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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통신사 행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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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본이 천 년 이상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나름으로 소화한 결과로, 이 시대의 양국 지식인들은 같은 교양과 인생관을 공유하게 되었고, 또한 그 능력도 비등해 공감이 쉽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다이텐이 조선통신사절과 면회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경계심이 불과 6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필담을 통해 그들의 문재와 인품에 대한 존경과 친근감으로 변모될 수 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의 은거처의 이름이자 시문집의 제목인 ‘소운서小雲棲’가 다름 아닌 성대중이 명명하였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이 점을 잘 나타내고 있다.---p.69
조선 측도 다이텐에게 그가 은거하는 장소에 가보고 싶다고 말하고는 있으나, 그들의 인식은 다이텐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것 같다. 남옥은 2년 후에 다이텐 등이 보내 온 시와 편지를 받고도 조정의 의견에 따라 답하지 않았으며, 성대중도 그들을 그리는 시를 지었지만 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사행이 끝난 후의 양자의 행동의 차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이텐은 이후 쓰시마 이테이안 윤번승으로서, 대 조선 외교의 일선에서 일하게 되고 나아가서 쓰시마 역지빙례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조선의 과거제도를 참고하여 막부의 학제 개편과 시험제 도입에 간접적으로 관여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에 비해 역대 통신사 중 최고의 지일파로 알려진 이때의 사절 중 그 누구도 이후 조선의 대일 정책에 참여한 사람은 없었다. 원중거의 『승사록』에는 인원 감축, 막부와의 직접 교섭 등 통신사의 개혁안이 보이며, 그것을 삼사에게 제안했다고도 하나 그의 제안이 이후 논의된 사실은 없는 것 같다. 결국 그들의 일본에 관한 지식은 이덕무, 박제가, 홍대용 등 일부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그치고 만다. ---p.7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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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일본 지식인, 조선을 엿보다
―『평우록』을 통해 본, 통신사 시절 한(조)일 교류의 객관적인 단면들 조선통신사 사행기록은 물론 임난 이후 늘어난 일본에 관한 많은 기록들을 살펴보면, 조선은 예전에 비해 일본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조엄의 『해사일기海·日記』, 남옥의 『일관기日觀記』, 성대중의 『일본록日本錄』, 원중거의 『승사록··錄』, 김인겸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등의 사행기록을 비롯해, 남옥이 일본의 문인들과 응수한 시 그리고 일본에서 지은 시를 기록한 『일관창수日觀唱酬』와 『일관시초日觀詩草』, 원중거가 일본에서의 견문을 토대로 정리한 『화국지和國志』등은 일본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조선에 전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의 조선 지식인, 특히 실학파 학자들 사이에 전해져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계미통신사절의 기록들은 이전에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위를 자랑했던 조선 지식인의 대일 인식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계미통신사를 다룬 또 하나의 기록인 『평우록』에 주목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간 조선사절과 일본의 문인과의 교류는 일반적으로는 시문의 응수와 그에 따른 학문적 문답이 주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평우록』에는 그 외의 실제적인 기사가 많다. 예를 들면, 다이텐과 그의 동반자인 코노조사이河野恕齋가 조선의 과거제도를 질문하자 성대중과 원중거는 이에 상세히 대답하고 있다. 이전의 통신사절들은 조선의 법제나 제도에 관한 질문에 국법을 이유로 적극 응하지 않았지만, 이때는 그렇지 않았다. 다이텐을 비롯한 일본 측의 높은 관심에 조선 측은 전과 달리 조선의 법제와 제도에 대해 일본 측에 적극적으로 알리려 한 것이다. 둘째, 다이텐이 조선사절들과 나눈 필담 중 『평우록』에 수록하지 않은 부분을 조선 측 기록이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원중거의 『승사록』은 다이텐과의 필담 기록을 많이 담고 있으므로, 양자를 비교 대조하면 교섭의 실정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다이텐이 통신사절과 면회한 3일 후인 4월 7일에 조선의 도훈도都訓導 최천종崔天宗이 통신사절의 접대를 담당하는 쓰시마對馬藩의 소통사小通詞 스즈키 덴죠鈴木傳藏에 의해 살해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난다. 최천종 살해 사건을 두고 양자가 주고받은 문답의 경우, 『평우록』은 대부분 생략하고 있으나, 『승사록』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중복되는 곳에서도 미묘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조선인 살인 사건을 두고 양국 사이에 조성됐던 팽팽한 외교적 긴장 관계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셋째, 다이텐은 그 후 1781년부터 2년간 쓰시마의 이테이안以酊庵 윤번승輪番僧으로서 조선과의 외교교섭을 담당했고, 이후에도 조선 빙사聘使의 연기延期 및 쓰시마 역지빙례易地聘禮에 관하여 몇 번이나 에도에서 막부의 재상宰相에 해당하는 로쥬老中 마츠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에게 자문을 받았다. 조선에 보낸 서계書契도 다이텐이 기초한 것이다. 지금껏 역지빙례에 관해서는 기근飢饉으로 인한 경제적 핍박이 주된 원인이라는 것이 통설이나, 일본 측의 대 조선인식의 변화 역시 원인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평우록』은 이 점을 이해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넷째, 그간 계미통신사에 참여한 조선 지식인의 사행기록과 그들이 일본 지식인과 주고받은 필담들은 진즉에 집중적인 관심을 끌었고, 그 연구 성과 역시 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반면 일본 지식인들이 남긴 기록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적게 받았었다. 그러나 이제 이 『평우록』 번역을 계기로 양국 통신사행 기록의 상호 비교를 통해 보다 객관적인 자타 인식과 상호 인식의 장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18세기를 전후한 동아시아는 일국적 시각을 넘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주체를 들여다보거나 주체를 타자화시켜 바라볼 때, 보다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해진다. 『평우록』은 ‘타자의 시선’으로 18세기 조선의 내부를 다양하게 본 자료라는 점에서 18세기 조선의 입체적인 조명에 부합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