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4월 8일 월요일 밤, 루이 암스트롱과 그의 올스타스는 서울 한강 주변에 화려하게 자리 잡은 워커힐 호텔의 개관을 축하하기 위한 2주간의 연주를 시작했다. 새치모의 최초이자, 내가 아는 한 유일한 한국 방문이었던 그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제1, 2차 세계대전의 참전 군인이었고 한국 전쟁 때 미8군 사령부를 지휘하다 사망한 월턴 H. 워커 대장의 이름을 딴 워커힐은 현재 건물 20여 개가 늘어선 복합 시설로, 그 가운데 있는 클로버 클럽은 새치모의 개관 연주회를 꾸렸던 곳이다. 〈스타스 앤드 스트라이프스Stars and Stripes〉에 실린 리뷰에 의하면 이날 공연은 한국군과 미군 고위 장교 800명이 모인 가운데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팝스 입술의 내구성에 관한 어떠한 의심도” 날려버린 공연이었다.
--- p.9, 「‘한국 독자들께’」 중에서
이 저서는 루이 암스트롱에 관한 대부분의 책이나 기사와 마찬가지로 그의 영향력, 위치, 역사적 위상을 정의하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서 그 접근법은 음악 자체에 따르는 비평적 평가와 순수한 즐거움에 길을 내주어야 한다. 우리는 바흐의 음악 때문에 바흐를 사랑하는 것이지 서구 문화의 발전 속에서 그가 맡았던 역사적 역할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암스트롱을 미국의 바흐로 생각한다. 그것은 미국 문화의 발전 속에서 그가 차지하는 유사한 위치 때문이 아니라, 그가 전하는 유사한 환희, 사랑, 그리고 황홀감 때문이다. 그것은 천재와 선지자 들의 전망을 통해서만 세상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해진다는 경건한 암시다. 그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멀리 보고 그들 예술의 확실성을 통해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 p.14-15, 「‘개정판에 부치는 글’」 중에서
무대 위에서 절제하지 않는 농담을 쏟아내는 암스트롱으로부터 감탄스러운 트럼펫 연주자 암스트롱을 분리하는 것은 전위예술주의자들, 「Kulchur」 중에서에게 그릇되게 어필하기 위해 한 관대한 예술가를 지우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진지한 측면을 보여주는 부조리주의자의 유머를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예술가로서 정서적 진중함을 지녔으면서도 연예인으로서 공동체의 흥을 돋울 줄 아는 균형 잡힌 그의 능력은 짐 크로Jim Crow, 집 쿤Zip Coon, ‘올드 댄 터커Ol’ Dan Tucker’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지워낼 수 있었다. 이 이미지들의 자리에 암스트롱은 멋지게 차려입고, 상류층의 삶을 살면서, 교황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백인 전용 정문을 열고 들어와 그 문을 닫지도 않은 채로 그곳을 정기적으로 드나들었던 세계적인 예술가이자 대중 스타로서의 해방된 흑인을 세워놓았다. 미국인들은 암스트롱을 사랑했으며 그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만이 마련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신뢰했다. 그것은 새로운 빛으로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p.35-36, 「1-1. 부조리주의자」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암스트롱에게 어린 시절이 없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암스트롱은 그 무엇도 가진 적이 없다고 말한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연주한 것이 그의 인생의 전부였다. 어린 시절의 결핍은 암스트롱에게 그 흔적을 남겼다. 그는 국제적인 명사가 된 이후에도 리무진 혹은 화려한 접대와 같은 편의 제공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해 다른 음악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공개된 모든 글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시궁창으로부터 삶을 바라보고 그 모든 것을 수용하는 법을 배운 한 인간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 p.63, 「1-3. 신화적인 탄생」 중에서
어머니는 리버티와 퍼디도에 있는 가까운 이웃 동네에서 살기 위해 우리를 떠나셨다, 「그곳은 싸구려 스토리빌 구역이다. 그러니까 다른 스토리빌의 창녀들처럼 그들이 일한 시간만큼 돈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중에서. 메이앤이 생선을 파셨는지, 「매춘」 중에서 난 알 수가 없다. 만약 파셨다 하더라도 그녀는 분명히 남모르게 파셨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이건 혹은 저 밑바닥에서 만나는 사람이건 모두 우리 어머니를 존경했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즐겁게 인사를 건넸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어떤 역경이 닥쳐도 그녀는 정신을 놓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을 겪는 동안 어머니는 자존심을 꺾는 법이 없었다. 그 무엇도 어머니를 자극하지 못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어머니는 해나갔다. 내 생각에 나는 메이앤으로부터 삶의 많은 부분을 물려받은 것 같다., 「《삶》」 중에서
--- p.64, 「1-3. 신화적인 탄생」 중에서
매러블 밴드의 연주를 들었던 젊은 백인 음악인 가운데는 빅스 바이더벡과 제스 스테이시를 꼽을 수 있다. 잭 티가든은 뉴올리언스의 부둣가에서 암스트롱의 연주를 처음 들었다. “갑자기 미시시피강의 흙탕물 건너편에서 높은 음을 내는 코넷의 희미하지만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 「…」 중에서 그 코넷은 내가 들은 것 가운데 가장 화끈하면서도 달콤하고 순수한 재즈로, 그 밤을 채우고 있었다.”
