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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프롤로그 ‘레미제라블’: 혁명의 배반, 또 다른 시작 1부 우리가 알고 있던 프랑스혁명은 없다 1 여성을 위한 프랑스혁명은 없다 2 노동과 복지를 위한 프랑스혁명은 없다: 다시 읽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3 유색인을 위한 프랑스혁명은 없다: ‘흰 제국’과 ‘검은 인권’ 2부 영상으로 서술한 프랑스혁명 4 영화 〈프랑스대혁명〉에 투영된 사학사적 논쟁 읽기 5 미쳤거나 사랑에 빠졌거나: 프랑스혁명의 진정한 여성 영웅은 없다 6 군인 나폴레옹, 정치인 보나파르트로 변신하기: 아벨 강스의 〈나폴레옹〉 3부 프랑스혁명의 문화적 전환 7 문화적 사건으로서의 프랑스혁명: 담론, 축제, 기념물 8 프랑스혁명의 일상정치문화사: 린 헌트의 역사세계 9 바스티유 감옥과 ‘라 마르세예즈’의 변천사 10 프랑스혁명과 민중공연문화의 ‘문명화과정’ 에필로그 저항의 기억, 연대의 부활 부록 프랑스혁명의 기억을 찾아 천릿길 후기 | 미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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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키드’인 프랑스 ‘1820년 세대’와 ‘박정희의 아이들’인 우리나라 ‘386세대’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우리라. 이 두 세대는 군인 출신 통치자 밑에서 청소년기와 성년기를 보내며 시대적 단맛과 쓴맛을 동시에 경험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프랑스 제1제정이 영토 확장과 나폴레옹 법전이 대변하는 승리와 영광의 시대였다면, 한국의 제3공화국은 급속한 근대화와 경제성장이 견인했던 민족부흥의 호황기였다. 다른 한편, 혁명전쟁과 남북분단이라는 시대상황을 핑계로 두 ‘키 작은 남자’들이 옥죄는 언론통제와 독재정치 아래에서 성장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1820년 세대가 ‘1789년 혁명 다음 세대’라면, 386세대는 ‘4·19혁명 다음 세대’라는 유사점도 눈길을 끈다. 또한 ‘돌아온 왕의 시대’에 항거했던 1820년 세대가 1830년 7월 혁명의 주역이었다면, 386세대는 유신철폐 독재타도에 젊음을 바쳤고 ‘도루묵’ 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문민정부 출범에 헌신했다.---p.18~19
1570년대 무렵 처음 등장한 ‘바리케이드’라는 용어는 나무통barrel을 지칭하는 옛 프랑스어 ‘바리크’barrique에서 유래했다. 텅 빈 내부에 흙이나 돌과 같은 재료를 넣어 원하는 지점으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바리크’의 복수형이 바리케이드다. 평균 15분이면 완성되는 바리케이드는 ‘원자재’ 나무통 외에도 책, 마차, 거리짱돌, 벤치와 가정용 가구, 욕조와 매트리스 등 눈에 띄거나 동원 가능한 모든 잡동사니가 망라되었다. 역사적으로 바리케이드가 처음 선보인 것은 앙리 8세 통치기에 발생했던 1588년 5월 종교분쟁 때였다. 1648년 프롱드난에서도 등장했던 바리케이드는 프랑스인들의 발명품이었지만 독점물은 아니었다. 1787년 브뤼셀 주민들이 오스트리아 황제에 항거하면서 바리케이드를 세웠듯이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애용되었다. 이런 역사적인 용례를 반영하여 바리케이드는 “민간 반란군들이 방어용으로 구축한 즉흥적인 구조물로서 공권력을 대변하는 군사력이나 경찰세력에 대응하기 위한 도회(저항) 공간 확보의 수단”이라고 정의된다.---p.25~26 정치적·사회경제적 권력이동과 같은 ‘상부구조’의 변화뿐만 아니라 일상생활문화의 관행과 같은 ‘하부구조’도 급격하게 변했는지로 혁명의 성공 여부를 진단해야 한다는 것이 단턴의 생각이었다. 프랑스혁명에서 가장 혁명적인 요소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확신”으로 “구체제의 잔해로부터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총체적 개혁의지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런 ‘총체적 혁명’의 과격성은 남녀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당시 여성들은 ‘그대’tu 남성들과 어깨를 겯고 혁명의 아들딸로서 동등한 시민 권리와 의무를 향유했던가? 