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두 가지 차원에서 ‘탄소 사회’를 규정한다. 한편으로, 탄소 사회란 탄소 자본주의의 논리와 작동방식을 깊이 내면화한 고탄소 사회체제를 뜻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탄소 사회는 생산, 소비, 그리고 인간의 내밀한 의식까지 지배하는 달콤한 중독의 체제다.
다른 한편으로, 탄소 사회란 탄소 자본주의에서 파생된 불평등이 전 지구적으로 그리고 한 나라 내에서 깊이 뿌리내린 사회 현실을 뜻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탄소 사회는 팍팍한 고통의 체제다. 달콤한 중독과 팍팍한 고통, 이러한 이중적 탄소 사회와 단절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기후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생긴다. 인권은 그런 길을 찾을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한다.
--- 「들어가며」 중에서
여론조사에서 기후행동에 대해 일반적인 평가를 물으면 높은 지지도가 나오곤 한다. 그러나 비용을 부담하고 불편을 감수하면서라도 온실가스를 줄일 의향이 있는지를 물으면 그때부터 답변이 달라진다. 기후변화를 환경과 생태를 살리는 문제라기보다 자신에게 직접 피해를 주는 문제로 보는 경우도 많다. ‘내가 경제적, 물질적 손실을 입을지’ ‘나와 가족이 건강할지’ ‘내 자식의 미래가 괜찮을지’에 관한 문제로 기후변화를 바라본다.
--- pp.36~37, 1부 「불편한 진실과 더 불편한 현실: 어떤 성격의 위기인가」 중에서
이런 사례들로부터 기후변화라는 ‘자연적’ 현상조차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즉 기후변화가 젠더, 인종, 계급, 지역 등의 차별 구조를 개별적으로 그리고/또는 교차적으로 악화, 재생산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자연과학적으로 정의된 하나의 기후변화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수많은 ‘기후변화들’이 있다. 보편적으로 설명되는 기후위기가 아니라 사회적 배태성에 따른 다양한 ‘기후위기들’이 있다. 그러므로 공통된 기후대책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특유한 ‘기후대책들’이 있어야 한다.
--- pp.46~47, 1부 「불편한 진실과 더 불편한 현실: 어떤 성격의 위기인가」 중에서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면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기후위기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이 사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책임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장애물 때문에 기후행동이 제한되는지를 찾으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다.
--- p.92, 2부 「재난은 약자의 몫이 될 수 없다」 중에서
개도국 중에는 이처럼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유산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애초부터 불리하게 구조화된 경우가 많다. 모든 인류가 그 안에서 생존과 생활을 해나가는 지구의 대기는 인류의 ‘공통 관심 사안’이다. 그런데 인류의 16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인구를 가진 북반구 선진국들이 ‘대기의 식민화’를 통해 온실가스를 함부로 배출하면서 개도국들도 함께 사용해야 할 대기환경을 미리 선점해버린 것이다.
그러니 세계 모든 지역의 사회적 대비 상태, 재난 취약성, 회복력, 인프라 설비 등은 식민 지배 유산의 정도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난다. 그런데 1.5도니 2도니 하는 하나의 전 세계적 단일 목표를 정해놓고 그 수치가 초과되면 ‘전 세계’가 위험에 빠진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기술관료적 보편주의에 입각한 목표 달성 논리다.
--- p.99, 2부 「재난은 약자의 몫이 될 수 없다」 중에서
기후변화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냉담과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것보다 냉담과 무관심이 더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다(“기후변화? 난 상관 안 해”). 그런 것을 자신과 직접 이해관계가 없다고 여기는 ‘소극적 무관심’이 있고, 기후변화를 ‘웃기고 황당한 주제’로 간주하여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막아버리는 ‘공격적 무관심’도 있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기후변화를 공개적 논의의 테이블에 올리지도 못하게끔 만드는 어떤 문화적 장벽에다 냉담/무관심이 합해지면 기후행동의 가능성은 크게 낮아진다.
--- p.140, 2부 「재난은 약자의 몫이 될 수 없다」 중에서
기후변화는 과거 및 현재 세대가 지속불가능할 정도로 자원을 남용하고 온실가스를 과다 배출한 결과로 미래세대의 권리가 박탈당한 사태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후위기와 인권을 논할 때에 미래세대의 인권을 위한 현재세대의 의무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를 ‘세대 간 형평성’이라고 부른다. 미래세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먼 훗날의 인간만이 아니라 이미 태어난 자식, 손주들이 모두 포함된다.
