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시어머니의 물건을 며느리가 함부로 처분해도 될지 망설이는 나를 대신해, 남은 물건을 전부 처분해 준 언니에게는 정말 고마워하고 있답니다. 그때 딸들에게는 절대 이런 고충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정도예요. 우리가 온갖 물건들로 가득 찬 이 오래된 집에서 계속 산다면, 언젠가 그 처분은 딸들의 몫이 되겠지요. --- p.16
모던한 패션에, 새빨간 립스틱. 꽤 시선을 끄는 스타일이지만 사실 저는 내향적이라, 눈에 띄는 차림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에요. 다만, 굳이 이 나이가 되어서까지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뭐라던 무슨 상관이야, 나만 즐거우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했어요. 백발이 되어 새로운 멋을 알게 되다니. 나이를 먹고 나서야 즐길 수 있는 일도 있다는 걸 깨달았답니다. --- p.100
이런 식으로 매일의 식사를 간단하고, 부담 없이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은 bon이 ‘아무거나 좋다’고 말해 준 덕분이에요. 만약 매 끼니마다 제대로 차린 음식이 아니면 싫다는 남편이었다면, 이런 식의 간단한 식사는 꿈도 꾸지 못했을 거예요. 젊은 시절 몹시 가난했던 우리의 마음속 밑바닥에는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뭐든지 좋다’는 생각이 있지 않나 싶어요. --- p.155
그렇게 산책 겸 쇼핑을 하면서 두 사람이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두 사람 모두 그다지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어서, 대화라고 해야 ‘오늘은 덥다’거나 ‘이걸 살까’ 하는 정도랍니다.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는 부부를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해요. 분명 어느 한쪽이, 아니면 양쪽 모두 말하기를 좋아는 것이겠지요. 우리 부부는 묵묵히 걸을 뿐이지만, 굳이 대화가 없어도 옆에 있으면 안심이 되고,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즐겁고, 편안해요. 세상에는 여러 부부가 있고, 저마다 다른 모습일 거라 생각합니다. --- p.175
고양이는 신기한 동물로, 평소에는 제멋대로인데다가 말도 잘 듣지 않으면서도 내가 우울해하거나 울고 있으면 어느덧 가까이 다가와 가만히 지켜보곤 한답니다. 그런 고양이의 무심한 듯한 따뜻함에 지금까지 몇 번이나 위로를 받았는지 몰라요. 지금 키우는 고양이는 벌써 11년째 함께하고 있는데, 마치 나에 대해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어요. 게다가 이렇게 귀여운 대상이 있으면 부부 두 사람의 대화도 늘어나요. 고양이를 위해 청소를 하는 면도 있고, 사료나 배변 처리도 신경 써야 해요. 속박이 없는 생활에 느슨하고도 적당한 리듬을 주는 존재랍니다. --- p.183
본래 우리는 서로에게 없는 면에 끌려 좋아하게 되었어요. bon은 ‘pon의 결단력은 놀라워. 생각이 자유롭고, 추진력도 뛰어나’라고 생각하고, pon은 ‘bon의 온화한 인품에 항상 의지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다르기 때문에 함께 있어 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껴요. 잘하는 분야도 달라요. 그래서 둘이 함께할 때 비로소 완전해진답니다. 서로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홀로 남게 되었을 때의 두려움은 늘 따라다녀요. 두 사람 모두 한쪽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기에 실감하는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어쨌거나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어요. 그래서 항상 오늘을 소중히 하자고 생각합니다. --- p.205
이제는 퇴직한 상태인데, 아무러면 어떻습니까? 퇴직하고 나니 정말 사회라든가 회사와 엮인 세상, 고객과의 관계는 사라져 버렸어요.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 이런 행동은 불가능하다’는 속박도 완전히 사라지고, ‘내일은 절대로 늦잠을 자서는 안 돼’라는 제약도 없어요. 게다가 사는 장소가 바뀌니 정말 삶을 리셋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것을 해도 괜찮아요. 빨간 양말도 괜찮아요. 조금 부끄럽지만, 아내와 함께라 좋습니다. --- p.235
그리고 내일 당장 어떤 일이 생길지 우리는 몰라요. 지금 느끼는 매일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잃은 후에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플까요. 그래서 지금을 소중히 하고 싶어요. 우리 자신을 위해 늘 겸허한 마음으로, 항상 웃으며, 즐겁게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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