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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에서 한양까지 2
권력투쟁으로 본 조선 탄생기
이승한
푸른역사 2020.11.30.
베스트
역사 top100 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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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4장 왕조 개창으로 가는 길
1. 왕조 개창의 시험대, 조준의 전제개혁
전제개혁의 역사적 배경|조민수를 찍어낸 전제개혁|이색을 수상으로, 개혁 시동|조준의 시무책|전제개혁은 사전 혁파, 수조권의 국유화|빗발치는 상소, 최영 죽다|주원장과 이성계 그리고 이색|전제개혁을 반대한 이색, 어정쩡한 정몽주|반대론자에 대한 비난과 탄압|전제개혁은 왕조 개창의 시험대|권문세가 출신의 조준|조준, 새로운 활로를 찾아서
2. 상소를 통한 권력투쟁
창왕의 입조 문제|주원장의 이상한 메시지|탄핵당한 이숭인과 권근|김저 사건|폐가입진, 왕위에 오르는 길목|이색, 탄핵 파면|우왕?창왕 부자, 죽임을 당하다|공양왕 길들이기|3차 전제개혁 상소|끈질긴 탄핵 상소|변안열의 죽음, 끝이 없는 탄핵 상소|쉽지 않은 공양왕|다시, 사전 혁파 문제
3. 공양왕의 버티기
공양왕의 반격|윤이?이초 사건|저항하는 대간 그리고 정몽주|한양 천도|공양왕의 버티기와 이성계|이성계 제거 모의, 김종연 사건|대마도 정벌과 김종연 사건|문하시중 이성계, 군통수권 장악|이성계의 사퇴 요청|책명을 받지 못한 공양왕|연복사 중창과 척불 논쟁|공양왕을 협박한 정도전|역사적 확신범, 정도전|다급해진 정도전

제5장 찬탈과 선양 사이에서
1. 반전, 배후의 정몽주
갈라선 정몽주와 정도전|공양왕과 이성계|이성계와 이방원 부자|세자 입조|정도전, 귀향당하다|가계를 문제 삼은 정도전 유배|뒤바뀐 정국|정몽주의 《신정률》|이성계의 낙마|정몽주의 반격
2. 폐위당한 공양왕
정몽주, 타살당하다|화난 이성계, 핀잔을 준 후첩 강씨|정몽주 죽음의 의미|다시 급반전|다시, 반대자 탄압|공양왕의 마지막 버티기, 우현보|이방원, 이성계 추대를 거론하다|마지막 인사 발령|고려왕조의 마지막 사신|공양왕의 맹서 요구|공양왕의 마지막 장면|왜, 양위가 아닌 폐위를 택했을까|만약 이성계가 죽었다면
3. 추대 받은 이성계, 고려의 마지막 왕
이성계의 첫 장면|즉위, 둘째 날|국정 운영의 중심 도당, 정도전|고려의 종친 왕 씨 문제|즉위 교서, 천명의 정당화|최초의 인사|공신 책정|정도전의 복수, 이성계의 관용|대민 선전관, 수령|공신들이 주도한 세자 책봉|대명외교, 왕위승인 문제|국호를 조선으로

보론-왕조 개창, 그 후
1. 대명 외교와 권력의 추이
문제의 발단, 여진 문제|이방원을 파견하다|표전 문제|권근의 활약, 곤경에 처한 정도전|정도전의 진법 훈련과 출병 주장|주원장, 조선 사신을 처단하다|또 다시 억류당한 사신|요동 공격을 주장한 정도전|이방원의 즉위와 14세기의 마감
2. 우여곡절을 겪은 한양 천도
최초의 천도론|계룡산으로 향하는 이성계|계룡산을 반대한 하윤, 무악으로|천도 후보지 논쟁|지지부진한 천도, 왜?|이성계가 주도해서 결정한 한양|왕도 공사, 이모저모|경복궁 완공|개경으로 환도하다|다시 지난한 한양 천도|다시, 한양과 무악|동전을 던져 결정한 한양 천도|개경에서 한양까지

책을 마치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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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

