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상품 검색가기
분야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소득공제
미리보기 공유하기

최후의 유혹 1

[ 양장 ] [ 포함 문학 3만원↑ '카잔차키스 명문장카드 40장 세트' 증정(포인트차감) ]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이동
리뷰 총점8.0 리뷰 5건 | 판매지수 120
정가
10,800
판매가
9,720 (10% 할인)
YES포인트
배송비?
2,000원 해당 도서 포함하여 만원 이상 구매 시 무료배송
구매 시 참고사항
  • 해당 상품은 품절 상태입니다.
작은 출판사 응원 프로젝트 <중쇄를 찍게 하자!>
니코스 카잔차키스 명문장 카드 40장 세트 증정
제16회 독자 선정 올해의 책 2018 투표
11월 혜택
YES스탬프
1 2 3 4 5

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08년 03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404쪽 | 552g | 125*195*30mm
ISBN13 9788932908113
ISBN10 893290811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바티칸이 금서로 지정하고, 마틴 스코시지가 영화로 만들어 또 한 번 논쟁이 되었던 소설. 인간을 구원하고자 했던 인간 <예수>를 그린 이 소설은 자유와 구원, 두려움과 희망의 삶을 산 인간 <예수>의 삶과 죽음을 담은 33장의 기록이다. 카잔차키스는 예수를 투쟁에 몸 바친 전형적 자유인으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예수까지도 초인의 한 본보기로 묘사함으로서 이단의 비판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모두, 자유를 위한 투쟁은 두려움과 희망을 모두 배제하고 싸워야 한다는 니체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교회로부터 끌어내고,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여 새로운 구세주를 만들어 내고, 그럼으로써 도덕적, 정신적 공백 상태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하려 했다. 예수가 겪는 갈등이 카잔차키스 자신이 겪었던 갈등이자, 우리 시대의 혼돈에 직면한 모든 민감한 사람들이 겪는 갈등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카잔차키스는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지닌 그리스도 전설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20세기의 관점에서 이해가 가능한 예수를 그려내었다.

'열린책들'은 카잔차키스 사망 50주기를 맞아서 2008년 3월 30일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전 30권을 완간했다. 이 전집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리스인 조르바』 외에도 카잔차키스 문학의 사상적 토대가 된 초기작부터 후기의 걸작들, 그 외 서사시, 희곡, 여행기까지 모두 포함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저자 소개 (2명)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그림 : 이혜승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파리 에콜 드 보자르에서 수학했다. 독특한 화풍을 선보이며 각광받는 신예로 떠오른 그는 최근 국내에서도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이번 카잔차키스 전집에서는 틀과 벽처럼 눈에 보이는 공간의 재배열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존재나 그 내면의 흔적을 찾아가는 새로운 탐구를 시도하고 있다.

줄거리 줄거리 보이기/감추기

오늘도 로마인들은 십자가를 설치하고, 메시아의 구원을 기다리던 유대인들은 혹여 오늘이 그날일지 몰라 언덕으로 모여든다. 십자가를 만드는 일해서 먹고 사는 가난한 목수 예수는 그런 사람들 틈에 끼지도 못한 채 홀로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른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신의 계시를 받게 된 예수는 가녀리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이 그런 인물일 리가 없다며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려 몸부림친다. 결국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고 진정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예수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하느님의 사랑의 말씀을 전하게 되고, 그의 말을 듣고 감명받은 야고보, 요한, 마태오 등이 제자가 된다. 그러나 유독 유다만은 예수가 도끼와 불로 로마인을 모두 몰아내기를 바라며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예수를 못마땅해 한다. 결국 예수는 먼 여행 끝에 광야에 도착해 하느님을 만나고자 애타게 기다리지만, 광야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유혹>과 <하느님> 둘 다였다. 이후 <유혹>은 계속해서 예수를 따라 다니게 되고, 골고타 언덕을 오른 마지막 순간 예수에게 <최후의 유혹>이 찾아온다.
<사랑>과 <도끼> 중에서, 가정생활의 기쁨 그리고 고독과 순교자의 삶 가운데, 육체만의 해방과 유체와 영혼 모두의 해방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예수는 끊임없이 갈등한다. 예수뿐 아니라 유다와 바라빠, 야고보, 요한, 마태오, 라자로와 막달라 마리아, 마르타와 마리아 등 예수의 주변 인물들에게 진정한 삶을 부여하고 있다.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니코스 카잔차키스 사망 50주기를 기리는 최초의 한국어판 전집 30권
열린책들은 2008년 3월 30일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전 30권을 완간했다. 이번에 발간된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은 원고지 매수로 약 50,000매에 달하는 방대한 양으로 무엇보다 그의 전 문학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1974년 박석기와 이인웅에 의해 『희랍인 조르바』가 한국 최초로 번역된 이래, 몇몇 작품 정도는 안정효, 이윤기 등의 번역으로 읽히기도 했으나 그나마 절판되어 더 이상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카잔차키스 사망 50주기를 맞아 출간되는 열린책들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리스인 조르바』 외에도 데뷔작 「뱀과 백합」, 카잔차키스 문학의 사상적 토대가 된 「신을 구하는 자」 등 초기 작품을 비롯하여 완숙한 작가적 경력을 보여 주는 『최후의 유혹』 등 후기의 걸작,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현대시라고 일컬어지는 서사시 『오디세이아』, 희곡, 여행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문학 전반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전집이라 할 수 있다.

