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죽음은 연이 깊이 묻어둔 기억 하나를 불러냈다. 연은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수납장 맨 아래 있는 상자에서 편지 한 통을 찾아냈다. 이십 년 전 그가 바간에서 보낸 것이었다. 그녀는 답신을 보내지 않았으므로 결과적으로 그 편지는 그와의 마지막 교신이었다. (……) 연이 조문 장소로 택한 곳은 병원의 장례식장이 아니라 미얀마의 바간이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시에 자신의 쉰 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여행지로 다른 곳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바간에 남겨둔 선물을 찾아와야 했다. --- p.15~16
“정말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에 딱 좋은 장소네요.” 일몰에 따라서 하늘과 평원과 숲과 탑과 강이 묘한 빛깔과 윤곽으로 일어섰다 기울어지고 합쳐졌다 흩어졌다. 왠지 초연해지고 그 무엇이라도 한껏 받아들일 수 있는 은밀한 장소였다. 이제껏 꽉 움켜쥐고 살던 것들을 허허롭게 놓아버릴 수 있는 곳. 지금 이 온도, 이 햇빛, 이 바람, 이 감정, 이 상태로 생이 끝나도 그리 아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 p.21~22
인생은 예기치 못한 이유로 틈이 벌어지고 그 균열로 구조물 전체가 깨질 수도 있는데, 왕은 대체 무슨 꿈을 꾼 것인지……. 그러나 곧 희는 벽돌 사이에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완벽함을 지향한 그의 의지만은 대단하다고 여겼다. (……) 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불완전한 인간의 완전한 꿈 그리고 가장 거대한 미완…….” 희는 ‘꿈’을 ‘사랑’으로 바꾸어 중얼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 p.86~87
탑 위에서 명은 에야와디강을 건너다보며 생각했다. 사랑은 쌓이는 것이라고. 기쁨과 미움, 슬픔과 환희를 층층이 쌓으면서 견고한 구조물로 남는 것이라고. 무엇보다 함께 쌓는 것이라고. 우리가 여태 쌓아온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그녀는 왜 함께 쌓기를 포기한 것일까? --- p.103
명은 가방 속에 손을 넣어 루비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홍옥의 붉은빛이 매혹적이었다. 퍼머넌트 레드. 그녀와 보냈던 행복했던 시간만을 낱낱이 오려서 모아 녹이면 이런 빛깔일까, 한 사람을 향해 뛰는 심장이 영원히 뜨겁고 붉을 수 있을까?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당장 직접 걸어주기는 어렵겠지만 그 마음의 순간들은 모두 진실이었다고, 어쩔 수 없이 내게 벌어진 아름다운 일이었다고, 미완으로 남았지만 또한 무너뜨릴 수 없는 풍경이라고……. --- p.104~105
저만치 공항이 보이자 명은 생각했다. 어쨌든 하루가 지났으니 그 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라고. 어제의 나와는 분명히 다를 거라고. 명은 자신이 지금 닿은 그 지점에서 또 다른 길이 이어지고 열릴 것을 예감했다. 명은 멀어지는 풍경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나웅 마 뚜이메!” --- p.153
“늘 그 사람과 함께하는 게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지. 상대의 행복을 위해 잠시 잊는 것도 사랑하는 일이오. 의연한 단념이랄까.” “의연한 단념이요?” “그렇소. 의연한 단념.” (……) 명은 그의 얼굴이 일반적인 중년의 얼굴과는 약간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외로움에 늙어간 자와 사람을 사랑해서 겪는 서글픔으로 늙어간 자는 얼굴의 주름과 표정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 p.169~170
나는 그저 사랑이 지나가는 통로일 뿐이라고. 그것이 내 것이 아니기에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떠나보내고 싶을 때 마음대로 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들어온 사랑이 빠져나갈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나가는 것이라고. 심지어 어딘가에 이미 쓰인 책의 내용에 따라 자신이 살아왔고 사랑을 앓았으며 곧 죽을 것이라는 예감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