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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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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자유·보수의 소리 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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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 6
서문
지금, 한일 관계에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 · 9

1장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 · 15
징용이 아니라 모집·알선된 노동자
대형 매스컴의 오용이 계속되다
미쓰비시중공업 2건을 동시 판결한 의도
‘일본 통치불법론’이라는 기괴한 관념
판결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 공산당

2장 부당판결을 비판한다 · 31
모집이라는 사실을 다루지 않는 모순
원고 2명은 채용 심사에서 합격
응모하여 일본에 온 2명
무보수·폭력은 사실인가?
보상은 이미 끝났다
‘위반’이 된 일본의 사법 판단
압류는 도둑질과도 같다
손해배상청구권을 둘러싸고
고용도, 장기 계약도 ‘반인도적?’
역사적 경위와 국제법을 뒤집어엎다
체결 후에 다시 문제가 된 위자료
강화조약을 날림으로 곡해?
국제법을 무시하는 요구
한국 정부의 보상은 도의적이고 인도적인가?
일본 기업 패소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개인의 청구권은 남아 있는가?
위자료 청구는 무한히 계속 된다

3장 옛사람이 만든 한일 국교의 틀을 지켜라 · 65
불일치를 서로 인정하는 지혜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합법이지만 유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틀
5억 달러가 낳은 ‘한강의 기적’

4장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는 일본인들 · 81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의 정치 공작
한일 관계를 악화시킨 일본인 540명
역사인식은 일치하지 않는 것이 당연
한국병합 100주년의 ‘청산’
전시노동자 재판을 지원한 것도 일본인

5장 일본 기업을 지켜라 · 105
압류 집행 절차로
진실로 노리는 것은 재단 설립?
청구권 협정에 기초한 중재위원회의 설치를
한국 정부가 인정한 ‘일본 전범기업 리스트’
오해로 유도하는 역사관

6장 한국 정부에 의한 개인 보상의 실태 · 133
청구권 협정에서 모두 정리
한국 정부가 진행한 개인 보상
‘민관’ 공동위원회

7장 전시노동의 실태 1 - 통계로 본 사실 · 147
‘강제연행’이 아니라 ‘전시동원’
‘전시동원’ 개시 이전의 재일 조선인은 80만 명
8할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돈벌이로
식민지 시대, 인구가 급증한 조선
다수의 ‘부정도항자’를 조선으로 강제 송환
‘동원’은 도항자 전체의 1할에 지나지 않는다
동원을 가장하여 ‘부정도항’하는 자도
‘관알선’, ‘징용’ 시기에도 6할이 자유도항
4할이 동원처로부터 도망
동원 계획은 실패

8장 전시노동의 실태2 - 전시노동자 수기로 본 실태 · 177
2개의 조선인 징용노동자의 수기
히로시마시의 도요공업에 징용된 정 씨의 수기
징용자를 맞이하는 것에 신경을 쓴 회사
젊은 여공들에 둘러싸인 즐거운 공장 생활
전쟁미망인과의 밀회
도망하여 도쿄에서 조선인 감독의 함바로
고임금, 가벼운 노동의 함바 생활
실태를 모르고 일본을 비판하는 한국의 젊은이들
일본 정부도 실태를 알고 있었다

9장 ‘재일은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의 자손’이라는 환상 · 205
재일 한국인·조선인은 강제연행 자손이 아니다
국익을 침해하는 발언
134만여 명이 귀국
차가워진 귀국열
종전 직후 어느 징용공의 체험
귀국까지의 나날들
재일 한국인·조선인의 대부분은 전시동원 전에 일본에 온 사람의 자손
귀국 사업에 대한 정부의 역사인식

감사의 말 · 227
역자 후기 · 231

부록
자료1 신일철주금 조선인 전시노동자 재판 한국 대법원 판결의 주요 부분 · 234
자료2 2010년 일한(日韓) 지식인 공동성명 일본 측 서명자 540명 · 246
찾아보기 · 269