왜 니코스 카잔차키스인가?
1957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카뮈는 카잔차키스야말로 자신보다 백번은 더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며 그의 죽음으로 정말 위대한 예술가를 잃었다고 애통해 했다.
슈바이처는 자신에게 깊은 감동을 준 이는 카잔차키스밖에 없었다고 했다.
콜린 윌슨은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비극이라고 했다.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이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존 스타인벡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로 카잔차키스를 꼽았다.
카잔차키스를 단숨에 읽었다는 마르탱 뒤 가르는 인간적이고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무엇 때문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소비에트 혁명과 공산주의 이념의 확산, 스페인 내전 등 굴곡 많은 20세기를 살아 낸 작가 카잔차키스. 그는 한 곳으로 편향된 시각이 아닌, 신과 인간, 정신과 육체, 삶과 죽음이라는 상반된 요소들을 절충하고 융합하는 영적 자유의 추구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인간상을 구현했다.

자유와 영적 구원을 위해 투쟁의 삶을 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문학과 삶
카잔차키스의 작품 세계와 예술 세계의 경지는 놀랍기도 하지만, 그가 살았던 삶의 다양성과 이를 통해 도달한 정신적 경지는 더욱 놀랍다. 그는 니체와 베르그송과 러시아 문학에 관한 논문을 쓰고, 불교에 심취하고, 호메로스와 단테와 괴테를 현대 그리스어로 번역할 정도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과 평범한 사람들도 알고 사랑해서, 그가 항상 가장 깊은 애정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스스로 선택한 방랑 생활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세계의 대부분을 여행했다. 그러나 그의 참된 정신적인 고향은 언제나 그가 태어난 크레타였으며, 그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이야기들, 농부들, 어부들, 술집 주인들, 시골 흥행사들을 카잔차키스가 처음 알게 된 곳도 크레타였다. 낙소스 섬으로 피난 간 어린 카잔차키스는 프란체스코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배우며 처음 서양 사상을 접했다. 행동에 대한 욕구와 고행자적인 은둔 의식 사이에서 항상 갈등하던 카잔차키스가 지칠 줄 모르고 그의 참된 아버지, 참된 구세주, 그리고 그와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를 추구하게 된 데는 이런 유년기의 경험들이 큰 역할을 했다.
옛 수도원들이 많기도 하고, 여자들뿐 아니라 암소나 암탉 따위 모든 암컷을 배척하기로 이름난 아토스 산에서 청년 카잔차키스는 여섯 달 동안 영혼과 육체의 수련을 통해 구세주와 직접 접촉하려 노력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잠시 니체와의 유대를 새롭게 하려 하다가 불교에 빠졌으며, 다음에는 불교에서 레닌으로, 그러고는 레닌에서 오디세우스로 옮겨 갔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에게로 귀착하게 된다. 과거의 모든 과정이 그리스도 안에 풍요롭게 열매 맺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유를 명분으로 내세운 격렬한 혁명의 유혹에 직면했고, 행동하는 삶에 대한 욕망에 이끌렸던 그는 행동과 명상 사이의 갈등을 가장 큰 주제로 다룬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불후의 작품을 남긴다.
이리하여 50이라는 나이에 그는 조이스처럼 그의 민족이 지닌, 창조하지 않은 의식을 만들어 내는, 상상력의 사제가 되려는, 스스로 유일한 의무라고 간주했던 사명에다 모든 정력을 바쳤다. 그는 자신의 내면세계에 동양의 단순성과 감정의 짙은 표현력을 그대로 간직하는 한편, 세련된 서양의 사상을 맞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대서사시 『오디세이아』가 탄생한다. 얼마 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또 그다음에 발발한 그리스 내전을 겪으며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때문에 망명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프랑스에 정착한 뒤로는 모든 정력을 창작에 바쳤다. 이때 완성한 작품이『수난』, 『최후의 유혹』, 『성자 프란체스코』이다.
