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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용서하며

: 향봉 스님 수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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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5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254쪽 | 388g | 152*215*16mm
ISBN13 9791193454947
ISBN10 1193454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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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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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맞이하여 등기로 소식을 전하던 그 깨끗한 마음으로, 어찌 어린 것에게는 선물을 주지 못했던가? 용서의 미학을 배워, 그에게 따뜻한 사랑의 입김을 내리지 못하였던가? 다섯 장 부친 나의 선물을 그 녀석은 크고 아름답고 뜨거운 아름드리 선물로 답장해주지 않았는가?’
--- p.22

물오리 사냥개는 이름이 똘똘이었고, 셰퍼드는 암놈이 갑순이 숫놈이 갑돌이였다. 그런데 이 놈의 강아지들이 낮에는 제법이나 잘 놀아주지만 밤이 되면 어찌나 어미개 생각만 하고 낑낑거리는지 시끄럽고도 안쓰러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여 자비심을 한껏 발휘하여 세 마리의 강아지를 방 안으로 불러들여 며칠을 동침했더니만, 이젠 아예 밤이 되면 으레 문살을 긁으며 일박하기를 낑낑거리며 애원한다. 그래서 이래저래 강아지들의 사정을 봐주다가 그만 이부자리는 물론 방 안 가득히 강아지 냄새로 현란하게 단청되었음은 물론이다.
--- p.30

겉으로만 ‘누더기승’이 될 것이 아니라 안으로도 위장이 없는 ‘누더기 스님’이 되고픈데, 거짓과 꾸밈으로 일관된 나의 일상사는 사생아의 무덤만큼 소리 내어 통곡하지 못할 지어미의 설움이 철철 고여 넘쳐 흐르고 있음이 사실이다. 해인사 밑 꼬마들이 붙여준 ‘똥자빼 스님’이 점점 ‘똥자더한 스님’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도 없지 않아 서글퍼지는 마음 가눌 길 없다.
--- p.37

“부처님요, 부처님요! 당신은 어쩌면 그리도 잔인하신지 순진한 총각처녀 들꼬셔다가 싹둑 머리칼 잘라놓고, 술도 안 되고담배도 안 되고 고기도 안 되고 여자도 안 되고 어쩌면 그리도 세상의 좋은 것만 골라가며 안 된다고만 하십니까. 때로는 어머님도 뵙고 싶고 가시나들도 보고 싶고 싸가지 있게 한 번쯤은 거나하게 놀고픈데, 당신의 눈치 보느라고 이 젊은 자암이는 주눅 들어 사옵네다.”
--- p.67

그런 만남이 있었던 날 끝내 정봉 스님은 나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질 않고 청평사를 떠나가셨다. 그 뒤 보름쯤 지난 후에 정봉 스님의 침묵은 영원한 침묵으로 확대되어 지리산 천은사 계곡에서 동사(凍死)한 채 발견되었다. 청평사 석굴에서처럼 천은사 뒤편의 계곡에 자리한 동굴 속에서 소림굴의 달마처럼 가부좌한 모습으로 동굴벽에 기대어 이 세상의 고되고 질긴 그림자를 거두어버린 것이다.
--- p.75

산사에서 약을 달이며, 그것도 인적이 아예 없는 겨울 산사에서 약을 달이며 조금은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이럴 때일수록 눈깔사탕이라도 사줄 딸년 하나 있었음 오죽 좋으랴 하는 생각도 든다. 어느 어린 소녀가 눈깔사탕이나 먹으며 아무런 생각 없이, 때 묻지 않는 그런 눈빛으로 이럴 때 나의 약 달이는 궁상이나 지켜봐줬음 오죽 좋으랴 하는 생각도 든다.
--- p.99

어찌하든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괴테나 쇼펜하우어 등 한때는 자살 예찬론을 펴던 이들도 자신들은 늙어 죽도록 인생의 고뇌와 기쁨을 만끽하고 떠났다. 이를 상기해가며 마늘 한 쪽이라도 악착스레 입 안에 털어넣고 찬물을 마시더라도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찬물 마시고도 그깐놈의 체면 땜에 이빨 쑤시고 살아가는 그런 삶일지라도, 〈서울의 찬가〉를 몇 번이라도 복창해가며 오래 살고 볼 일이다.
--- p.102

누가 뭐라든 사랑하며 살 일이다. 생명이 남아 있는 한 사랑하며 살 일이다. 사랑하며 용서하며 서로 이해하며 살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누군가를 용서하며 살 일이다. 너그러이 용서하며 화끈하게 사랑하며 살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 함은 항시 봄의 동산에 머무는 것이요, 사랑을 잃고 사랑할 줄 모르는 마음은 항시 겨울 빙산의 적막강산에 묻혀 살기 마련이다. 사랑하며 용서하며, 사랑하며 용서하며 살 일이다.
--- p.117

불법(佛法)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평선 있는 나라이다. 끝 없는 대해(大海)와 같고 높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실로 깊고 넓으며 미묘하기 때문이다. 불법의 넓은 대지에 두 발을 딛고 서서 아직 어느 곳을 향할지 방황하고 있긴 하나, 생각할수록 다행스럽고 고맙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 p.121

여인은 나의 눈치를 위아래로 몇 번 살피는 것 같더니만, 자기의 손금이나 봐줄 수 없느냐는 얄밉도록 두툼한 주문이다. 하도나 어이가 없었으나, 나의 생긴 꼴이 싸구려 시장 바닥의 관상쟁이 얼굴쯤으로 본시부터 생겨먹은 게 잘못이다. 해서 복채만 두둑이 주면 손금뿐 아니라 보너스로 관상까지 봐주겠노라고 두 눈 딱 감고 대답했다.
--- p.148

노선사의 손을 꼬옥 쥐니 가슴이 짜릿 뭉클하다. 노사의 귀에 대고 귓속말로 “스님은 부처님이예요” 했더니만 “씨발놈의 새끼” 하신다. 아! 아! 우리들의 영혼에 등불을 밝혀주실 춘성 대선사님의 건강 회복을 빌고 빈다. “씨발놈, 씨발놈의 새끼!”를 하루에도 열 번 스무 번 듣더라도 꼭이나 건강을 회복하시어 다시금 성큼성큼 그 크신 모습으로 우리들 가까이 다가오시며 몸으로 보이시는 무진무량의 법음(法音)을 들려주셨음 싶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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