--- p.184, 3부 「권리를 방패 삼아 위기에 맞서다」 중에서
한국의 청소년들도 2020년 봄, 정부의 소극적인 온실가스 정책 때문에 청소년들의 헌법적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이들은 주말 행동, 결석 시위, 관련 부서에 대한 요청과 서한 발송 등 많은 시도를 해보았지만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변화가 없음을 깨닫고 정부에 책임을 묻게 되었다고 한다. 정부와 정책결정권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겠다는 목표도 밝혔다.
청소년기후행동의 원고 19명은 한국 정부가 정한 감축목표와 실제 행동이 워낙 부실하여 헌법에서 보장한 “생명권과 행복추구권, 정상적인 환경에서 살아갈 환경권 등을 심각하게 훼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의 헌법소송은 전 세계 기후운동에서 주목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기후위기의 헌법적 기본권 침해, 국가의 책무성, 미래세대에 속하는 청소년들이 원고가 된 점, 정책을 변화시킬 목표 등 전략적 기후소송의 특성이 모두 들어 있는 소송이기 때문이다.
--- p.220, 3부 「권리를 방패 삼아 위기에 맞서다」 중에서
경제사회적 조건이 나빠져 사람들의 삶이 팍팍해질수록 정치적 선동, 메시아적 약속, 음모론, 가짜 뉴스, 혐오와 차별이 횡행할 수 있는 풍토가 늘어난다. 여성혐오, 외국인 혐오, 소수자 혐오, 특정 집단 혐오 등이 그럴듯한 ‘설명’의 외피를 걸치고 등장하여 소셜미디어를 통해 무차별 확산된다.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이런 현상들이 국내외에서 표출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극우 포퓰리즘과 유사 권위주의, 그리고 백인우월주의를 비롯한 극단주의 세력이 발호하기 시작하여 파시즘의 재등장을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증오의 불길은 세 요소로 이루어진다. ‘땔감’과 같은 증오 지지자들, ‘불꽃’을 지피는 선동형 지도자, ‘산소’ 역할을 하는 사회경제적 악조건, 이 세 요소가 만나 증오의 불길을 타오르게 한다. 사회적 응집력이 약해질수록 공기 중 산소가 많아진다. 폭력적 증오의 화염이 옮겨붙기 좋은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 p.240, 4부 「각자도생 사회를 넘어」 중에서
오늘 공정하지 않은 전환은 내일의 불공정한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그런 세상을 위해 사람들에게 기후행동에 나서자고 설득할 수는 없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전환은, ‘지금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덜 불평등하고 덜 부조리한 세계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과 결부될 때에만 정의로운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
--- p.262, 4부 「각자도생 사회를 넘어」 중에서
기후위기가 진정으로 ‘위기’가 되려면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그것을 ‘위기’로 간주해야만 한다. 하나의 기후위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기후위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의 최전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이미 생살여탈권을 지닌 현실인 반면, 위기의 후방에서 안락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후위기란 뉴스에 나오는 먼 나라 이야기?자신은 약간 불편한 정도에 그치는?에 불과하다.
--- p.303, 5부 「전환을 위한 여섯 가지 제언」 중에서
이제 인간만의 인권, 인간 중심적인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를 쓰기 어렵게 되었다. 비인간 자연계에 대한 침해와 인간에 대한 침해가 함께 일어나는 ‘이익 침해의 융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순수한 의미에서 ‘인간’만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즉, 인간과 자연환경의 이익 침해가 하나로 수렴되었고, 반대로 인간과 자연환경이 ‘권리’를 보유함으로써 파생되는 효과를 공동으로 향유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은 인간이고, 인간과 자연환경의 공존을 실천해야 할 책임과 행위 주체성을 가진 것도 결국 인간이다. 인류세 시대에 인간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연결성을 직시해야 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책임을 지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 pp.347~348, 5부 「전환을 위한 여섯 가지 제언」 중에서
마지막 질문으로 마무리하자. 기후위기 상황에서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 기후과학의 계측치는 어두운 전망 쪽을 가리킨다. 탄소 농도와 비관의 눈금은 정비례한다. 그러나 희망은 객관적 조건의 산물이 아니라 실천적 행동의 창조물임을 기억하자. 한편에 과학의 법칙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연대심, 정의감 그리고 창의적인 적응력이 있다. 양쪽 끝을 민주시민의 행동으로 잇는다면 실존의 세기를 건너는 희망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373, 「나오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