7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유럽 전역에 이름이 알려졌고, 그의 소설들은 30개국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1952년에는 한 표 차이로 노벨 문학상을 놓쳤다. 오디세우스와 마찬가지로 카잔차키스는 세상을 경험하려는, 불굴의 열정을 지닌 이 시대의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도스또예프스끼, E. M. 포스터, 프로이트 전집에 이은 또 하나의 프로젝트!
1986년 러시아 문학을 소개하기 시작한 이래 세계 문학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국내에 소개해 온 문학 출판의 대표 브랜드 열린책들이 또 한 번 한국 독자들에게 마련한 선물 같은 문학 전집,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이 전집은 2000년 기획된 이래 9년여에 걸친 번역자와 편집자의 땀이 맺혀 있는 프로젝트다.
우선 그리스어 원전을 번역하느냐 영어판을 중역하느냐를 결정해야 했다. 국내 그리스어 번역가의 층이 두텁지 않다는 현실적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다 영어판 작품의 상당수가 그 정확성과 신뢰도를 인정받은 카잔차키스의 전문가들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점에 용기를 얻어 영어 판본의 중역을 선택할 수 있었다(영역자 가운데 『오디세이아』와 「신을 구하는 자」를 번역한 키먼 프라이어는 아예 6개월간 카잔차키스와 함께 작업했으며, 카잔차키스의 작품을 여럿 번역한 A. 덴 둘라르트와 테오도라 바실스, 피터 빈 역시 카잔차키스의 전문가로 명망이 높은 번역가들이다. 책의 말미에는 이들의 해설을 실어 카잔차키스의 심원한 문학세계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도록 했다).
다음으로는 영역되어 있는 작품 목록을 작성하여 여기저기에 낱권으로 흩어져 있는 책들을 모았다. 이 전집 목록은 영역되지 않은 짧은 희곡 몇 편을 제외한 카잔차키스 문학 전체를 망라하는 것이며, 추가로 카잔차키스의 아내 엘레니 카잔차키가 남편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엮은 『카잔차키스의 편지』를 더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작가로서의 카잔차키스와 인간으로서의 카잔차키스의 모습을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번역자 선정에 있어서도 원작의 가치를 최대한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좋은 번역으로 정평이 나 있었음에도 『그리스인 조르바』를 제외하고는 모두 절판되어 빛을 보지 못했던 이윤기, 안정효 두 번역가의 원고 6종은 다시 한 번 검토를 거친 끝에 새로이 거듭났고, 나머지 15종 역시 국내 최정상의 번역가들의 손에서 카잔차키스의 숨결과 한국어의 맛을 동시에 살려낸 작품들로 태어났다. 이후 이 원고들은 5년에 걸친 꼼꼼한 원서 대조와 교정교열, 번역가와 편집자의 논의를 거쳐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비극이다.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이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콜린 윌슨
카잔차키스처럼 나에게 감동을 준 이는 내 생애에 없다. 그의 작품은 깊고, 지니는 가치는 이중적이다. 이 세상에서 그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생산하고 갔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카잔차키스야말로 나보다 백번은 더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잃었다.
알베르 카뮈
부드럽고 정교하면서도 강하고 극적인 힘을 보여 주는, 의심할 여지 없이 높은 예술적 경지에 도달한 작품이다.
토마스 만
엄청난 집중력과 흥미진진함 속에서 단숨에 읽고야 말았다. 그의 작품은 격렬하게 요동치면서 마음을 심난하게 만드는 한편, 지극히 인간적이어서 감동을 준다.
마르탬 뒤 가르
카잔차키스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이다.
존 스타인벡
무지개처럼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상상력, 번뜩이는 역설과 시, 고뇌와 즐거움에 완전히 매료된다.
타임
끓어오르는 활력과 열정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통찰력,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새터데이 리뷰