광주에서 나고 자라 지금도 고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전남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역사를 연구하는 데 ‘민족’이나 ‘민족주의’ 시각을 갖는 것은 역사를 수단화·도구화하여 배타적이고 공격적이 기제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삼별초 연구로 시작해서 고려시대 무인정권과 원 간섭기에 색다른 호기심과 문제의식을 갖게 된 데는 ‘민족’이란 연구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20년 넘는 연구 결실을 맺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면서 이 책이 독자들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우리 역사를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주요 저서로
광주에서 나고 자라 지금도 고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전남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역사를 연구하는 데 ‘민족’이나 ‘민족주의’ 시각을 갖는 것은 역사를 수단화·도구화하여 배타적이고 공격적이 기제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삼별초 연구로 시작해서 고려시대 무인정권과 원 간섭기에 색다른 호기심과 문제의식을 갖게 된 데는 ‘민족’이란 연구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20년 넘는 연구 결실을 맺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면서 이 책이 독자들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우리 역사를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주요 저서로는 고려시대 무인정권을 다룬 『고려 무인 이야기』(전4권)와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몽골 제국과 고려 1), 『혼혈 왕 충선왕,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몽골 제국과 고려 2), 『고려 왕조의 위기, 혹은 세계화 시대』(몽골 제국과 고려 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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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60쪽 | 526g | 152*224*30mm
ISBN13
9791156121794

책 속으로

1388년(우왕 14, 창왕 즉위) 7월, 위화도 회군이 성공한 직후 조준이 상서를 올려 전제개혁을 주장하였다. 회군이 성공하자마자 전제개혁을 들고나왔다는 것은 이성계 등과 미리 준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제개혁은 조준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면서 조선왕조 개창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 p.17

조준의 전제개혁 상소는 개혁 자체보다는 우선 조민수와 같은 기득권 세력을 공격할 구실을 만들었고 그런 쪽으로 먼저 힘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조민수를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에 드러내놓고 반대한 자가 없었던 것을 보면 탄핵의 명분은 확실했던 것 같다. 조민수는 그렇게 탄핵을 받아 고향 창녕으로 귀양을 가야 했고 그의 측근 몇몇도 각각 유배에 처해졌다
--- p.24

조준이 토지 분급 대상으로 사대부를 언급한 것은 이들을 중요한 우선 분급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는 조준의 전제개혁이 자신과 같은 사대부들의 경제기반을 우선 마련하겠다는 점을 목표로 설정했다는 뜻이다. 이를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권세가나 기득권자의 탈점한 토지를 몰수하여 사대부의 경제기반으로 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p.53

제비뽑기로 정창군을 선택한 것도 우습고, 그 선택권을 이성계에게 위탁한 것도 심상치 않다. 새 국왕을 그런 식으로 가볍게 선택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정창군을 선택한 것도 이성계 측에서는 임시방편적인 국왕으로 치부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고, 다시 창왕을 폐위시키고 또 한 번 그런 뜻을 품었지만 역시 이루지 못하고 정창군을 세웠던 것이다
--- p.78

공양왕은 여러 반대를 누르고 1390년(공양왕 2) 9월 17일 한양 천도를 실행한다. 여기서 천도라는 것은 국왕이 한양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의미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자면 천도가 아니라 한양에 이궁離宮을 조성한 것이고 여기에 공양왕이 이어한 것이다. …… 그런데 공양왕이 한양으로 이어하기 직전에 공전과 사전의 전적田籍을 저잣거리에서 불사르는 행사를 펼친다. …… 지난 시절의 토지 지배관계를 모두 인정하지 않겠다는 공개적인 퍼포먼스 같은 것이었다. 왕조를 지탱했던 구체제의 한 구석이 무너졌다는 신호였다
--- p.119

이성계 측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며 가장 예민하게 경계했던 자들은 공양왕도 아니고 사대부도 아닌 바로 군사적 공로를 세운 무장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백성들의 신망을 받으며 실질적인 무력까지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지 장군을 그런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는데
--- p.126쪽),

