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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듀

: 경성 제일 끽다점

[ 저자 친필 사인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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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3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360쪽 | 380g | 128*188*17mm
ISBN13 9791192638331
ISBN10 1192638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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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한마디

[조선 최초의 서구식 다방, 카카듀로 오세요] 박서련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을 재미있게 읽었던 독자라면, 취향 저격일 것이다. 하와이 태생 현앨리스와 영화감독 이경손 등 실제 근현대사 속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시대와 조국의 운명에 정처없이 흔들렸던 예술인,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단면을 그려낸 작품.- 소설/시 PD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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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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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술을 믿는다. 신을 믿듯이 아름다움을 숭앙한다. 아름다움을 추종함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믿는다.
그리고 현앨리스가 나타났다.
이것이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가장 정확한 요약이다.
--- p.9

행여 그 여자를 놓칠까 봐 부랴부랴 카메라와 필름통을 끼고 대합실로 달려갔다. 짐도 무겁거니와 앞뒤 없이 달려간 참이기도 해서 부딪치듯 쾅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 여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크고 동그랗되 눈썹 길이만큼 옆으로 길게도 뻗어 있는 눈 한쪽은 쌍꺼풀이 짙었고 한쪽은 홑꺼풀인 듯 속쌍꺼풀이 있어 묘한데, 서로 비대칭처럼 보이는 눈의 균형을 좁은 콧대가 아슬아슬 조심스레 가누었고 그 아래에 붉은 마침표 같은 입술이 갓난애의 조막만 한 크기로 야무지게 놓여 있었다.
신파(新派), 신파다.
새 시대의 얼굴이다.
--- pp.35-36

“라남에서 온 라운규올시다.”
누구…… 하고 물으려던 참에 운규가 서양인처럼 과장된 동작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자기 가슴팍을 가리켰다. 억양이 약간은 특이했는데 알고 보면 그건 저 지독하다는 동북방언의 흔적을 노력으로 거의 지워내고 남은 것이었다.
그는 영화가 좋아서 왔다고 말했다. 1지망으로 배우를 하고 싶고, 기회를 준다면 감독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즉 운규는 등장부터 나의 라이벌이었던 셈이다. 나도 감독으로 조선키네마에 입사하였지만, 고좌가 나의 신상명세(나이)를 알고는 태도를 바꾸어 감독은 아직 이르다고 선을 긋는 바람에 조감독 신세였다. 부디 와달라 간청할 때는 언제고, 고작 나이를 가지고. 감독 노릇도 졸렬하고 유치하기 짝 없는 주제에. 나는 처음 보았을 때는 물론 이후로도 결코 운규에게 나이를 묻지 않았으나 그가 연상이고 내가 상대적으로 연소한 것은 그도 알고 나도 알았다. 감독 지망으로 들어오는 형이라면 나를 앞질러 감독이 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나는 왠지 그가 마음에 들었다.
--- pp.82-83

앨리스가 (언제나 그렇듯) 불현듯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조카라서도 그렇지만, 막연한 꿈을 이뤄줄 조력자로서 앨리스가 더욱 반갑고 기꺼웠다.
“그런데 저 때문에 친구분을 내보내서 어쩌지요.”
“아니다, 오늘 볼일은 다 보았는걸.”
“경성엔 아직도 카페 하나가 없군요, 카페라도 있으면 우리가 거기 가서 얘기하면 되는데.”
“아주 없지는 않은데, 아마 거의가 외국인 전용으로들 하고 있을 거야.”
바로 이때에 앨리스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니까요 아저씨, 우리가 카페 하나 차려보지 않을래요?”
--- pp.122-123

[초록 앵무새]에서 이름을 빌려온 우리 가게에는 초록은커녕 푸른색의 기미조차 한 점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바로 그 때문에 나와 앨리스의 가게가 고유하게도 느껴졌다. 우리의 카카듀는 검고, 붉고, 희다. 자리를 빌리고 이름을 빌렸지만, 그 이상 무엇도 흉내 내지 않고 우리의 것을 만들어갈 참이다. 개업을 앞둔 가게에서, 이름도 없이 붉은 바가지 세 점으로 간판을 대신한 가게에서 나는 나의 각오와 다짐을 곱씹었다. 지금껏 그 존재를 몰랐으나 새로 이식받아 알게 된 장기처럼, 새삼스럽고도 몸에 꼭 맞게 느껴지는 이상한 자신감이 차올랐다. 나는 깨끗이 씻은 간을 몸에 넣은 토끼였고, 제우스와 화해하여 더는 닳지 않는 새로운 간을 얻은 프로메테우스였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일은 얼마나 즐겁고 쓸쓸한가.
--- pp.155-156

“메리 크리스마스.”
나는 멍청하게 앨리스의 말을 따라 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몇 마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분으로 가게를 나와 마침내 혼자가 되었을 때, 혼자서 거리를 걷기 시작했을 때, 나는…… 행복했다. 뿌듯했다. 2리터짜리 빨간색 페인트 통에 검정색이든 흰색이든 다른 색 페인트 몇 방울을 섞는다고 해서 2리터의 빨강이 아예 다른 색이 되지는 않는다. 나의 행복은 2리터의 빨강처럼 자명했다. 막연한 심정으로 나는 앞으로의 모든 성탄절이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러지 못할 까닭은 하나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순간,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 p.244

한참 만에 앨리스는 다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작은 소리로 뭐라 말한 다음의 일이었다. 우리는 서로 멀리에 서 있었고 우리 사이에는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앨리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입모양과 아주 가늘게 들려온 목소리로 내용을 짐작할 뿐. ……지 마. 앨리스는 그렇게 말했다. 오지 마 또는 죽지 마. 앨리스는 나에게 뭔가를 금지하려 했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예배당으로 돌아갔을 때, 연극은 모두 끝나 있었다.
--- pp.3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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