저자 소개2

니시오카 쓰토무

관심작가 알림신청
 

西岡力

1977년 한국에 유학한 이후, 그는 40년 넘게 한국·북조선 연구에 매진해 왔다. 한국인을 만나면 “나는 친한파親韓派가 아니라 애한파愛韓派입니다”라고 자신을 스스럼없이 소개할 만큼 한국인들에 대한 그의 생각은 명료하다. 1956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국제기독교대학교와 쓰쿠바대학에서 한국·북조선 지역 연구를 공부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일본 외무성 전문조사원으로 주한 일본 대사관에 근무했으며, 1990년부터 2000년까지 「겐다이 코리아現代コリア」 편집장을, 1991년부터 2017년까지 도쿄기독교대학 조교수와 교수를 역임했다. 1997년 납치가족회를 지원
1977년 한국에 유학한 이후, 그는 40년 넘게 한국·북조선 연구에 매진해 왔다. 한국인을 만나면 “나는 친한파親韓派가 아니라 애한파愛韓派입니다”라고 자신을 스스럼없이 소개할 만큼 한국인들에 대한 그의 생각은 명료하다.
1956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국제기독교대학교와 쓰쿠바대학에서 한국·북조선 지역 연구를 공부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일본 외무성 전문조사원으로 주한 일본 대사관에 근무했으며, 1990년부터 2000년까지 「겐다이 코리아現代コリア」 편집장을, 1991년부터 2017년까지 도쿄기독교대학 조교수와 교수를 역임했다. 1997년 납치가족회를 지원하는 ‘구출회(북조선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 설립에 참여하고 현재 ‘구출회’ 회장, ‘역사인식문제연구회’ 회장, ‘국가기본문제연구소’의 연구원과 기획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제30회 ‘세이론正論 대상’을 수상했다. 현 모라로지연구소 교수, 역사연구 실장, 레이타쿠대학 객원 교수, ‘구출회’ 회장을 맡아 자신의 생명까지도 담보하면서 실현해야 할 가치인 ‘선善’의 신념을 실천하고 있다.
신작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는 직면한 역사를 대등하게 바라보지 않고, 선동에 의해 한일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일본 좌익과 반일을 선동하는 불온한 이들에게 던지는 ‘양심’의 소리이다.

저서로『일한 오해의 심연日韓誤解の深淵』(아키서방, 1992),『어둠에 도전한다! 납치·기아·위안부·반일을 어떻게 파악할까闇に挑む! 拉致·飢餓·慰安婦·反日をどう把握するか』(도쿠마문고, 1998),『테러 국가 북한에 속지 말아라テロ?家北朝鮮に騙されるな』(PHP연구소, 2002),『납치 가족과의 6년 전쟁: 적은 일본에도 있었다!』(후소샤, 2002),『일한 ‘역사문제’의 진실』(PHP연구소, 2005),『알기 쉬운 위안부 문제よくわかる慰安婦問題』(소시샤, 2007),『아사히신문 ‘일본인에게 지은 대죄’朝日新聞「日本人への大罪」』(고쿠출판, 2014),『요코타 메구미와 납치 피해자들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것은 지금 뿐?田めぐみさんたちを取り?すのは今しかない』(PHP연구소, 2015) 등 2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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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에서 ‘조선시대-식민지기 산림소유제도와 임상의 변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한국경제사 전공)를 받았다.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 방문연구원, 규슈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교환교수를 지냈고 현재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의 산림소유제도와 정책의 역사 1600~1987』(2010년), 『반일 종족주의』(2019년, 공저) 등이, 옮긴 책으로는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2020년),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性)』(2022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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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2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272쪽 | 149*209*20mm
ISBN13
9791195915859