유감스럽게도 단턴은 ‘여성문제’라는 거울에 비쳐 프랑스혁명의 혁명성을 신중하게 재고하지 않았다. 자유·평등·우애를 남성적 미덕과 동일시한 그는 여성을 조국수호라는 신성한 혁명적 과업에서 제외시킨 것은 자연스럽다고 믿었다. 이런 보수적 태도는 프랑스혁명의 문화적 기원을 ‘아래로부터의 계몽주의’라는 진보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단턴 자신의 연구성과와 대비된다. 프랑스혁명을 해석하는 ‘학문적 가부장권’의 뿌리가 그만큼 깊고도 집요하다는 반증이리라.---p.38~39 나폴레옹 1세의 등장과 함께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여성 관련 법률도 약화되거나 폐지되었다. 나폴레옹 민법은 아버지가 자녀와 아내를 일정 기간 교정원에 감금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루이 14세 시절의 봉인장 제도가 되살아났다는 우려를 낳았다. 이혼법도 여성에게 불리한 쪽으로 수정되었다. 예를 들면 쉽게 이혼이 가능하도록 해주었던 ‘성격 차이에 의한’ 이혼허용 조항이 삭제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남편은 아내의 간통현장에서 그녀를 합법적으로 살인할 수 있도록 허용한 반면, 아내는 남편이 애인을 염치없이 집 안까지 데리고 와서 바람을 피우는 경우에만 이혼을 신청할 수 있었다. 이런 가부장권 부활의 분위기 속에서 ‘여성 시민’이라는 용어는 혁명적 여성을 지칭하는 대명사에서 하인을 지칭하는 야유적 단어로 전락했다. 그래서 나폴레옹 치하에서는 국가구성원으로서 여성을 지칭해야 할 경우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는 ‘여성 시민’이라는 명칭 대신에 ‘마담’이나 ‘마드무아젤’이라는 용어가 선호되었다. 부르봉 복고왕정은 여성의 권리를 더욱 약화시켰다. 단적인 사례를 든다면 1816년에 이혼법이 아예 폐지되었다. 프랑스 여성들은 이혼이 다시 합법화되는 1884년까지 ‘가정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평생 갇힌 양심수’로서 결혼생활을 견뎌야만 했다. 여성을 위한 프랑스혁명은 없었던 것이다.---p.45~46 서양의 다른 나라 여성들보다도 더 선구적이며 희생적으로 여권쟁취를 위해 투쟁했던 프랑스 여성들에게 가장 늦게 참정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이야말로 프랑스혁명이 낳은 최악의 역설이다.---p.51 ‘인권’이라는 단어가 시대적 화두로 등장하게 된 결정적 전환점은 프랑스혁명이었다. 영국이나 미국 같은 영어권에서는 18세기 후반까지도 ‘인권’이라는 다소 낯선 신조어보다는 ‘자연권’이라는 익숙한 단어를 여전히 선호했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작성자이며 프랑스혁명 당시 프랑스에서 미국 대사로 거주하던 제퍼슨은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자연권’이라는 낡은 단어를 버리고 ‘인권’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선택했다.---p.54 1789년에서 1799년 사이에 숨 가쁘게 달렸던 혁명의 수레바퀴는 당시 상황과 이데올로기적 신념이 투영된 세 종류의 인권선언문을 잉태했다. 봉건적 사슬에서 해방되었음을 공표했던 인권선언 I이 자유주의적 공민권과 사유재산권을 우선적으로 승인했다면, 진보적·급진적 공화주의자들이 수정했던 인권선언 II는 생존권을 존중하고 공권력의 오남용을 경계했다. 그리고 반동정부가 혁명의 질주를 멈추기 위해 작성한 인권선언 Ⅲ은 시민들이 향유할 권리보다는 부담해야 할 의무를 앞장세우며 공직(자)과 국가에 대한 가부장적 충성을 다짐받았다.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발표된 각기 다른 버전의 인권선언문의 각 조항에 혁명이 고비마다 견뎌야만 했던 갈등, 배반, 타협 등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p.67 프랑스혁명 기간에 발표·개정된 인권선언문들이 내부적으로는 여성과 저소득계층을 소외시켰다면, 외부적으로는 식민지의 유색 인종을 배반했다. 1789년의 인권선언, 1793년의 인권선언, 1795년의 인권선언이 공동으로 천명했던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라는 보편주의 원칙은 남성·백인·유산계층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었던 것이다.