회원리뷰 (5건) 리뷰 총점8.0

혜택 및 유의사항?
내가 찾던거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ulzun | 2013.01.31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이 소설이 대단하다는 건, 당시 교황청에서 금서로 때렸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읽다보면 이게 왜 금서인지 알 수가 없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야 말로 진짜 신앙인인데 말이다.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세레자 요한을 만나 불을 휘두르기 전의, 오직 사랑만을 전하던 예수가 더 좋다. 가리옷 사람 유다에 대한 해석도 좋았다. 안정효씨가 그리스어 원서를
리뷰제목

이 소설이 대단하다는 건, 당시 교황청에서 금서로 때렸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읽다보면 이게 왜 금서인지 알 수가 없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야 말로 진짜 신앙인인데 말이다.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세레자 요한을 만나 불을 휘두르기 전의, 오직 사랑만을 전하던 예수가 더 좋다.

가리옷 사람 유다에 대한 해석도 좋았다.

안정효씨가 그리스어 원서를 직역해서 그런지..

의도적으로 어색하게 번역한 느낌도 있는데, 그 점도 좋다.

 

끝으로 카잔차키스의 간지나는 묘비명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댓글 0 이 리뷰가 도움이 되었나요? 공감 0
포토리뷰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 1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Raphael | 2011.04.02 | 추천4 | 댓글0 리뷰제목
그리스도최후의유혹1
Faith : not wanting to know what is true,        F. Nietzsche. 언제나 얘기하기 어려운 것이 종교에 관련된 얘기다. 어떤 얘기도 사람들의 마음 속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인냥 사람들은 쉽게 흥분해서 반박하는 것을 종종 경험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의심도 회의도 오해도 어떤 면에서는 각자의 몫이며 같이 나눌수 있는 부분이다. 그것이 하나의 과정이 될
리뷰제목

Faith : not wanting to know what is true,        F. Nietzsche.


언제나 얘기하기 어려운 것이 종교에 관련된 얘기다. 어떤 얘기도 사람들의 마음 속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인냥 사람들은 쉽게 흥분해서 반박하는 것을 종종 경험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의심도 회의도 오해도 어떤 면에서는 각자의 몫이며 같이 나눌수 있는 부분이다. 그것이 하나의 과정이 될수도 막다른 길이 될수도 있는 것이며, 어떤 이성적인 회의를 거치지 않는다면, 종교도 하나의 독트린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구약의 4천년, 그리고 신약의 2천년만큼이나, 신앙 자체에 대해 오래된 의문들과 의심들과 만나 씨름을 해왔고,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의 때가 묻어왔다. 


개인적으론, 이성적 의심(회의)를 통하여 눈먼 믿음에서 깨어날 수 있음을 경험했고, 성경 속의 인물들에 대해, 그들이 겪었을 인간적인 고뇌에 대해 공감함으로써, 그들이 더 가깝게 다가왔었다. 결국 의심이란 것도,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광야로 이끄는 유혹이였으며, 성경 속의 인물들에게 인간적인 면을 더 공감한다는 것은 내가 그 안에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눈뜨게 해준 또 다른 여정이였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빛과 어둠이 있듯이, 사랑과 미움도, 광야와 낙원도, 하느님과 유혹도, 믿음과 의심도 함께 공존함을 깨달아왔던 것 같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그런 면에서 조금은 특별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선 하느님의 신성이, 사람의 모습을 통하여, 다시 죽음과 부활할때까지 사람의 모습을 취할 뿐, 내면의 신성을 놓치진 않는다. 미사 시간에 신부님이 포도주와 물을 섞는 이유는 신성과 인성의 합이요, 아래의 예수님을 그린 이콘에서의 붉은 속옷(신성)에 파란 겉옷(인성)을 입은 것도 그런 의미라는 데 (성인이나 사도, 성모 마리아의 경우는 파란 속옷에 빨간 겉옷을 입었다. 인성에 신성을 더한 모습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의 인성은 사람의 모습으로서일 뿐이다. 사람들은 예수가 땀와 피범벅이 되어 무거운 십자가를 들고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갈때의 고통에 대해서 얘기 할 때도 예수가 그 동안 겪었을 내면의 고뇌보다는, 인간의 몸으로써 감내하기 어려운 그 한계를 넘어선 고통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렇기에, 카잔차키스가 이 소설에서 자신의 신성을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가정하고, 조금씩 신성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은 위험하고도 즐거운 실험이였다. 소설은 신약의 4대 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와 사도행전의 바오로의 이야기를, 예수가 서른이 될 무렵 그 안의 신성이 조금씩 깨어나는 모습에서부터,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며 부르짓으며 숨을 거둘 때까지를 그리고 있다.


