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일 사람도 서울 안에 있는 사람은 거의 다 죽이고 시골 있는 사람은 비밀한 명령을 띤 사람들이 떠나가고 귀양 갈 사람들은 귀양길을 떠나고 귀양 보낸다 칭하고 뒤로 자객을 보내어 길에서 없이해버릴 사람은 또 그렇게 하기로 다 작정이 되었다. 종로 네거리 한복판에 무슨 장막이나 치려는 듯이 드문드문하게 둥그렇게 돌려 박아놓은, 길 반씩이나 잔뜩 넘는 소나무 말뚝 끝에는 이번 정난 통에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이들의 머리가 눈을 부릅뜨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그 밑에는 말뚝에 패를 달아 희게 만들고는 그 모가지 임자의 죄명과 성명을 대자로 썼다. ‘대역간흉(大逆奸凶) 김종서(金宗瑞).’
p. 483-485 삼문의 팔과 다리에는 불같이 뻘건 인두가 번갈아 닿아 지글지글 살이 타고 기름과 피가 흘렀다. 그러나 그는 잘못하였다고 빌지도 아니하고 누구와 같이하였다고 불지도 아니하였다. 또, 불어댈 필요도 없다. 김질이가 일러바치었으면 다 알 것이다. 그렇지마는, 그렇다고 자기의 입으로 동지를 불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왕은 삼문의 입으로서 잘못했다는 말과 또 누구누구와 함께하였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뻘겋게 단 화젓가락으로 넓적다리와 장딴지를 뚫기도 하고 두 팔과 손바닥을 뚫기도 하였다. 고기 굽는 냄새와 같은 살과 기름 타는 냄새가 대궐 마당에까지 번지고 방 안에는 노란 연기가 피어오른다. 빨갛게 달았던 화젓가락과 인두는 삼문의 피와 기름으로 하여 순식간에 식어버린다. 뿌지직뿌지직하는 소리가 그칠 때마다 삼문은, “이놈들아, 쇠가 식었고나. 더 달게 하려무나.” 하고 소리를 지른다. (……) 불같이 빨간 쇠꼬챙이가 삼문의 배꼽을 지진다. 기름이 보글보글 끓고 그 기름에 불길이 일어난다. 꼬빡 졸던 삼문은 번쩍 눈을 떠서 자기가 당하는 것이 무엇인 것을 보더니, “성삼문의 몸뚱이가 다 타서 없어지기로 성삼문의 가슴에 박힌 일편충성이야 탈 줄이 있으랴.” 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른다. 이 소리에 놀라 쇠꼬치 든 무사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삼문의 배에서 붉은 피가 한없이 흐른다. 이때에 신숙주가 무슨 은밀한 말씀을 아뢰려고 왕의 곁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삼문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른다. “이놈 숙주야, 네가 나와 함께 집현전에 입직하였을 적에 영릉께옵서 원손을 안으시고 뜰에서 거니시며 무어라고 하시더냐. 내가 천추만세 후에 너희는 이 아이를 생각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거든 너는 벌써 잊어버렸단 말이냐. 아무리 사람을 믿지 못한다 하기로 네가 이다지 극흉극악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놈아, 네가 대의를 저버렸거든 천벌이 없이 부귀를 누릴 듯싶으냐.” 숙주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감히 삼문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