책 속으로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이 전시노동자 문제에 대해서 중대한 부당판결을 내렸다. 전 조선인 노동자 4명이 신일철주금을 제소한 재판의 파기환송 상고심에서 한국 대법원은 같은 회사에 배상을 명령한 2심 재판을 지지하고, 4억 원의 손해배상금 지불을 명령한 것이다. 이는 명백히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 협정에 반하는 판결이다. 신일철주금에 대해 최초의 판결이 나온 날,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국제법에 비추어 있을 수 없는 판결이다”라고 판결을 강하게 비판하고, 일본 정부는 의연하게 대응해 나간다는 방침을 표명했다.
--- p.17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교섭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은 연합국에 대해 한국을 전승국으로 인정하여 평화조약에 참가하기를 요구했다. 상하이(上海)나 충칭(重慶) 등에서 활동했던 임시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것 등이 그 근거였다. 연합국은 그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을 점령한 미국은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고, 김구 정부주석을 비롯한 요인들이 정부의 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므로 한국은 전승국이 받을 수 있는 배상을 청구할 수 없었다.
--- p.74

왜 한일 관계가 이토록 이상하게 되었는가? 그 배경에는 일본 내의 친북·반한·반일세력이 의도적으로 한일 관계의 법적 기초를 무너뜨리고, 북조선의 독재정권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고 40년 가까이 활동해 온 사실이 있다.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려고 하는 저들의 정치 공작이 그대로 계속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 p.83

한일회담의 주요 의제의 하나는 ‘피징용자 미수금’, ‘전쟁에 의한 피징용자의 피해에 대한 보상’, ‘한국인의 일본인 또는 법인에 대한 청구’였다. 즉, 노동동원자에 대한 보상은 주요 의제로 되어 있었다. 일본 측은 이들에 대해 근거가 있는 것은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청구권을 가진 개인에게 일본이 직접 지불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한국 측이 이들을 포함한 전체의 청구권에 관한 자금은 한국 정부에 일괄하여 지불해 주기 바란다고 요구했으므로 최종적으로 무상 3억 달러가 한국 정부에 지불되었던 것이다.
--- p.129

현 문재인 대통령도 위원으로 참가했던 한국 정부의 위원회도 징용공에 대한 보상은 청구권 협정으로 마쳤다고 인정했던 점을 내외에 널리 홍보해야 한다. 한국의 실증주의에 선 경제사학자도 이번 대법원 판결에 따라 조선인 전시노동자는 1회의 노동 대가로 당시 일본 기업으로부터 급여를 받고, 박정희 정권 시대에 보상을 받고, 노무현 정권 시대에 재차 보상을 받고, 이번 판결에 의해 네 번째 대가를 받게 되는 대법원 판결을 비판했다.
--- p.145

종전 시의 재일 조선인 인구 200만 명 내 8할은 자신의 의사로 일본에 건너온 돈벌이 이주자라는 것이다. ‘강제연행’이란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데려왔다는 것인데, 종전 시의 재일 조선인 인구의 8할은 전시동원과 관계없이 스스로 일본으로 진출, 도항해 온 자들과 그들의 자식들이었다. 또 동원에 의해 도항한 후 동원현장을 떠나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일본에서 계속 생활하고 있었던 자들도 있었다.
--- p.153~154

징용공의 수기 검토에 의해 다음과 같은 점이 명백하게 되었다. 징용의 시기, 조선인을 받아들인 공장에서는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가능한 한 좋은 의식주 환경을 준비했다. 일본인은 전쟁을 자신들의 일로 의식하고 있었지만 조선인에게는 그러한 당사자 의식이 희박했다. 평화로운 농촌에서 싫다는 청년을 억지로 데리고 와서 노예처럼 혹사시켰다고 하는 ‘강제연행’의 이미지는 사실이 아니다.

첫째, 조선인 노동자는 내지에서 일하고 싶었다. 억지로 연행한 것이 아니다.
둘째,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일본 정부의 전쟁 수행을 위한 통제에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취로했다.
사실에 반하는 ‘강제연행’, ‘노예노동’ 선전은 1970년대 이후 일본에서 먼저 만들어졌고, 그것이 한국으로 확산되었다. 선입관을 배제한 실증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
--- p.202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논의는 해롭다. 어떠한 이득도 없다. 이것이 9장의, 그리고 이 책 전체의 결론이다.

