시 평안도 출신은 과거에 급제한다 해도 수령이 되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중앙 관직으로의 진출이 허용되지 않았다. 박래겸의 기록에서도 평안도 지식인의 울분과 좌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5월 1일에는 민치화閔致和가 웅천熊川에서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온 뒤에 양친을 봉양한다고 나오니, 이것으로도 관로官路 진출의 한계를 알 수 있다. 박래겸은 변변한 벼슬에도 오르지 못한 지방의 인사들을 만나서 그들과 진정으로 소통하려 노력함으로써 그들의 울분과 좌절을 어루만지려 했던 것은 아닐까. 바쁜 공무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명승을 직접 찾는 일에 대해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서북 지역에 대한 깊은 관심의 발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는 작정한 듯 지역의 유명 인사를 직접 만나본 뒤 그들의 높은 학문적 성취에 경의를 표하기도 하고, 지역 민심을 청취하기도 했다. 임금이 소외된 지역의 민심을 직접 파악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이러한 역할은 암행어사 본연의 임무에 매우 부합된다 할 수 있다. 백성들의 다양한 모습을 기록하다 관리가 직접적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만난다 하더라도 민심民心을 바로 듣기보다는, 자기 검열을 통한 여과된 정보일 때가 많다. 암행어사는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때문에 한층 가깝고 낮은 곳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의 기록에서도 다양한 백성들의 모습들이 아주 생동감 있게 등장한다. 특히 4월 21일의 기록이 흥미롭다. 노인은 그 마을의 사정을 알기에는 가장 적합한 대상이었기 때문에 박래겸이 주로 탐문하는 대상이었다. 할머니가 어사가 온다고 겁을 주며 우는 손주를 달래고 있었다. 마침 그 모습을 목격한 박래겸은 어사가 범이나 곰이나 무서운 짐승도 아니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은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데 어째서 어사를 무서운 대상으로 여기는지 궁금하여 그 연유를 물었다. 노인은 지금 세상에는 죄없는 사람이 없으니, 죄지은 토호나 관속들이 암행어사의 행차를 두려워해 맘껏 나쁜 짓을 행할 수 없을 것이라 했다. 여기에서 박래겸은 암행어사가 치죄治罪뿐 아니라, 억제抑制의 효과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암행어사의 필요성에 대해 절감한다. 이밖에도 데리고 다니던 말이 아파서 이동에 어려움을 겪는 일, 백성들이 수령의 유임을 요청하는 풍경,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자신이 암행어사인지도 모르고 암행어사의 행방을 묻는 장면, 자신의 공무처리 때문에 밥줄이 끊긴 가마꾼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경계警戒하는 일 등 비슷한 에피소드들이 자주 등장하여 흥미를 배가시킨다. 이런 일화를 통해 공무만 집행하는 엄정한 관리의 모습이 아닌 따뜻하고 인간적인 풍모까지 볼 수가 있다. 《서수일기》, 조선 시대 일기류 문학의 가치를 높이다 《서수일기》의 주된 내용은 일자와 날씨, 경유한 장소, 해당 장소의 대략적 형세, 명승지에 대한 감상, 다닌 거리, 해당 고을 수령의 성명 등이다. 서계書啓와 별단別單 등과 같은 공문서를 작성하기 위한 메모의 성격도 없지 않다. 염탐한 기록을 수시로 정리하는 모습이 일기에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문체는 매우 단조롭고 건조하다. 애당초 문학적인 화려한 수사보다는 기록적인 면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암행어사는 126일간 4,915리(최대 2654킬로미터·1리를 0.5킬로미터로 계산)를 이동했다. 이는 경부 고속도로의 6배에 이르는 거리다. 말을 타거나 걸어서 하루 평균 40리(21킬로미터)를 이동한 셈인데, 많게는 하루 120리(최대 64.8킬로미터)를 이동했다고 한다. 육체적으로 상당히 고된 강행군이었다. 오죽하면 암행어사가 임무 수행 중에 순직하는 경우도 있었을까. 게다가 숙식宿食마저 여의치 않았고, 또 아는 처지에 있는 사람을 치죄해야 하는 인간적인 고뇌도 엿보인다. 암행어사는 육체와 정신 모든 면에서 쉽지 않은 직책이었다. 그는 세 방향으로 나누어 일행을 배치하여 일을 수행했다.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신분 노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암행어사 신분을 완전히 숨긴 채 일처리를 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신분을 숨기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했지만 그렇다고 근무 태도가 완전무결하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피검 기관장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거나, 그가 소개한 기생과 동침하는 일 따위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명승지를 빠짐없이 찾아보고 거기에 대한 간략한 감상을 기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유명한 지역 인사들을 직접 내방하거나 서북 문인들의 분노와 탄식에 공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또 하층 사람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생생한 모습을 기록하는 등 신분을 숨기지 않았다면 알기 힘들었을 정보들을 얻었다는 점이 큰 소득이라 할 수 있다. 암행어사 일기는 얼마나 남아 있는지도 아직까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지금껏 발굴된 자료의 면밀한 역주와 연구를 통해 암행어사 일기가 가지는 문학적인 성격이 규명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연구가 조선 시대 일기류 문학의 가치를 높여 주는 하나의 작은 단초가 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