한번 눈 밖에 벗어난 인물은 끈질기게 추궁하여 끝을 보는 것이 이성계 일파의 권력투쟁 방식이었다. 심덕부가 탄핵 파면당한 직후인 1390년(공양왕 2) 11월 말, 마침내 이성계가 문하시중에 임명된다. 어쩌면 이성계 제거 모의에 심덕부가 연루되었다고 폭로된 사건은 심덕부를 수상에서 밀어내고 이성계 자신이 수상을 차지하려는 음모였는지도 모른다
--- p.129

우왕이나 창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찬탈이기 때문에 이를 도모한 자는 극형이 마땅하지만,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찬탈이 아니라고 확신한 것이다. 찬탈이 아니려면 이성계는 선양禪讓이나 양위를 받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게 찬탈인지 선양인지는 정도전 자신이 판단할 문제도 아니고 그가 판단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도 정도전은 선양만을 머릿속에 두고 모든 일을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으니 그는 역사적 확신범이라 할 수 있다. 새 왕조 개창을 위해서는 정도전과 같은 역사적 확신범 하나쯤 필요했으리라
--- p.149

정몽주를 포섭하지 못하고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성계와 그 세력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는 조선왕조 개창의 한계이면서 선양을 더 이상 추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 그는 고려왕조를 상징하는 마지막 신하였다. 그런 정몽주의 타살은 폭력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만 것이었다
--- p.202

무장이 아닌 자로 죽임을 당한 자는 정몽주가 유일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성계 측에서 진짜 적대 세력으로 간주한 자들은 군사력을 지닌 무장 세력이었다는 뜻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이인임 정권 이래 지금까지 무장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p.207

이방원은 이성계 추대에 적극적인 남은과 먼저 계책을 정하고 이를 조준?정도전?조인옥?조박 등 52인과 추대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하였다. …… 고려 시대 관직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관원의 총수는 문반과 무반, 이속직이나 품외관, 중앙과 지방의 관리를 모두 합해 5,300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정원을 모두 채웠을 경우인데, 이성계의 추대에 적극 참여한 자는 전체 관리의 1퍼센트 정도였다고 보인다. 지방을 제외하고 중앙에 재직하는 문무품관만은 2,200여 명으로 이것만 대상으로 하면 2퍼센트 남짓이다
--- p.213

이성계 측에서 양위가 아닌 폐위를 택한 것은 이성계가 공양왕으로부터 후계 국왕으로 지명되는 것을 회피한 때문이었다. 그런 양위를 통한 지명이야말로 후대의 비난을 면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공양왕으로부터 후계 국왕으로 지명받는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자의가 아닌 힘에 의한 강요된 양위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p.223

1392년(태조 1) 7월 13일, 공양왕이 폐위된 다음 날 왕대비가 교지를 내려 이성계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임시 국정 담당자를 뜻한다. …… 이성계는 그렇게 1392년(태조 1) 7월 17일 왕위에 올랐다. 우왕과 창왕, 두 왕을 왕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폐위하고, 공양왕은 진짜 왕씨라고 자신들이 추대했음에도 다시 폐위하고, 이씨가 고려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때 58세였다. 이어서 이성계는 고려왕조의 중앙과 지방의 문무관리들에게 예전대로 변함없이 정무를 보게 하고, 이날 자신의 사저로 돌아왔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즉위한 당일 맨 먼저 내린 조치가 이것이다. 문무관리들의 관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고려의 국정을 지속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성계는 고려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 p.234

8월 13일 이성계는 도당에 명령을 내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한다. 바로 이틀 후에는 관리를 한양에 파견하여 궁실을 수습하게 하였다. 한양은 고려 말부터 줄곧 천도 후보지로 올랐었고 우왕이나 공양왕은 한양으로 이어하여 수개월 이상 거처한 적도 있어 대강의 궁실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이를 보수하여 천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양 천도는 공신들이 반대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천도 문제는 상당히 복잡하게 오랫동안 전개되는데, 1395년(태조 4) 10월에야 한양에 여러 궁궐을 조영하고 이름을 붙이면서 일단 마무리했다
--- p.258

