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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의 교토

한 달의 교토

: 디지털 노마드 번역가의 교토 한 달 살기

일본에서 한 달 살기 시리즈-02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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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2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88쪽 | 448g | 140*205*18mm
ISBN13 9791187316589
ISBN10 118731658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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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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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이 끝나고 다실에서 나가려는데 여전히 다리가 엄청나게 저렸다. 아까 의자에 앉지 않고 버텼더라면 정말 집에 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고통을 호소하며 선생님께 “스미마셍!”을 외쳤다. 고운 하늘색 기모노를 입은 젊고 귀여운 선생님은 괜찮으니 다리가 풀리면 천천히 가라며 프로페셔널한 관광객 영업용 미소를 보여주셨다. 역시 당신은 베테랑! 잠시 다리를 풀린 뒤에 다실을 나섰다.
--- p.49

날씨는 좋고, 벚꽃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는 헤이안 신궁 앞에서 맥주를 마신다. 그래, 이것이 바로 ‘교토 한 달 살기’ 타이틀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그림이다. 그 순간의 행복한 기분과 책에 쓸 거리가 생겼다는 만족감을 한 번에 느꼈다. 한편으로는 이 좋은 순간에 혼자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트위터에 사진을 올렸지만 지금 내가 마시는 맥주와 호르몬의 맛과 지금 부는 바람의 느낌과 경치를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다는 생각에 조금 서글퍼졌다.
--- p.63

번역 프로그램을 켜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일을 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게츠교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벚꽃을 감상하기도 했다. 도게츠교를 오가는 사람들도 구경했다.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일을 조금 하고 있자니, 어쩐지 이 상황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들의 별장지, 아름다운 아라시야마의 세련된 카페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번역일이라니. 어떤 드라마나 소설 속 한 장면 같네. 이것이 바로 디지털 노마드인가?
--- p.89

생각해보면 내 직업은 참 편리하다. 직장에 다녔다면 한 달 살기를 이렇게 쉽게 떠날 수 없었겠지. 물리적으로는 오로지 혼자 일하는 직업이니 훌쩍 떠나올 수 있었다. 인터넷이 가능하고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 사실 그렇기에 이 한 달의 교토는 ‘한 달 휴양’이 아닌 ‘한 달 살기’가 될 수 있었다. 온전히 교토에서 살면서 일까지 해야 하니까.
--- p.93

메일이 한 통 왔다. 나와 거래하는 번역회사 PM(프로젝트 매니저)의 절규였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것 좀 지금! 당장! 번역해줘!’ 어쩔 수 없이 기념품 가게에서 노트북을 펼쳐 PM이 보내준 파일을 번역했다. 그렇다. 노트북을 들고 다녔다. 무거웠다. 정신없이 번역하고 무사히 납품했더니 또 다른 PM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거! 오늘 밤 10시까지!’ 프리랜서의 애환이란 이런 걸까? 말이 좋아서 디지털 노마드지, 에도 막부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역사적인 니조성의 기념품 가게에서 노트북을 펴고 번역일을 하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 p.106

표지판을 읽어보고 검색을 해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바위는 사랑의 바위였다. 10m 정도 떨어진 맞은편에 똑같은 바위가 하나 더 있는데, 그 바위에서 눈을 감고 이 바위까지 무사히 걸어와 바위를 터치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단다. ‘청춘이구나, 좋다’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나이 지긋해 보이는 아저씨가 눈을 감고 바위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노년기의 사랑을 기원하는 걸까? 역시 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군!
--- p.145

넓고 여유로운 히가시혼간지 경내를 걸었다. 커다란 고에이도와 아미타도가 있는 넓은 경내에서는 교토 타워가 잘 보이는데, 이게 참 재미있다. 절대 최신식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낡은 현대와 웅장한 사찰이 함께하는 교토의 풍경을 즐길 수 있다. 그 풍경을 담은 사진을 찍느라 혼자 열심히 구도를 연구하며 넓은 경내를 방황했다.
--- p.200

사진 촬영만 해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한 뒤, 멀찍이 혼노지의 사진만 찍고 다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역시 정기권을 사길 잘했다. 그리고 혼노지는 다음에 만나야겠다. 집으로 가까워지는 버스 창 너머로 다시 히가지혼간지가 보였다. 그 순간에도 교토역 앞 커다란 사거리에서 히가시혼간지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Life is living you.
--- p.201

금각사를 둘러보다가 갑자기 떠오른 의문. 물론 문학소녀가 아니기에 소설과는 관계가 없는 궁금증이었다.‘저거 다 순금일까?’ 문득 18K나 14K는 사용되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14K라면 내구성이 더 좋을 것 같은데….
--- p.210