--- p.226

출판사 리뷰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는 왜 단 한 명의 징용공 원고도 포함되지 않았는가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라는 역사적 판결로서 일본 신일철주금(新日鐵住金)을 제소한 한국의 원고 네 사람에게 해당 피고 회사의 배상을 명령했다. ‘징용 판결’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원고들은 일제시대 당시 징용공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원고들 중에서 실제 징용공이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책은 이처럼 일제시대 징용공 문제와 관련해 우리들이 원천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실관계부터 바로 잡으며 시작한다.

원 저자인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모라로지연구소 및 레이타쿠대학 교수는 1977년부터 한일 양국을 넘나들며 각종 교류활동을 해왔고 이제는 어지간한 한국인보다도 한국어를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친한파(親韓派)’를 넘어 ‘애한파(愛韓派)’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한일 양국은 위안부 문제를 넘어서 징용공 문제로 극한 대치로 치닫고 있다. 양국의 국민감정도 이제 더 나빠질 수가 없을 정도다.

이에 그는 일단 자신의 ‘제 2의 고향 사람들’에게 징용 문제와 관련 자신의 ‘제 1의 고향 사람들’의 입장부터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전하는 작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오직 진실만이 두 고향 사람들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게 선(善)을 믿는 그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온 작품 중 하나가 이번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 한국어판(원제 : ‘날조된 징용공 문제(でっちあげの?用工問題)’)이다.

한국의 입장이 있듯이 일본도 일본의 입장이 있다

이 책은 서두에서 한국의 ‘징용 판결’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판결에 대한 비판이지만, 전문적인 내용은 최대한 피했기에 수월하게 읽힌다. 니시오카 교수에게 ‘징용 판결’은 무엇보다도 일단 국제법 위반이다. 어디까지나 한국 내 사법 판결 내용을 두고서 한국의 기관이나 기업이 아닌, 아예 다른 법질서를 적용받는 국가인 일본에 강요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징용 문제는 양국 간에는 한일국교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청구권 협정’(이하 한일협정)으로 공식적으로 종결됐다.

국내법이 국제법(조약)에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에 한국이 징용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다시 일본에게 제기하겠다는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양국 국교의 파기를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을 한국인들이 인식해야 한다고 니시오카 교수는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이 문제는 절대로 일본의 특정 정권이 수용하거나 수용할 수 없거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일본 통치시대’는 유감이나, 그 자체를 불법화해서는 곤란하다

니시오카 교수에게 있어서 한국 ‘징용 판결’의 가장 결정적 무리수는 바로 그 법리에 ‘일본 통치불법론’을 가져온 부분이다. 언급했듯이 원고들은 징용공이 아니었다. 1944년 9월, ‘징용’ 이전에 1939년부터 ‘모집’ 또는 ‘관알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실상의 자발적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이에 한국 대법원은 이들을 어떻든 ‘강제징용’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으려고 일본 기업에 배상을 명하고자 일제시대 전체를 아예 불법화해버린다. 하지만 니시오카 교수는 이런 법리가 동원되는 경우의 파장을 한번 예상해보라고 한다.

만약 일제시대 전체가 공식적으로 불법화되어버린다면, 당시 일제의 시책을 어떤 식으로건 따랐던 당시 조선반도 출신 사람들은 모두가 나름의 배상을 요구할 공식적인 권리를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지금 일본으로서는 아예 한해 국가총생산 전체를 한국인들에게 위자료로 내주더라도 아마 배상이 완료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1910년의 한일병합 조약이 불법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국 측의 정치적 주장일 뿐, 현재 국제사회에서 국제법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일도 전혀 아니다. 식민지 배상이라는 것 자체가 그 어떤 나라들에서도 국제법상의 전례가 없다. 결국, 한국이 이 문제를 일본에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면 남는 방책은 사실상 무력 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한일 양국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이에 니시오카 교수는 일본인으로서 일제시대가 현 한국인들에게 분명 불행한 시대로 기억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하지만, 한국이 어떻든 한일협정 때 관련 일정한 대가를 얻어내고 국가발전을 위해 쓰기도 한 만큼, 이제와 일제시대 전체를 불법화하는 것만큼은 한국인들도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한일 간 미래지향적 관계를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1) 당장에 한국과 일본은 북조선과 중공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고,
(2)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 법치라는 공통의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3) 무역이나 투자로서도 강한 상호결속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가. 양국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과거사는 과거사의 문제로서 각국이 스스로 정리를 해야 한다. 물론 과거사에 대한 양국의 입장, 시각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제법까지 뒤엎는, 과거사에 대한 양국의 정색은 양국의 현재와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일기본조약이 무시된다면 일본이 한국에 청구해야 할 재산권은 더 많다