---p.69 노예제도의 철폐는 인권선언의 자연스럽고 보편주의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제국주의 충돌이 낳은 부산물이었다.---p.75 아이티혁명의 사례는 인권선언이 외부적으로 표방했던 보편주의와 상충되는 배타적 타자인식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프랑스혁명은 시민권으로서의 인권에 집중함으로써 휴머니즘을 국경선 내부에 봉인시키는 한계를 노출했다.---p.중략) 프랑스혁명은 한편으로는 프랑스 시민들을 봉건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 진보적 사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권을 근대 국민국가의 격자에 감금시킨 폐쇄적 성격을 갖는다.---p.77 장기적 관점에서 재검토해보면, 프랑스혁명은 세계인권 발전에 오히려 나쁜 기억과 유산을 남겼다. 시민적 인권과 공민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구축되는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의 강화는 세계인권이 국제운동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방해했기 때문이다.---p.79 무엇보다도 ‘정부의 합법성과 건강함을 측정하는 시금석+세상의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인권’이라는 프랑스혁명이 남긴 위대한 등식은 ‘글로컬’Glocal시대를 사는 우리가 곱씹어봐야 할 핵심적인 명제다.---p.83 인권은 불변하는 추상적이며 절대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시간과 공간의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협상되고 다시 만들어지는 일종의 불완전한 유토피아다. 만약 ‘인권’이라는 렌즈로 다시 검증해본 프랑스혁명과 아이티혁명이 반쪽짜리 사건이었다면, 그 나머지 반쪽의 혁명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실천해야 할 몫이며 숙제다. 어쩌면 혁명은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과거완료형 사건이 아니라 장기지속적이며 일상적으로 발생·진행·모색되는 미완의 프로젝트일지도 모른다.---p.84 바스티유에 과장된 정치적 의미 부여하기, 감옥 탈취의 스펙터클한 드라마 만들기, 절대왕정의 희생자 부풀리기?이런 복합적 메커니즘을 거쳐 상징체계로서의 바스티유 감옥 정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후 150여 년 동안 바스티유 감옥에 대한 ‘만들어진 기억’은 전제정치-폭력의 나쁜 상징과 자유-해방의 좋은 상징이 서로 겨루는 이데올로기적 흑백논리의 근대적 기원으로 작동했다.---p.191~193 제3공화정 출범과 함께 바스티유의 기억은 프랑스판 ‘문화전쟁’Kulturkampt으로 확산되었다. 공화주의자들은 루소 사망 100주년의 기념일을 의도적으로 7월 14일로 정함으로써 계몽주의와 프랑스혁명의 인과관계를 바스티유 감옥 탈취를 매개로 중매하려 고심했다. 왕당파 맥마옹Marshal Mac-Mahon을 물리치고 제3공화국 첫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레비Jules Grey는 1880년에 7월 14일을 국경일로 선언함으로써 바스티유에 대한 모순된 기억을 자랑스러운 ‘국가 기억’으로 마침내 공인했다. 그러나 바스티유의 정치문화사적 상징성을 독점하려는 공화주의자들을 견제해 사회주의자들도 끼어들었다. 이들은 ‘봉건적 바스티유’를 붕괴시킨 시민군의 투쟁 기억을 되살려 자본주의자들이 세운 철옹성인 ‘노동의 바스티유’를 쳐부수는 무기로 삼아야 한다고 선동했다. ‘바스티유 프로파간다’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회주의자들은 제2인터내셔널을 1889년 7월 14일에 맞춰 개최했고, 프랑스 좌파연합인 인민전선도 1936년 같은 날에 출범했다. 아울러 바스티유가 간직한 해방과 자유의 상징성은 제3세계까지 확장되어 반식민주의의 기표로도 환영받았다. 