교토 여행 내내 ‘Dobby is free’라는 글자가 프린트된 에코백을 들고 다녔는데 교토까지 와서 일하는 걸 보면 난 자유가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일을 해야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도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 p.216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지로 발길을 돌릴 때 했다고 전해지는 말.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 이 말은 지금도 일본에서 ‘다른 일을 하는 척하다가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주군인 노부나가를 배신한 이유로는 수많은 추측과 설이 있다.
--- p.217

교토역에 비해 작고 한적한 오쓰역에 내렸다. 하늘이 어두컴컴해서 곧 비가 쏟아질 거 같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미리 알아 둔 정류장에서 호텔 셔틀버스를 탔다. 그리고 그 버스 안에서 호텔을 예약했다. 호텔 셔틀버스 안에서 호텔을 예약하다니.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즉흥적이고 나 자신이 멋있어 보였다. (정말 왜 멋있어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쩜 이리 무계획인지!
--- p.231

방으로 돌아와 다시 일을 하고, 테라스에서 깜깜해지는 비와코 호수를 바라보았다. 마침 분수 쇼를 하고 있었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비와코의 멋진 분수 쇼를 바라보았다. 순간, 멋진 사진 속 주인공이 된 거 같았다. 그리고 새삼 일과 돈의 소중함을 느꼈다. 번역가가 되기로 결심하지 않았더라면,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한 달 살기를 안 했더라면 내가 시가의 비와코까지 와서 호캉스를 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호텔에서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도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 p.235

그 시대에는 여자아이에게 일본의 글자인 가나와 와카(시의 한 종류) 정도만 가르쳤다고 하며 한자는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는데, 무라사키 시키부의 아버지는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한자까지 가르쳤다. 이후에는 시와 글쓰기 등으로 재능을 인정받아 일왕의 부인을 가정교사처럼 시중드는 궁녀로 일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궁전 최 상궁 정도였을까?
--- p.241

4월 초 철학의 길은 벚꽃과 함께였는데, 5월 초 철학의 길은 햇빛 반짝이는 선명한 초록 잎사귀로 가득했다. 바닥에는 코모레비의 흔적들이 잔뜩 생겼다. 코모레비(木漏れ日).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가리키는 일본어이다. 어쩐지 발음이 귀여워서 좋아하는 말이다. 코모레비 가득한 철학의 길을 천천히 걸었다.
--- p.257

금각은 화려한 금으로 자신을 뽐냈다. 하지만 은각은 아무런 치장이 없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참 고고했다. 이런 비유가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금각이 아름답고 세련된 최신 디자인의 옷을 입은 사람이라면, 은각은 마치 무심하게 아무거나 걸쳤는데도 기품이 느껴지는 사람 같았다.
--- p.261

가게 안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펼쳤다. 점심을 먹지 않았기에 피자 토스트를 시키고 번역일을 시작했다. 피자 토스트가 무척 맛있어서 프렌치토스트까지 시켜보았는데 역시 맛있었다. 하천 흐르는 소리가 섞인 카페 음악을 들으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봄 향기를 맡으며… 일이라니! 어쩐지 교토를 떠나기 아쉬워지는 멋진 오후였다.
--- p.272

열심히 일하고 집으로 향하면서 새삼 4월과 5월 사이의 변화를 떠올렸다. 너무나도 추워서 따뜻한 커피만 찾았는데 한 달 사이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되었고, 벚꽃은 모두 지고 초록 잎들로 가득해졌다. 이렇게 봄이 꽃피다가 여름으로 들어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교토가 서서히 봄을 맞이하는 한 달간의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 교토의 봄 한 조각을 오롯이 가지게 된 기분이 들었다.
--- p.273

도대체 어떻게 1000년이나 계속 장사를 할 수 있었을까? 아 참, 맞은편의 카자리야도 에도시대부터 영업해온 4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가게였다. 다른 곳에서는 2, 3백 년도 굉장한데, 교토에는 워낙 오래된 가게들이 많아서 1, 2백 년 가지고는 담담할 정도다. 게다가 이치몬지야 와스케는 1000년 된 가게라고 하니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p.278

아마 다시 교토에 간다고 해도 벚꽃이 만발하고, 버스정류장에서 날마다 잉어를 구경하던 2019년 4월의 그 느낌을 온전히 되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 그 시간 속 내가 경험한 교토는 오로지 내 심연의 깊은 기억으로만 자세히 남아 있다. 이 책 『한 달의 교토』에는 그 빛나는 조각들이 담겨있다. 독자들과 책을 통해 교토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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