니시오카 교수는 일제시대 청산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커다란 오해 문제도 하나 지적한다. 한국인들은 징용 문제로 대표되는, 일본에 대해서 어떤 재산상의 막대한 채권 문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은 이 청구권이 이전 군사 정권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처리되었으며, 문민 정권에서 이 문제가 바로잡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나 이 청구권 문제가 정말로 군사 정권에서 비정상적으로 처리되었는지는 논외로 하고, 니시오카 교수는 만약 과거 한일협정을 이제와 뒤엎겠다면 당시에 포기된 일본의 한국에 대한 막대한 청구권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국가의 청구권은 아니더라도 개인의 청구권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식, 한국 사회가 이 청구권 문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집착한다면 이는 한국인들에게 오히려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일본은 국제법상 과거 조선반도에 남겨두고 간 공장, 가옥 등 부동산을 비롯 여러 재산권이 있었지만 한일협정 때 국교정상화를 위해서 결국 이를 완전히 포기했다. 상식적으로도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의 각종 재산이 많았겠는가, 조선인들의 각종 재산이 많았겠는가. 양국의 국민들이 당시의 권리를 양국의 법정에 이제부터 마구 요구하기 시작한다면 그게 궁극적으로 한국이 좋은 일이겠는가, 일본이 좋은 일이겠는가.

‘징용’이 아닌 ‘전시동원’

책 후반부에서 니시오카 교수는 본격적으로 ‘전시동원’의 실태를 들여다본다. ‘징용’이 아니라 왜 ‘전시동원’인가. 사실 ‘징용’은 조선인들에게는 1944년 9월 이후에 적용됐으며, 실질적으로는 채 6개월도 추진되지 못했던 일이다. 지금 많은 한국인들은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에 건너가게 된 계기가 오직 일제의 공권력에 의한 ‘강제연행’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한일병합 이후 당시 조선반도의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좋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실제로 종전 당시 200만 명에 달했던 일본 거주 조선인들 중에 80% 가 아예 ‘전시동원’과도 전혀 무관하게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었을 정도다. 이들 중에 상당수가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부터가 이미 ‘조선인 강제연행’설의 엄청난 오류를 보여준다.

조선에서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는 거대한 흐름은 당시 자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부정도항자’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5년 동안 무려 110만 명이 일본으로 이주를 요구했고, 물밀듯한 요구에 이중 6할은 결국 불허가 되기도 했다. 그런 속에서 1930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에서 발각된 부정도항자가 조선으로 송환된 경우만 3만 4천명에 이른다. 소위 ‘전시동원’은 이런 거대한 이주 흐름의 1할 밖에 되지 않았으며, ‘전시동원’도 법적 강제력이 수반된 ‘징용’은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시동원’에 있어서 ‘모집’은 1939년부터, ‘관알선’은 1942년부터, ‘징용’은 1944년 9월부터다. 심지어 이 시기에서조차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 완전히 자발적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60% 였다. 즉, 일본에게 있어선 ‘전시동원’이란 어차피 조선에서 일본으로 쏟아지고 있었던 노동력을 전쟁 수행에 필요한 산업에 효율적으로 배치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을 뿐, 애초 일본으로 건너갈 의사가 없는 조선인들을 마구 색출하여 ‘노예사냥’을 하듯 끌고 간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게 니시오카 교수의 결론이다.

조선인 전시노동자의 수기, 사상 최초 번역 공개!

