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몸이다. 이야기를 담은 몸이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때로는 지루하고 끔찍한 이야기들을 담은, 그러나 한결같이 아름다운 몸. 그 몸에 묻은 얼룩, 문신같이 새겨진 낙서, 찢기고 갈라진 흉터,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질 때 책은 몸과 정신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빛이 난다. 은은히 빛나다가 마침내 찬란히.
---「들어가는 말_타인의 시선이 담긴 몸」중에서
조선에 대한 몇 부분 오류 섞인 정보와 해석에도 불구하고, 마르티니의 저술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데, 그에 이르러 조선의 역사가매우 유의미하게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조선에 대한 기술은 일본 선교사들에 의한 것이 많았고, 그 기술은 임진왜란을 통한 접촉이 기본을 이루었다. 일본보다 뒤늦게 진출하기는 했지만, 중국 선교사들의 조선에 대한 기록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마테오 리치의 기록이 대표적인데, 그에게 있어 임진왜란은 일본과 조선의 전쟁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마테오 리치에게 그것은 중국의 승리였다. 그야말로 조선은 ‘타자의 타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티니에 이르면 이제 조선의 전쟁은 임진왜란이 아니다. 그것은 청나라와 조선의 전쟁이다.
---「오해와 편견의 역사_마르티니의 『타르타르의 역사』」중에서
책의 경우는 종이가 살아 남았다고 해서 그 존재가 이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책이 책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와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활자, 그리고 인쇄와 제책과 보급까지. 여기까지 오면 다 온 것 같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이 아직 더 남아 있다. 책에 체온을 입히는 독자들. 낡은 표지, 변색된 내지, 누군가의 낙서, 얼룩, 그리고 문득 페이지 사이에서 발견되는 수신인을 알 수 없는 편지…. 이런 것들로 흔적을 남기는 독자들의 세월. 더 많은 예를 들 수도 있다. 장서표, 도서관의 인장, 폐기 처분된 책임을 알리는 ‘discard’ 표시. 뒤표지에 붙어 있는 대출기록표. 그 기록표를 빼곡히 채운 이름들, 마른 나뭇잎, 그 나뭇잎이 말라가면서 남긴 흔적…. 그런 것들. 아름다운 책은 이처럼 세월을 말한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뿐만 아니라 그 책을 거쳐 간 독자들의 세월을 또한 말한다.그래서 책은 다시, 또 다른 이야기를 품는 책이 된다. 이것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오래된 책들의 비밀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아름다워지는 책_피카르의 『종교에 관하여』」중에서
홍종우는 『춘향전』이 출판되자마자 곧바로 『심청전』 번역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프랑스인의 조력자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번역했고,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도 했다. 『다시 꽃 핀 마른 나무』라는 제목으로. 1895년이었다. 그런데 이 『심청전』 역시, 심청전이 아니다. 『춘향전』보다 더 심하다. 『춘향전』은 살짝살짝 달랐는데, 『심청전』은 더 요령부득, 더 오리무중이다.
내용을 간단히 보자. 덕이 높기로 소문난 양반 청이 아버지가 음모에 의해 유배를 가게 된다. 거기에서 청이를 낳는다. 그리고 청이 아버지가 봉사가 된다. 청이는 300석 쌀을 받고 배에 제물이 되기를 자청한다.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가 없는 내용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스토리가 전개된다. 청이 아버지의 친구가 등장하고, 나라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어린 왕이 유배를 가고, 그 왕이 거북이를 쫓아 바다에서 나온 청이와 결혼을 하고…. 어쨌든 그러다가 청이 부녀가 상봉을 하고, 심 봉사는 다시 재상이 되고…. 이 개작이 얼마나 심했는지 프랑스 사람이며 동시에 한국학 학자 이기도 했던 모리스 쿠랑은 『한국서지』에 이 책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홍종우에 의해 번역되었다기보다 모방된 한국 소설.” 프랑스 사람 로니도 아닌 홍종우는 왜 『심청전』을 이런 식으로 개작했을까?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이 작품은 사실 우리나라의 고소설의 온갖 모티브를 차용한 것으로, 『조웅전』, 『백학전』, 『숙향전』, 『토끼전』 기타 등등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아마도 홍종우는 우리나라 문학작품을 하나라도 더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심청전』도 알리고, 다른 것도 알리고, 할 수 있는 만큼 다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자랑스러웠으니까. 너희들 잘난 체하지 마,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훌륭한 문학이 있어, 말하고 싶었을 테니까.
---「유럽 최초로 한국 문학작품을 소개한 암살범 홍종우의 『다시 꽃 핀 마른 나무』」중에서
로드리게스는 『일본교회사』라는 책을 썼다. 제목은 『일본교회사』이지만 일본과 중국에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 두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같이 다룬 것이 주 내용이다. 그 두 나라와 조선과의 관계도 다루었다. 유럽인들에게 극동을 소개한 17세기의 많은 책들이 대부분 정치적·사회적 현상을 다루는 것에 국한되었던 반면 로드리게스의 이 책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동양 3국의 문화적 전통을 언급했다. 그러나 빛을 보지는 못했다. 그의 필사본은 20세기 중엽까지 사장되어 있다가 1932년에야 발굴되었다. 그나마 전본이 아니었다. […]
그런데 이 책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이 책이 임나일본부설을 최초로 소개한 서구 서적이라는 점이다. 일본이 백제와 신라, 가야 지방을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이 설은 이후 일본의 조선 침공을 정당화하는 이론이 된다. 로드리게스가 아무리 오래 극동 지방의 선교를 했고, 또 역사를 공부했다고는 해도, 결국 한계는 있었다. 그가 참고했던 자료들은 일본에서 얻은 것들이었다.
---「조선의 지식사회를 뒤흔든 서구 문물 로드리게스의 『일본교회사』」중에서
연암문고에서 소장하고 있는 쓸쓸한 기록,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지 않을 수 없는, 쓸쓸하고도 귀한 서적이 바로 위에서 소개한 「함녕전 시첩」이다. 시첩은 쓸쓸한 것 중에서도 더 쓸쓸하고, 귀한 것 중에서도 더 귀해 감히 만지지도 못하고 그냥 들여다보기만 했다. 서구 사람들이 본 조선에 관한 이야기가 마치 종착점에 모이듯 그 시첩으로 모두 모여드는 것 같았다. 그 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보태고 싶어서 이 책을 시작한 건 아니다.
나는 다만 그 시첩을, 그리고 그 시첩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책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특별하고 아름다운 도서관이 누구나들어갈 수 없는 도서관이라는 것이 안타까웠다. 안타깝다 못해 속상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만 권의 책’이라고 붙이고 싶기도 했다. 연암문고에서 소장하고 있는 1만 1,000권의 책을 다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해 겨우겨우 일부만 추렸다. 욕심만 갖고 시작한 일이라 힘에 부치지 않는 일이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것이 이 책에 소개할 목록을 추려내는 일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책 하나 사연 없는 책이없고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소개된 책들이 다른 책들에 비해 가장 먼저 소개되어야 하는 책들은 아니다. 서가를 거닐다가 손 닿는 대로 꺼내본 책들이라고 해두자. 그런데도 이렇게 귀했다고 해두자.
---「나가는 말_「함녕전 시첩」속 동감지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