소설 속에 예수는 로마로부터 유대인들을 해방하고자 했던 메시아라고 불리는 유대인들이 처형당할때 쓰는 십자가를 만드는 목수이다. 예수는 여인과 결혼하여 인간적인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할때 마다, 하느님의 힘에 의해, 거부당한 경험이 있다. 그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는 그와의 사랑이 이루어 지지 않아 창녀가 되었고, 예수는 비록 창녀이지만, 막달라가 창녀가 된 것은 자기 때문이기에 그녀를 구하고 결혼하여 그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 인간적인 삶을 더 원하기에 예수는 그에게서 깨어나는 신성과, 하느님의 손길을 거부하기 위해 하느님이 그를 싫어하게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모든 유대인이 거부한 십자가 만들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서 신성이 눈뜰 때, 하느님을 찾기 위해 그리고 성자가 되기 위해 사막의 수도원으로 가지만, 그의 여정은 혼돈과 회의와 두려움이 섞여 있다. 그의 깨어난 신성은 사막에서의 외로움과 배고픔과 고통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해 하지만, 그의 인성은 자신이 부당한 처우를 받는다는 느낌을 준다. 심지어 그는 ‘어디로 가느냐’는 길에서 만난 야고보의 질문에 성자(saint)가 되기 위해 수도원으로 간다는 말을 창피해서 하지 못한다. 그의 여정 속에서 그 안의 하느님의 부르심 또한 그에게는 확실하지가 않고 사막으로 가는 길 가운데 만난 막달라 마리아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그의 인성은 그녀에게 머물기를, 그의 신성은 그녀에게서 떠나야함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한번 깨어난 그의 신성과 인성의 갈등 속에서, 성자(Son of God)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성경에는 사도들 중에서 베드로와 바오로외에는 인간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질 않는데, 카잔차키스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까지, 예수가 그들을 하나 하나 만나가면서 그 만남에서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유다 이스카리옷에 대해선 예수를 배반한 제자가 아닌 예수의 수난을 예수의 지시에 의해 도와주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유다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하기 위해 어떠한 폭력적 수단을 감행할수 있는 사람으로 그려지며, 그는 지난 시간 이스라엘 해방을 위해 싸웠던, 메시아라 여겨져서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아들들의 어머니들에게 십자가를 만들었던 예수를 죽이겠다고 맹세하고 예수를 죽이려고 찾던 중 예수를 만난다. 예수를 죽이러 온 유다는 예수와의 대화에서 그가 이미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음을 알고, 예수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동해서 로마에 대항하게끔 한다면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마음을 바꾼다.  


예수는 요한 복음에서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기 직전의 이야기에서부터, 성자의 모습을 극적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다시 사막으로의 고행을 떠나는 데 (성경에는 예수의 40일간의 광야에서의 악마로부터의 세 가지 유혹에 관련된 것이지만), 사막의 심연의 밤, 여전히 막달라 마리아하고의 인간적인 삶의 행복에 대한 미련이 그의 기억 속에 살아 유혹하나, 그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이를 이겨낸다. 성경 속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리는 수난 직전의 밤,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려 기도를 한다.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데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카잔차키스는 아마도 이 간절한 기도 속에서 예수의 인성을 읽어낸 것일까? 성경 속에서의 겟세마니에서의 수난을 받아들이는 예수처럼, 카잔차키스의 예수는 사막에서 자신의 신성을 받아들이고 성부가 준 그 길을 가는 것이 견딜수 없는 외로운 고뇌의 길임을 알면서도 그의 신성을 사막의 모래위에 눈물을 흘리며 받아들인다. 내면의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죽고, 다시 성자(Son of God) 로서의 예수가 태어나는 순간을 생각했던 것 같다. 


