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Patrick Modiano
파트릭 모디아노의 다른 상품
Pierre Le-Tan
피에르 르-탕의 다른 상품
김현희 의 다른 상품
|
그는 샹파뉴산 와인을 따라주는 사람들을 ‘샹죄르changeur(바꾸는 사람)’라고 불렀고 그렇게 부름으로써 끊임없이 새 와인으로 바꿔야 함을 알려주고자 했다. ‘샹죄르’를 불러 와인을 따르라는 뜻으로 검지로 잔을 가리키며 ‘따라줘...’라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단언컨대, 와인이 바뀌는 리듬에 맞춰 실내 장식과 관람석, 외부 간판, 정권과 여인들의 원피스가 바뀌는 동안 폴은 30여 년 전부터 같은 테이블 뒤 같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성장했지만, 폴의 꼿꼿한 상체, 그의 검지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30여 년 전부터 했던 짧은 말은 그대로 남았다. “부탁해, 샹죄르... 따라줘...”
--- p.53 더그는 연가들을 불러줬고 우리는 새벽 두 시에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술을 마시고 슬그머니 사라진 윈그랭과 부르동을 찾으러 갔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포착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바람이 소나무 냄새와 함께 노래 토막들을 실어다 준 「메모리 레인」의 후렴구를 큰 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메모리 레인 말들은 오직 한 번만 메모리 레인을 지나가지, 그렇지만 말발굽 자국은 남아 있지... --- p.59 사람들이 떠나버린 해변에 우리가 모두 남아 있었던 그 오후는 우리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존재가 우연히 서로 만나 작은 그룹을 이룬다. 그랬다가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 나는 마디 콩투르와 함께 걸었다. 그녀는 내가 처음부터 자신에게 연정을 품었고, 그 점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머지않아 자신이 늙어가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 오후의 그녀는 기껏해야 서른 살쯤으로 보였다. --- p.62~63 우리 중에서는 프랑수아즈가 가장 크게 성공했다. 사람들은 몇 년 전부터 스크린에 등장한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녀는 이름을 바꿨고, 어느 날 밤 나는 샹젤리제 로터리를 지나면서 그녀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 포스터 앞에서 엄청나게 확대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슬프고도 열렬한 눈길로 크리스티앙 윈그랭을 쫓던 젊은 아가씨를, 나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와 나, 우리는 스무 살을 함께 맞았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로부아에서 보냈던 시간과 아시앙다에서의 아름다웠던 날들을 떠올릴 유일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것을 원할까? 때로 우리는 인생의 첫 시기를 지배했던 사람들의 소그룹을 잊으려 애쓴다. --- p.82 |
|
우연이 만들어가는 인생의 한 장면
이 소설의 화자는 옆 사무실에서 일하는 ‘벨륀’이라는 인물과 친분을 맺는다(벨륀은 저자의 『청춘 시절』에서 여주인공 오딜의 음반 취업을 도와주려 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하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그가 자살한 이유를 이 작품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중개로 나이와 직업과 과거가 매우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소그룹에 합류한다. 그 모임에서 화자에게 「메모리 레인」이라는 노래를 가르쳐준 미국인 더그도 만난다. 그들은 화자와 각기 다른 관계를 맺으며 섬세하고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게 해준다. 화자는 그들의 운명을 닮은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온정과 허무를 동시에 느낀다. 독자는 그렇게 젊은 시절, 우연히 만나 청춘의 한 시기를 함께하게 된 사람들과 맺는 관계가 삶 자체가 되어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허망한 삶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슬픔을 자아내는 섬세한 작품 화자는 소그룹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우정을 느끼지만, 또한 모든 것이 덧없고 순간적임을, 어떤 것도 지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는다. “그 밤들, 폴의 모직 옷과 벽난로의 장작불, 가지에 장밋빛과 옅은 파란빛을 띤 작은 촛불이 달린 소나무는 가족적인 온정과 안정을 느끼게 해줬다. 그러나 내가 금세 알아차렸듯이 그런 감정은 너무도 순간적이어서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화자는 깨닫는다, 따뜻함 가득했던 그 시간이 단지 한순간이었다는 것을.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희미해지고 사라진다는 것을. 존재했던 흔적은 누군가의 기억에만,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에만 어렴풋하게 남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떠난 어느 오후의 해변에서 화자가 깨달은 것처럼 우연히 만난 몇몇 존재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흩어지는 것이 삶이다. 잠시 서로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은 혼자 남아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삶이란 것을, 모디아노는 『메모리 레인』을 통해 가만가만히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상하게도 매력적인 이 책을 읽고 나면 독자들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허전함, 그리움을 닮은 어떤 감정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