바스티유 감옥 탈취의 기억을 퓌레의 표현으로 패러디한다면, 전 세계적 차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많은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p.197~198 혁명 후반부를 지배했던 민중가요 탄압의 파장이 19세기 너머까지 지속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정부와 총재정부가 강화했던 민중문화 통제정책을 나폴레옹과 부르봉 복고왕정이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장기지속적인 관점에서 ‘혁명가요 부르기=정치적 박해’라는 악몽을 간직했던 ‘운동권 친화적’ 민중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내부세계로 도피했다. 광장이나 공원 같은 공공장소에서 어깨동무하고 정치적 색채를 띤 노래를 함께 부르는 대신, 음악 카페 같은 어두컴컴한 사적 영역에 칩거해 직업가수가 들려주는 음악을 들으면서 혁명적 분노를 삭이며 대리만족했다. 한때는 민중혁명가요의 맹렬한 공연자이며 연출자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공손하고도 사색적인 음악 소비자로 변신 혹은 변절한 것이다.---p.203 궁정귀족과 부르주아지가 합작해 이룩한 문명화 프로젝트에 민중저항문화가 순한 양처럼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독재와 언론탄압, 가부장적이며 중앙집권적인 나폴레옹의 제1제정 성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따져보면, 1789년이 정치경제적으로 부르주아 계층이 봉건세력을 물리쳤던 혁명이었는지는 논란의 대상이 될지라도, 프랑스혁명은 ‘성공한 부르주아 문화혁명’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할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남긴 역설적인 역사유산이다. ---p.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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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의 불임시대, ‘원조혁명’을 재발견하다
작년 말 국내에 개봉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넉 달 동안 약 6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이른바 ‘레미제라블 현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당시 언론은 개봉 시기가 우연히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겹쳤고, 선거 결과에 실망했던 사람들이 이 영화에 매료되었다고 이 현상을 해석했다. 그러나 저자 육영수 교수는 “정말 야당 후보를 지지했던 48퍼센트의 사람들은 ‘배반당한 혁명’에 분노하며 바리케이드에서 스러진 순결한 젊은이들을 자신들과 동일시하며 ‘민중의 노래’를 따라 불렀을까? 연말연시의 분위기 속에서 극장을 찾았던 많은 관객들은 혹시 ‘혁명과 진보’가 아니라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에 더 많은 감동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며 의구심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많은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바리케이드 전투가 아니라 장발장-팡틴느-미리엘 주교가 ‘하느님의 품 안에서’ 재회하는 피날레였을지도 모른다. 성탄절인 12월 25일에 개봉 이후 가장 높은 극장 점유율 77.7퍼센트를 기록하면서 35만 5,800여 명이 〈레미제라블〉을 관람했다는 통계자료가 이런 짐작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반짝 나타난 ‘레미제라블 신드롬’을 2012년 대선 결과에 대한 자기치유 과정이라고 ‘좌파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오히려 ‘레미제라블 대박현상’은 여당 후보가 당선될 수밖에 없었던 지금 이 땅에서의 이데올로기적 인구분포의 실체와 그 한계를 반영하는 대중문화 현상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라는 비판적 의견을 제시한다. ‘레미제라블 현상’은 자연스럽게 프랑스혁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15년 넘게 프랑스혁명을 연구해온 저자는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꾸어야”(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 하는 이 시대를 ‘혁명의 불임시대’로 진단한다. 1789년 ‘원조혁명’에서 20세기 마지막 혁명인 ‘68혁명’ 이후 우리는 혁명의 불임不姙시대에 살고 있다. 