- 하권으로 이어집니다.


              

그림은 러시아 화가 폴레노프의 그림이다. 렘브란트의 그림도 있지만, 이 그림이 대낮의 소동에 대해 더 사실적인 듯한 인상을 준다. 화가는 가급적이면 예수를 인간적으로 그려낼려고 했단다. 햇빛에 얼굴이 그을린듯한, 왼쪽의 막대를 쥔이가 예수이다. 아마도 화가는 요한 복음에 손각락으로 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계셨다는 얘기에 충실했던 것 같다. 왼쪽은 예수님과 사람들이 갑작스레 일어난 오른쪽의 소동에 대해 놀란 듯 이제 막 시선을 돌린 듯 하다. 뒤쪽 먼곳에 있는 사람들도 이제 막 몰려온 듯한 오른쪽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듯하며, 오른쪽에 몰려온 이들 중에는 멀이서 막대를 치켜든 이도 있고, 잡혀온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 몸의 중심이 뒤로 가 있어, 끌려가지 않으려 함을 알수 있다. 누가 봐도 그들은 분도에 사로 잡혀 있다. 율법에 의하면 그녀는 돌에 맞아 죽어야 했다. 그것을 손가락질 하고 있는 사람이 왼손으로는 여인을 오른손으로는 땅위의 돌을 가리키고 있다. 처참한 죽음에 앞선...여인...사람들은 예수의 율법에 관한 시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율법을 따르기 보단, 너희들 가운데 죄없는 자가 저 여자에게 돌을 먼저 던지라고 말한다. 그러자 나이 많은 이들 부터 하나 둘씩 떠난다고 한다...
모두 떠나자 예수도 말한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율법을 지키는 것 보다, 예수는 용서를 가르쳐 주었다.

댓글 0 4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4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zommer | 2008.07.23 | 추천1 | 댓글0 리뷰제목
왜곡되지 않는 역사는 없다. 역사는 누군가에 의해 구전되고 기록된다. 누군가가 사실을 기록하면 그 사실은 역사가 된다. 그리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 역사는 누군가에 의해 해석되고, 검증되고, 판단된다.   그 때 그 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단 기록이 있을 뿐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리뷰제목

왜곡되지 않는 역사는 없다.

역사는 누군가에 의해 구전되고 기록된다.

누군가가 사실을 기록하면 그 사실은 역사가 된다.

그리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 역사는 누군가에 의해 해석되고, 검증되고,

판단된다.

 

그 때 그 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단 기록이 있을 뿐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태초에 logos가 있었다.

기록은 logos에 의해 쓰여지고, 역사가 된다.

우리는 logos로 세상을 보고, 듣고, 느낀다. 그리고 표현한다.

우리는 logos를 믿고, logos로 인해 현혹되고, 자신을 속이고, 타인도 속인다.

 

그 옛날,

저스는 logos를 믿었다. 그리고 logos로 살고자 했다.

누군가는 그를 logos라고 생각했고, 어떤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또 다른 logos를 만들었다.

광야에서 40일간의 고행, 죽은 라자로를 불러내고, 부활했다.

그는 사회 소외 계층인 어부를, 목동을, 세리를 모았다.

 

명박은 logos를 믿었다. 그는 logos가 됐다.

누군가는 그를 logos로 만들었지만, 어떤 이들은 그를 logos로 믿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logos임을 증명하기 위해 아메리카에서 병든 소고기를 가져왔고,

물대포를 쐈다.

그는 청와대 뒷동산에서 2시간의 고행을 했다고 한다.

누구도 보지 못했으나 그는 스스로 그렇게 기록 했다.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강남 부자와 고대 동문을 모았다.

 

누군가는 십자가에 못박혀 철저히 logos임을 증명했으나

어떤 이는 자신을 추종하지 않는 이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자신이 logos임 증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스스로 logos의 유혹에 빠졌다. 

그리고 logos가 되려고 했다.

혹자는 그들을 logos라고 하고, 어떤 이는 아니라고 한다.


(출처 : 사람이 쓰는 문화 이야기 - 싸이월드 페이퍼)

댓글 0 1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1
윙배너 펼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