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니, 대개 제목을 듣고는 무슨 제목이 그러냐며 소스라치며 놀랍니다. 제목과 달리 아름다운 벚꽃이 만개한 표지에 또 놀라고요. 일본서점대상 2위는 물론이고 2016년 일본 소설계를 휩쓴 작품답게 소개 문구도 화려하죠. 췌장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소녀와 책에 파묻힌 채 외톨이로 지내는 소년의 흔한 청춘 로맨스가 아닐까 의심했는데, 끝까지 읽고 나면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색안경을 내려 놓게 됩니다. 왜 일본에서 80만부 가까이 판매되고 만화와 영화로도 제작될 만큼 화제가 됐는지, 저마다 이유를 다를 수 있지만 읽어 보시면 여러분도 저처럼 끄덕이실 겁니다.
벚꽃이 휘날리는 4월, OOO군은 우연히 병원에서 발견한 공책 한 권 때문에 사쿠라의 병을 알게 되고, 둘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합니다. 이름이 없었던 소년과 일상이 없어질 소녀는 이제껏 걸어온 길의 정반대의 삶도 있다는 걸 서로 배우고, 서로가 서로에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죠. 산다는 건 “나 아닌 누군가와 마음이 통하는 것”이라면서 이들은 서로의 존재로 인해 무엇이 삶인지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다는 고백은 그들에게 어떤 말보다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함민복의 시 〈봄비〉에 이런 구절이 있는데요.
꽃 피는 것 보면 알지 그리운 얼굴 먼저 떠오르지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리고 나라가 시끄러워도 기어이 꽃이 피는 계절, 이 책과 함께 언젠가 우리가 통과해온 찬란한 청춘의 순간으로 떠나 보세요. 그리운 얼굴들이 새록새록 떠오를 겝니다. 감성이란 게 폭발합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어떻게 되긴? 내 공병문고야. 읽어봤으니까 알잖아, 췌장 병을 선고받고 일기처럼 쓰고 있다는 거.” “농담이지?” 그녀는 병원 안인데도 거리낌 없이 우와하핫 하고 웃었다. “내가 그렇게 악취미로 보여? 그런 건 블랙조크도 안 돼. 거기 쓴 거, 다 사실이야. 내 췌장이 망가져서 이제 얼마 뒤에 죽는다네요, 네.” “아, 그래?” “헉, 겨우 그거뿐? 뭔가 좀 다른 말, 없어?” 그녀는 천만뜻밖이라는 듯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클래스메이트에게서 이제 곧 죽는다는 말을 들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흠, 나라면 할 말을 잃을 것 같네.” “그렇지. 내가 침묵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해주기를 바란다.” 그녀는 “하긴 그렇다”라고 말하면서 킥킥 웃었다. 그녀가 뭘 우스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 p.29
“나는 화장(火葬)은 싫어.” 나름대로 즐겁게 숯불고기를 먹고 있는데 그녀가 명백히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화제를 꺼냈다. “뭐라고?” 잘못 들었을 가능성도 있어서 일단 확인했더니 그녀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되풀이했다. “화장은 싫다니까. 죽은 뒤에 불에 구워지는 건 좀 그렇잖아?” “그게 고기 구우면서 할 얘기야?” “이 세상에서 진짜로 없어져버리는 것 같아. 다들 먹어준다거나 하는 건 좀 어렵겠지?” “고기 먹으면서 사체 처리 얘기는 하지 말자.” “췌장은 네가 먹어도 좋아.” “내 얘기 듣고 있어?” --- p.37
“글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를테면 비밀을 알고 있는 클래스메이트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없지는 않다, 라고 할까.” “근데 지금 그걸 안 하고 있잖아. 너나 나나 어쩌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는 너나 나나 다를 거 없어, 아마도. 하루의 가치는 전부 똑같은 거라서 무엇을 했느냐의 차이 같은 걸로 나의 오늘의 가치는 바뀌지 않아. 나는 오늘, 즐거웠어.” --- p.20
“아니, 우연이 아냐. 우리는 모두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너와 내가 같은 반인 것도, 그날 병원에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야. 그렇다고 운명 같은 것도 아니야. 네가 여태껏 해온 선택과 내가 여태껏 해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했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난 거야.” _ 분문 196쪽
“산다는 것은…….” “…….” “아마도 나 아닌 누군가와 서로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 그걸 가리켜 산다는 것이라고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