소비가 생산을 주도하고, 경제가 정치를 대리하며, 부자되기가 ‘분노하라’에 우선하는 소위 후기 산업정보사회 혹은 국가·법인 자본주의체제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잠재적 혁명계층으로 기대를 모았던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열되고, 중산층은 내 집 마련과 자녀교육에 허덕이고, 혁명의 아방가르드 역할을 자임했던 지식인들은 ‘닥치고 논문쓰기’에 고립되고, ‘지속가능한 딴따라짓하기’를 꿈꾸는 예술가들은 ‘밤샘 알바’로 급진적 상상력을 팔아먹으며, ‘아프니까’ 대학생들은 예비 실업이 순전히 “내 탓이요”라며 자기 가슴을 찢는다. 지난 반세기를 지배했던 “하면 된다!”는 함성에 깜짝 놀라 “안 돼!” 정신에 탯줄을 감고 있는 혁명이 날마다 낙태하는 풍경이다. (233쪽) 이제 혁명 혹은 혁명정신은 구시대의 산물일 뿐인가. 저자에 따르면 ‘박제화된 혁명’은 가도 저항의 기억은 되살아난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를 선언한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수많은 저항의 백가쟁명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 발발 200년 후에야 마침내 ‘혁명의 교리문답’의 따분한 책을 덮고, 지역적이면서도 세계적이며 사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저항의 춘추전국시대가 개막되었다. 새로운 제국의 네트워크 권력의 안팎이 없듯이, ‘전 지구적 시민권’과 ‘사회적 임금’을 쟁취하기 위한 우리의 저항은 국경의 경계를 모른다. 아이티 흑인 노예들이 따라 불렀던 혁명가요 ‘라 마르세예즈’는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과 튀니지의 재스민혁명으로 메아리친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을 소재로 한 흘러간 영화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민중의 노래로, 군사독재 시절을 고발하는 극영화 〈26년〉과 〈남영동〉으로 변주된다. 언뜻 지지부진해 보여도 혁명의 유전자는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며 계속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 아버지 세대가 숨 가쁘게 달음박질쳤던 4·19혁명과 그 아들딸들이 계승했던 1987년 6월 항쟁의 기억은 정녕 5·16 군사독재 망령의 부활과 신자유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졌는가?” 하는 물음을 곱씹어보기 위해 ‘원조혁명’으로 손꼽히는 프랑스대혁명의 성격과 역사적 유산을 세계사적 차원에서 재발견해야 할 중요한 순간에 직면했다고 말한다. 어리석게 혁명의 추억에 더는 매달리지 않기 위해 원조혁명의 앞뒤와 안팎을 재점검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프랑스혁명의 성격에 대한 반대해석과 역사인물 평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편 가르기에 정비례해, 과거를 읽는 우리 시각은 더욱 예민하고 비판적으로 성숙한다. 그리고 혁명에 대한 사학사적 시시비비는 우리에게 과거는 숭배하거나 미워해야 할 무덤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만들어지는 그 무엇’이라는 교훈을 가르친다.” 그리하여 “프랑스혁명에 대한 추억의 껍데기는 가고 저항의 알맹이는 오롯이 나의 것”이 된다. 공장 바깥에 있는 노동자, 학교 바깥에 있는 학생, 감옥 바깥에서 생산되는 품행방정 남녀들, 국가 바깥에 있는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 이들 모두에게 혁명은 실패나 성공으로 마감되는 권력다툼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할 열정 그 자체다. 혁명은 가고 다시 오지 않을지라도, 거리에서 우리가 함께 부르던 노래와 연대감은 남는다. 