1393년(태조 2) 2월 15일, 한상질이 환국한 바로 그날 이성계는 당장 교서를 반포하여 국호를 ‘朝鮮’으로 결정하였다. 교서에서, 지금부터 ‘高麗’란 나라 이름은 없애고 ‘朝鮮’의 국호를 쓰겠다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朝鮮’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는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지 7개월이 지난 뒤였다. 비로소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바뀌는 새 왕조가 열린 것이다
--- p.267

왕조 개창 후 천도 문제가 처음으로 거론된 것은 1392년(태조 1) 8월 13일로 이성계가 즉위한 지 한 달쯤 지난 시기였다. 이때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도당에 지시하는데 좀 서두른 감이 없지 않았다. 여기서 두 가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천도에 가장 적극적으로 먼저 나선 사람이 바로 이성계 자신이라는 것, 또 하나는 천도할 곳으로 논의 없이 한양을 꼭 집어 지정했다는 사실이다
--- p.301

1394년(태조 3) 2월 18일, 이성계는 권중화?조준 등 10여 명의 재상들과 서운관의 관리들에게 《비록촬요》를 가지고 가서 무악 남쪽의 지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며칠 후 이들은 무악의 남쪽은 너무 좁아 천도의 땅이 될 수 없다고 이성계에게 보고하였다. 하지만 하윤은 개경이나 평양의 궁궐 터에 비해 좁지 않고 중국과 통행하는 데 지리적 이점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이를 반박하였다
--- p.308

고려왕조의 문무관료는 이성계가 즉위한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는데 이들은 천도를 결코 반기지 않았다. 천도가 실행되면 이들은 당장 누대에 걸쳐 이룩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하니 반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천도 반대 기류는 이성계의 즉위를 반대하는 집단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찬성하는 쪽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로 지배층의 이반을 불러올 가능성이 농후했다고 할 수 있다
--- p.316

이 해 9월 9일, 신도궁궐조성도감의 장관에 임명된 네 사람 외에 정도전?권중화?남은 등이 다시 참여한다. 이성계는 이들을 바로 한양으로 파견하여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이때 권중화가 산맥과 지세의 방향을 살펴서 우선 종묘의 터를 정하고 이에 따른 도면을 그려 바쳤다. …… 재미있는 사실은 이후부터 한양 천도 사업을 정도전이 주도한다는 사실이다. 피할 수 없는 사업이라면 개국공신이 아닌 다른 사람보다 정도전 자신이 나서서 주도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 그러니까 정도전은 이성계에 의해 한양으로 천도지가 확정된 이후에야 천도 사업에 나섰던 것이다
--- p.319

1395년(태조 4) 9월 29일 종묘와 궁궐이 일단 먼저 준공되었다. 실록에는 건물의 규모나 구조, 각 실의 배치 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착공한 지 10개월 만으로 엄청나게 서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323

다시 천도 문제가 거론된 것은 이방원이 즉위한 직후였다. 1400년(태종 즉위년) 12월 이방원은 조준?성석린 등에게 일러 다시 천도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바로 이날 수창궁에서 큰 화재가 일어나 전소된 것이 계기였다. 중요한 점은 이때 천도 논의를 다시 원점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자는 논의가 아니었다
--- p.328

마침내 이성계가 직접 나서서 이방원에게 전했다. “개경은 왕씨의 구도이니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고 선조의 뜻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천도에 반대가 있고 번거로운 일도 많지만 개경에 그대로 머무를 수 없다는 강경한 뜻이었다. 1404년(태종 4) 9월, 이방원은 더 이상의 논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한양의 부족한 궁실을 수습하게 하였다
--- p.332

1405년(태종 5) 10월 8일 국왕 이방원은 개경을 떠나 사흘 후 한양에 당도한다. 돌고 돌아 다시 한양이었다. 새 왕조가 개창된 지 10년도 훨씬 지난 때로 우여곡절을 심하게 겪은 지난한 천도였다. 이후에는 더이상 천도 논의는 일어나지 않는다. 한양 천도는 새로운 국호의 제정과 함께 외형적으로 새 왕조 개창의 완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 p.337

출판사 리뷰

친명사대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권력투쟁의 핵

이미 ‘고려 무인이야기’,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로 고려시대에 대한 역사적 내공과 유려한 필력을 입증한 바 있는 지은이는 이 책에서도 그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고려 말의 정치를 다루면서도 시야를 넓혀 위화도 회군을 부른 요동정벌의 정치적 산술 등 북원 및 명과의 외교사까지 아우르면서 이를 국내 권력투쟁의 큰 줄기로 제시하는 해석 틀은 신선하다.

