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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모든 것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 몬순 / 소년병 / 아그리파의 휴일 / 라가 / 폼페이 / 는다는 는다를 / 그리마 / 실로 / 라라 / 제니 / 피노키오 대외비 / 야뇨증 / 링거 / 그린란드식 상자 / 골리앗 / 스테인드글라스 / 가스실 / 아라베스크 6분짜리 테이크 와이드앵글 요일은 노란 / 서머타임에 라도 / 양의 량 / 모과와 과테말라 / 마음대로 자동화 / 나니와 나니 / 아잔의 르 / 채플린라디오채플린 / 불가능한 가능성 / 라마 / 곡예사 35mm, Foma FOMAPAN 100 도도 / 도도 / 도도 / 도도 / 도도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1/250 안식일 / 레버 / 저녁 / 암모니아 / 식물원 / 아무것도 아닌 / 세월 / 파고 / 강림 / 유월(逾越) 진실의 순간, 치즈 페디큐어 / 화상 / 바닐라 / 점점 / 라의 라 / 모노레일 / 피와 냄새 컷, 비네팅이 되는 겨울의 공터 / 어물전서(魚物廛書) / 판탈롱 판타지 / 외가 / 포도 속의 포도 / 나무는 상처가 많은 사람 해설 단지 실패할 뿐. 단지 그러할 뿐. 다만 진실로 실패할 뿐. _임지훈(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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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그 말을 하고 싶었어 낯선 감정에 목숨을
거는 새에 관하여 새장의 지붕이 차가워진다면 우리가 조금 더 하얗게 된다면 의자는 블라인드 속에서 두 가지 의 표정을 짓고 모든 벽에서 물이 쏟아지는 순간 --- 「아그리파의 휴일」 중에서 새벽에 모든 방언은 물의 간격으로 만들어진다 아버지가 더운 몸을 끌어안고 강물 속에서 걸어온다저, 걸음걸이에서 쏟아지는 사각얼음들 훈김에 젖은 새들 그의 딱딱한 부리들 발톱과 가발 걸린 나무, 안개는 깊은 원을 그리며 아버지를 지운다 사방은 흰 벽이 된다 흐르던 피가 그쳤다 사람들은 광장에 나와 춤을 추었다 사제들이 심판은 끝났다고 했다 모든 창문이 열렸다 어서 점령군의 깃발로 걸라고 했다 보국단원이 형을 끌고 뒷산으로 갔다 --- 「라가」 중에서 자살에 성공한 나는 바닥에 떨어진 클립들을 보고 생각합니다 클립의 반짝임이나 타원형의 방식에 관해 그 안에서 구부러지는 사소한 가족들의 손에 대하여 그중에 한 명의 샌들이 떠올랐고 클립들의 짝을 맞춰줬어요 침대를 찾아 귀를 대볼게요 눈을 감으면 침대의 귓속에서 비가 내려요 난 빗방울에게 발을 모아 단번에 떨어지는 법을 가르쳤어요 소란한 침대가 연음(延音)을 다 배울 때까지 엄지발가락으로 박자를 맞출 때까지 기다리는 일도 나쁘지 않으니까 침대의 내부에서 태초의 바람과 장마와 오후의 난간을 발견합니다 --- 「제니」 중에서 그의 눈동자는 완벽한 개기일식 중이다 아치형의 굴다리 밑에서 그는 숯불처럼 웅크린다 심장과 목덜미와 가소성의 손바닥이 기화될 때 등을 뚫고 나오는 집. 안방에서부터 불이 붙는다 작전에 실패한 소방수들이 고양이의 코를 자르고 배낭 속에서 아내와 딸아이가 한 몸으로 들러붙는다 그는 숨을 당겨 폭발한다 --- 「골리앗」 중에서 서로의 눈동자가 읽힐 때 혀는 초콜릿처럼 녹는다 온기가 남겨진 타일과 타일. 마른 손을 단단히 맞잡고 있다 우리는 노래를 좋아하지 머리를 감을 때면 흥얼거리잖아 귀가 젖으면 미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천장 끝에 폐회로 카메라와 스피커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검은 담배라고 부른다 번호와 악센트 대신 바흐의 음악이 나올 것 같다 금지된 일기들로만 선곡하는 거다 몰래 적었던 내부 조직과 배신자들. 베개 속의 메모. 책상 위에 다리를 올리고 깍지를 꼈던 기억. 소지품에 적어뒀던 이름. 하울링이 된 비대칭 마디와 변박의 템포. --- 「가스실」 중에서 하루 종일 식물원에 앉아 있다 햇빛이 간격을 만들며 흔들렸다 식물원에는 물고기를 위한 방 한 칸 구부러진 소나무를 위한 창문 한 개 그리고 각설탕 하나가 필요했다 사방으로 난이 물과 피를 쏟고 종일 죄를 짓고 식물들은 공동체를 위한 일이라고 했다 사과는 이른 아침부터 건축되고 식물들은 젖은 구두를 밖에 내놓는다 --- 「식물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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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도 심훈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 최세운 시인의 첫 번째 시집
