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역사 속에서 남성은 지식의 탐구자이자 지식이 탐구해야 할 대상으로 그려졌지만, 여성은 과학자로도 과학의 대상으로도 오롯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과학과 적대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판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내버려 두기에 과학은 우리의 삶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친다. 난자의 능동성을 발굴한 연구에서 보듯 여성의 몸을 무지에 남겨 두는 것은 우리의 선택지가 될 수 없다. ---「들어가며」중에서
출간을 앞두고 이 책의 핵심 내용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입덧의 생물학적 기제를 설명하자 한 청중이 질문했다. “남편도 입덧한다고 하는데, 이 경우에 입덧의 원인은 사랑인가요?” 대답은 “그것은 입덧이 아닙니다.”였다. 입덧은 임신한 여성의 태반에서 비롯되는 물질적 현상이며, 인류의 절반만이 임신할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여성의 임신을 통해 인류가 유지됐음에도 임신은 여전히 신비로운 영역에 맡겨져 있다. 임신에 따른 몸의 변화는 모성으로 감내하기보다 과학으로 이해되어야 할 영역이다. 그 무엇보다 여성의 건강과 삶의 질을 위해 임신은 더 이상 신비로워서는 안 된다. ---「4장 신비롭지 않은 임신을 위하여」중에서
강간은 진화의 산물일까, 남성 중심 사회의 산물일까? 진화론의 역사는 이런 질문 자체가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가르쳐 준다. 강간의 진화를 설명하려 한 진화론의 여러 가설이 일찍부터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거나 포함할 수 있는 길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적 요인의 설명과 양립 가능한 진화론의 가설을 더 드러낼 때다. 진화론은 다양한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효과적인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많은 선구자가 그랬듯, 앞으로 더 많은 여성이 진화론의 친구이자 비판자가 될 수 있다. ---「9장 진화론과 화해하는 법」중에서
특정 분야의 과학자가 되지 않는다면 광대한 과학기술의 세계를 어디에서부터 탐색해 나가야 할까? 나는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호기심’에서만 출발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연과 사물이 나의 몸, 나의 삶과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인지하는 어른의 때 묻은 현실 감각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책에서 함께 보았듯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는 자연과 사물의 세계와 나의 연결 지점에 뿌리내리고 있다. 저마다 출발점은 난자 냉동에 관한 고민일 수도 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받았던 쌍꺼풀 수술일 수도 있으며 화장품 광고만 띄우는 SNS일 수도 있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인 나의 삶에서부터 시작하는 과학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