“친명사대의 외교노선을 처음 확정한 공민왕은 이성계나 그 공신들에게 그 대세의 길을 열어주고 권력투쟁의 장을 마련해준 것이다. …… 공민왕 사후 등장한 이인임 정권은 …… 주로 무인들을 권력기반으로 하면서 친명사대관계를 부정하거나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이는 신진사대부의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해 친명사대를 주장하던 신진사대부가 정치적으로 결집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인임 정권과 인연이 없었고 변방 출신으로서 소외되었던 이성계가 신진사대부와 제휴했던 것은 그래서 가능했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의 결합은 이성계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첫 번째 기반으로서 이인임 정권의 덕을 크게 본 것이다.”(345쪽)

위화도 회군이란 극적 장면을 담담하게 넘어가는 등, 소설적 상상력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에 충실한 점도 이 책의 미덕이다.

최영이 이성계 즉위의 가장 큰 기여자라고?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란 일화로 유명한 최영 장군은 과연 청렴하기만 한, 고려의 충신이었는가? 지은이는 이에 이의를 제기한다. 최영은 권신 이인임과 권력을 양분했으며 요동정벌은 전시동원체제를 통해 확실히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무리였다고 본다. “요동정벌은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고 국내 상황과도 어긋난 일이었다. 따라서 위화도 회군은 잘못된 요동정벌을 바로잡는 명분으로 피할 수 없었고 이성계는 이를 통해 정권 장악에 성공했던 것이다.”(298쪽) 즉 이인임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성계를 끌어들인 우왕도 보탬을 주었지만 역설적으로 최영이야말로 이성계의 즉위에 가장 큰 기여자였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밖에 당대 최대의 사회문제였던 토지문제의 폐단을 외면하던 기득권 세력과 달리 전제개혁을 통해 변방 출신의 이성계 측과 신진사대부 세력이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과정, 이성계 세력의 핵심 참모로 전제개혁을 주도한 조준의 활약, 위화도 회군 이후 4년이 지나서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이유 등이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한양 천도가 동전 던지기로 결정되었다니

역사를 읽는 이유는 교훈만이 아니다. 미처 몰랐던 사실을 읽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다. 한양 천도가 동전으로 결정된 사실은 어떤지.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개경으로 오락가락 하던 천도 논쟁에 지친 태종은 1404년(태종 4) 10월 6일, “종묘에 들어가 송도(개경)와 신도(한양)와 무악 세 곳을 알리고 그 길흉을 점쳐 길한 곳을 따라서 도읍을 정하겠다”고 선포한다. 이에 따라 동전을 던지는 척전擲錢과 제비뽑기 같은 시초蓍草가 거론되다가 종묘에서 동전을 던져 점을 쳤다. 그 결과 한양이 2길 1흉, 개경과 무악은 1길 2흉으로 나와 한양 천도가 결정되었다고 한다(336쪽). 권신 이인임에 휘둘리던 우왕이 친정체제를 구축하려 나섰으나 20살도 못 된 의비의 동생 노귀산을 국왕 대변인 격인 우부대언으로 발탁하거나 자신의 기행과 일탈행위를 부추긴 환관이나 장사꾼, 물고기 잡고 사냥하는 자들까지 벼슬을 얻었다니 개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어떤가(267쪽). 퇴위 후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 이성계와 ‘동맹’을 추진했던 공양왕의 서글픈 운명 등 흥미로운 역사 뒷이야기가 책 곳곳에 담겨 읽는 재미를 북돋운다.

고려사를 천착해온 지은이는 자신의 집필 작업을 마무리한다는 의미에서 여말선초의 정치사를 썼다고 했다. 한데 술술 읽히는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보는 신선한 시각을 제공하는 이 ‘대하드라마’를 읽고 나면 부디 조선사도 다뤄줬으면 하는 소망이 절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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