2020년도 심훈문학상 수상 시집. 2014년 《현대시》로 등단한 이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한 최세운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이다. 6개의 장으로 세심하게 구분된 이번 시집에는 최세운 시인이 데뷔 이후 꾸준히 발표해온 57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시집은 ‘모든 것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라는 소제목의 장으로 출발하는데 ‘6분짜리 테이크 와이드앵글’이라는 두 번째 장을 지나 마지막 장인 ‘컷, 비네팅이 되는’에 이르면, 독자들은 이들 제목이 모두 카메라의 촬영 과정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카메라에 포착되는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최세운은 세계가 멸망하는 장면들을 포착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절망에 빠지지는 않는다. 결국 시인이 보여주는 장면은 “모든 것이 망쳐지고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모든 것이 흩어졌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어떤 출발선에 서게 되는 것”(임지훈 문학평론가)인지도 모른다. 더 간절한 쪽으로 달아나는 문장들 ― “뒤돌아보면 소금이 되어버리는 노래를 한없이 통과하면서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성큼성큼, 머뭇머뭇, 나아간다.” ―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세계가 멸망하므로 어쩌면 화자는 더 간절해진다. 바로 그 멸망을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가계의 멸망과 국가의 멸망, 세계의 멸망을 간절히 바라다보면 멸망 다음에 올 어떤 것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후에는 어떤 것이 가능할지도 궁금해진다. 너희는 너희들에게. 죽은. 소매를 내밀고. 쓰러진. 복도와. 커튼과. 식탁과. 의자를 밀며. 가로수와 가로수. 너머의 가로수까지. 빛과 노래가. 만나고. 번져가는 입김이. 화분이. 벽에서 들리는. 너희의 울음이. 오전 내내. 컵 속에 채워지는. 흑암과. 의지와. 바닥이. 믿음을 거스르고. 창가에서 벗어나고. 모든 문이. 잠긴다. 우산을 펴고. 너희들은. 어디로 가는 중인지. 밤새도록 너희는. 너희들을. 다스리고. 어긋나는 너희와. 발맞추고. 갈라지는. 너희들을 안고서. 너희는. 간절한. 저녁을 따라. 더 깊은. 바다로. 침몰한다. ― 「파고」 부분 불가능한 세계를 보여주면서 가능한 세계를 꿈꾸게 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이기도 하다는 듯, ‘컷’이라는 외침과 함께 영원히 멈춘 장면으로 남을 찰나의 이미지는 서서히 빛바래가면서도 진실의 순간을 부여잡는다. 그것은 아무런 희망도 낙관도 없이 멸망하는 세계를 전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폐허 속에서 오히려 주체는 힘을 갖게 되고 시는 빛을 발한다. 너를 모으는 중이야 휘파람과 휘파람과 휘파람과 함께 비가 온다면 우리는 하얗게 흘러가버릴 거야 시트를 머리끝까지 덮어줄 때 알록달록, 이라고 발음해보자 반쯤 뜬 눈꺼풀을 천천히 내려줄 때 안녕, 하고 꼬리를 흔들어보자 너는 난간 밖으로 나가자고 해 손을 놓치지 말아야 해 우리는 이제, 어린 량이야 ― 「양의 량」 부분 시인의 시적 열망은 실패하는 자리에서 태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실패한 것들의, 폐허가 된 자리를 돌아보면서 시인의 카메라는 천천히 돌아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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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운의 시는 신성과 아버지라는 존재론적 수직축으로부터의 궁극적 激越의 서사다. 그는 먼 기억을 호출할 때마다 가파른 경험적 삽화들을 질서정연한 호흡으로 재구성한다. 몽톡한 빛이 간간이 새어들 무렵 아버지의 정수리와 목과 혀와 발과 입술 주름과 옷깃까지 묻어 있던 낡은 방언을 소환하고 재현해간다. 삶의 곳곳을 적셨을 어둑한 징후로부터 超越하려는 의지는 뒤돌아보면 소금이 되어버리는 노래를 한없이 통과하면서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성큼성큼, 머뭇머뭇, 나아간다. 오랫동안 변방에서 죽음을 연습해온 순간이 ‘기록’이라는 육체를 부여받는 과정이 이로써 완성된다. 이때 그의 시는 기억 속의 욕조와 방주와 성소와 외벽과 무덤에서 자라고 흘러가고 마침내 언어 밖으로 천천히 강림하고 번져간다. 최세운만의 시적 逾越이다. -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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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디큐어』는 세계를 무너뜨린다. 단지 그것뿐이다. 다만 그것이 중요하다. 진실로 실패한다는 것이. 그러니 함께, 실패하자. 철저하게, 무능하게, 비관적이게, 어떠한 희망도 없이. 그렇게 모든 것이 망쳐지고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모든 것이 흩어졌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어떤 출발선에 서게 되는 것이다. ‘안녕’을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때에, ‘안녕’이 진정으로‘ 안녕’이 되는 때에.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Happy Birthday, My Dear World. - 임지훈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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