--- p.86-87, 「1-4. 디퍼마우스」 중에서
암스트롱이 뉴욕의 최고 연주자들에게 발한 매력은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재즈 역사에서 비교될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꼽자면 1940년대 찰리 파커만이 모든 종류의 음악인에게 그렇게 넓은 그물을 던졌다. 파커와 마찬가지로 암스트롱 역시 우스운 태도를 지닌 촌스럽고 무지한 시골 소년으로 인식되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 한 편은 그가 리허설 중에 나온 기호 pp를 전혀 몰랐다는 점을 들려준다. 헨더슨은 연주를 멈추고 pp, 「피아니시모pianissimo, 매우 여리게」 중에서가 무슨 뜻인지 루이에게 물었다. 루이가 대답했다. “예, 압니다. 매우 세게, 「pound plenty」 중에서란 뜻입니다.” 하지만 단원들의 웃음은 오래 갈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촌뜨기의 자극적인 리듬, 블루스 감성, 비할 데 없는 균형 감각에 맞추기 위해 자신들의 스타일을 점검하느라 너무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 p.100-101, 「1-5. 사이드맨」 중에서
그는 여전히 재즈 역사에서 가장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인물로 언급된다. 한 움큼 되는 진부한 곡들과 보드빌 스타일의 싸구려 노래들이 불쑥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오케이 시절의 녹음들은 더 이상 구시대 음악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 광채와 경이로운 힘은 바흐의 칸타타만큼이나 결코 감소하지 않았다. 암스트롱으로 인해 재즈는 팝 음악이 지어놓은 한계를 넘어서서 음악을 조망하는 대가적 기악 연주자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루이의 천재성은 때때로 조야한 작품, 전혀 자극을 주지 못하는 연주자들과의 녹음이라는 한계에서부터 녹음 기술과 관악기 연주 양식의 시대적 제약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을 극복했다.
--- p.112, 「1-6. 핫파이브와 핫세븐」 중에서
새로운 핫파이브 음반 중 하나는 그 어떤 미국 고전 음악의 영향력보다 더 큰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암스트롱 녹음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분석된 ‘웨스트 엔드 블루스’는 군대의 기상나팔로 시작한다. 대가적 기교의 이 맹렬한 트럼펫 카덴차는 군터 슐러의 말을 빌리자면 “재즈가 기존에 알려진 가장 높은 수준의 음악적 표현들과 경쟁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통지서”였다. 표현이 불가능한 이 통렬한 대목은 명확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무엇으로 남아 있다. 바흐의 〈샤콘 D단조〉를 연주할 수 있는 바이올린 주자는 많지만 암스트롱의 이 아홉 마디 전주를 확실하게 대신할 수 있는 트럼펫 주자가 재즈 안에서든 아니면 밖에서든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p.130-131, 「1-7. 1928년」 중에서
“사람들은 나와 내 음악을 사랑하고, 알고 있다시피 나도 그들을 사랑한다. 내가 무대에 오르는 순간, 사람들은 멋진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안다. 나는 그게 보인다.”