그렇다면 일본으로 건너간 노동자들은 과연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노예노동’에는 종사했을까. 이 역시 절대 사실이 아니다. 니시오카 교수는 ‘전시동원’ 중에서도 가장 강한 법적 강제력을 갖고 있었다는 ‘징용’과 관련 조선인 노동자 둘의 수기를 공개한다. 한국에서는 사상 최초로 번역 공개되는 내용이다. 먼저 히로시마 도요공업에 징용됐던 정충해 씨의 경우다. 정 씨는 회사 기숙사에서 1인 당 2첩의 큰 방에다가 신형 침구를 제공받았다. 전시 식량난 속에서도 삼시 세끼를 보장받았고, 140엔의 급료를 받았다(당시 순사 초임이 45엔, 병사가 10엔). 저녁식사 후에 잔치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도박을 즐기는 경우도 있었다. 수기에는 정 씨 본인이 일본인 전쟁미망인과 밀회를 즐기는 내용까지 나온다.

다음은 요됴시카단듀테츠 공장에 징용됐던 가네마야 쇼엔 씨(창씨개명)의 경우다. 가네야마 씨는 동료와의 말다툼으로 인해서 징용으로 끌려갔던 원 작업현장에서 탈주를 한다. 탈주 이유가 작업현장의 열악함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네야마 씨는 이후 자유노동자가 되어 일본내 이런저런 작업현장을 전전한다. 허나 그는 그런 속에서도 고액의 임금을 받았고 또 고가의 물건을 구입했음을 고백한다. 전시지만 가네야마 씨는 담배도, 막걸리도 쉽게 구했다. 5일에 한번 씩 소고기를 먹기도 했다. 이런 일제시대 징용공들의 모습이 과연 한국인들이 인식해온 ‘노예노동’의 모습과 조금이라도 부합하는 점이 있는가.

일본 지식인의 의견이지만 합리적인 한국인이라면 수용할 수밖에

왜 징용공 문제와 관련 한일 양국에 커다란 오해가 만들어졌고 또 이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가. 니시오카 교수는 책 후기에서 이 문제를 정리한다.
(1) 먼저 일본 내 반일 언론, 학자, 운동가가 좌우파 권력투쟁의 일환으로서 거짓으로 일본의 과거사를 공격한다.
(2) 다음에는 한국의 반일좌파가 여기에 휘말려서 덩달아 일본의 과거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3) 일본 외교 당국은 한국의 공격에 대해서는 외교상 문제를 들어 굳이 반론을 하지 않는데 이에 거짓은 더욱 확산된다.
(4) 마지막으로 한일 반일좌파는 공동으로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도 일본을 공격하며 사태를 아예 수습불능에까지 이르게 한다.

바로 이것이 이번에 한국 대법원이 법리로도, 사실로도 완전히 엉터리인 ‘징용 판결’을 내려서 한일 양국 국교를 파탄 지경에까지 이르게 만든 반일 캠페인 형성의 일반적 과정이다. 위안부 문제로는 가장 극명하게 이 과정이 진행됐었다. 북조선, 또는 중공의 사주를 받는 것으로 보이는 일부 반일좌파 일본인들의 선동에 한국인들이 거듭 놀아나며 오히려 자국의 국익을 해치는 일, 과연 앞으로도 계속되도록 내버려둬야만 할까. 이를 막으려면 불편하더라도 한일 양국에서 누군가는 이제 진실을 얘기해야만 한다. 징용공 문제는 특히 진실수용 그 자체가 문제의 해결방안이나 다름없다.

“한국을 대등하게 보는 ‘애한파’ 일본인이 한일의 역사인식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이 책을 읽으면 잘 알게 될 것이다. 본서에 자세하게 쓴 것처럼 거짓말에 기초한 반일 캠페인을 하고 있는 일본의 ‘반일’ 학자나 활동가는 한국에서 ‘양심 있는 일본인’이라고 칭찬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한일 간의 진정한 우호를 저해하고 한국을 대등하게 보지 않는 반한(反韓)세력이다. 아무쪼록 본서를 읽고 한국의 분별 있는 독자들이 과연 누가 한일 우호의 적인지를 깊이 생각해 준다면 정말로 기쁘겠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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