안 되는 혁명에 쫓겨 다른 방에 갇혀도 또다시 녹슨 펜에 침을 묻혀 자유와 평등의 이름을 벽에 아로새겨야 한다. (236~237쪽) 이것이 바로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 혁명이란 장기지속적이며 일상적으로 발생·진행·모색되는 미완의 프로젝트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록으로 프랑스 혁명기행문이 날짜순으로 담겨 있다. 1부 ‘우리가 알고 있던 프랑스혁명은 없다’에서는 서양·백인·남성적 편견으로 서술된 기존 해석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글을 모았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주류 해석이 가부장적 사고방식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페미니스트 입장으로 재성찰하고, 인권선언문과 아이티혁명 사례에 초점을 맞춰 프랑스혁명이 노출시킨 서구 중심주의적 한계를 지적한다. 단적인 예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거두라 할 수 있는 로버트 단턴조차 유감스럽게도 ‘여성문제’라는 거울에 비쳐 프랑스혁명의 혁명성을 신중하게 재고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2부 ‘영상으로 서술한 프랑스혁명’에서는 세 편의 극영화 〈메리쿠르〉, 〈슈앙〉, 〈나폴레옹〉을 소재로 삼아 문자기록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혁명의 다른 얼굴을 묘사한다. 저자에 따르면 “영상역사학이 가진 여러 장점들 중 하나는 그것이 역사를 종합적 과정으로 재현한다는 점이다. 문자로 쓴 역사가 주제, 지역, 시대 등의 카테고리에 따라 서술대상을 분리해서 취급하는 것과는 달리, 영상으로 쓴 역사는 한 개인이나 집단의 자취를 정치, 경제, 계급, 젠더 같은 다양한 차원을 하나로 융해해서 통합적 이미지를 제공한다.”(106쪽) 이와 같은 문제의식으로 프랑스혁명은 영상언어로 쓴 스크린 위에서 어떤 모습과 빛깔로 다르게 재현되는지, 또 여성 영웅과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극영화에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올바름의 훈육이 숨어 있는지를 날카롭게 고찰한다. 3부 ‘프랑스혁명의 문화적 전환’에서는 프랑스혁명을 ‘문화적 사건’으로 재조명해보려는 글들을 담았다. “프랑스혁명 해석의 새로운 물결 중에서도 가장 파고가 높고 파장이 멀리 간 것은 혁명을 문화적 사건으로 접근하려는 시도였다. 바스티유 감옥의 탈취로 시작되어 1799년 나폴레옹 1세의 쿠데타로 막을 내린 프랑스혁명의 중요성은 봉건제도의 철폐와 공화정의 수립 혹은 봉건귀족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승리라는 체제 변화의 차원을 넘는 것이었다. 혁명은 앙시앵레짐이 물려주었던 거의 모든 문화적 전통과 관행을 파괴해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낯선 것들로 바꾸었기 때문이다.”(150~151쪽)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살펴본 프랑스혁명은 봉건귀족에 대한 부르주아지 계급의 승리라는 거대담론일 뿐만 아니라 혁명가요와 혁명축제가 꽃피었으며 민중문화와 엘리트문화가 충돌하고 교류했던 정치문화의 일상무대였음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한편 “우리는 언제부터 목을 조르는 넥타이를 매고 서구적 교양세례를 받기 위해 오페라 혹은 오케스트라의 공연장으로 달려갔는가? 엄숙하게 경청해야 할 연주 도중에 ‘중간박수’를 보내는 초보 팬의 반사적 흥겨움과 즉흥적 환호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음악적 무식함의 공개적 증표로 비난하는가? 불 꺼진 푹신한 지정관람석에 파묻혀 무대 위 화려한 공연을 수동적으로 구경하는 현대인은 과연 200여 년 전 파르테르 공간을 메웠던 입석 관객들보다 더 행복할까? 문명화 혹은 서양적 근대화가 질서와 청결, 공손함, 타인 눈치 보기, 충동적 폭력과 수치스러운 육체 숨기기 등으로 요약된다면, 프랑스혁명은 과연 환영할 만한 ‘문화적 혁명’이었는가? 우리는 정녕 승리했을까?”(230~231쪽)라는 저자의 묵직한 물음이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