--- p.139, 「2-1. 음악의 표정」 중에서
제3자가 있을 때 암스트롱이 그를 ‘글레이저 씨’라고 부르기를 고집한 것은 일종의 노예근성을 시사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듀크 스나이더가 그의 자서전에서 시종일관 리키 씨라고 호칭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암스트롱은 글레이저와 함께 일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의견이 맞서면 암스트롱은 고집을 부렸고 글레이저는 결국 물러섰다. 그들 사이에 계속되는 논쟁은 대마와 관련된 것이었다. 잭 브래들리에 의하면 “글레이저가 소리를 질렀고 그러면 루이는 한마디 했다. ‘좆 까.’”
--- p.173-174, 「2-3. 글레이저 씨 그리고 루실」 중에서
만년에 루실은 이사 가자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글레이저의 도움으로 루실은 큰 집과 수영장이 딸린 부동산을 알아보고 그곳을 루이에게 보여주기 위해 차를 몰고 갔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런 모습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시스타디움 근처에 사는 것이 좋았다. 비록 그가 메츠 경기에서 미국 국가를 부르도록 초대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실망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아울러 그는 이웃들을 좋아했다. 그와 루실은 벽돌로 된 그 집을 지을 때 이웃들의 동의를 얻어 전면의 벽돌 담장을 그 블록의 끝까지 이어지게 했다. 그의 집만 너무 높거나 위압적으로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p.193, 「2-4. 보금자리와 태풍」 중에서
9월 19일 암스트롱은 노스다코타주 그랜드포크스에서 공연을 했고 그 무렵 아칸소주 주지사 포버스는 흑인 어린이들의 입학을 막고 있었다. 당시 암스트롱은 미국 국무부의 주관으로 널리 알려진 러시아 투어를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 암스트롱은 기자에게 그 투어를 취소하겠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미국 남부에서 그들이 우리 흑인들을 대하는 방식”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정부는 지옥에나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향해 “두 얼굴”의 인간이며 “배짱이 없어서” “무식한 시골 꼴통”인 포버스가 국정을 운영하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가 인터뷰에서 암스트롱이 한 말을 적어 그에게 보여주자 그는 거기에 서명하고 “완벽”이라고 써놓았다. 그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너무 안 좋게 돌아가고 있어요. 유색인에게는 나라라는 게 없잖아요.”
--- p.203-204, 「2-5. 비난」 중에서
그가 바티칸에 갔을 때 있었던 두 가지 이야기는 음악인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중 하나는 교황이 반지 낀 손을 루이에게 내밀자 그가 ‘하이파이브’를 하자는 몸짓을 보이며 교황의 손 밑으로 손바닥을 내민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교황 바오로 6세가 루이에게 자녀가 있느냐고 묻자 그가 “아뇨, 교황님. 하지만 우린 여전히 신음 소리를 내고 있긴 합니다”라고 대답한 이야기였다.
--- p.221, 「2-6. 헬로, 돌리」 중에서
1969년 12월에 발간된 〈에스콰이어Esquire〉지에서 그는 다음 세대에 조언해주기 위해 초대받은 70세에 가까워진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고 지면에 이렇게 썼다. “어느덧 노년에 접어들면서 난 흥미로운 일들을 했다고 느낍니다. 여러분들의 위대한 작곡가, 연주자 들은 대부분 나이가 든 사람들이거나 이제 하늘나라로 갈 때가 되었죠. 그들은 영원히 살 거예요. 사라지는 것은 없어요. 당신이 여전히 재미있고 멋진 일을 하고 있다면 말이죠. 숨을 쉬고 있는 한 계속 일을 하는 거죠. 그럼요.”
--- p.236, 「2-7. “루이 새치모 암스트롱입니다”」 중에서
연예인으로서의 그의 의식은 단지 그의 표정과 농담에만 반영된 것이 아니다. 음악 곳곳에 밴 주체할 수 없는 그의 솔직한 감정은 음악의 혁신적인 내용이 되었다. 그의 스윙, 즉흥 연주를 과연 그의 태도, 감정과 분리할 수 있을까? 19세기적인 근엄함과 추상 이론이 과연 재즈의 혁신을 가져올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루이 암스트롱으로부터 예술가적 측면과 연예인적인 측면을 분리하려는 관점으로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기딘스의 지적은 정확하고 예리한 것이었다.
--- p.296, 「‘옮긴이의 말 - 루이 암스트롱 탄생 120주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