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로와 뿌르 여학생의 정조와 연애관
A- 중역, 지주, 거상, 귀족의 집 따님
B- 졸업 후에 부모와 형제를 부조하여하는 중간계급 이하의 가정의 따님
Q. 결혼은 한개의 모험이므로 처녀대로 있고 싶지만 사실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정조에 구애하지 않노라.
A- 100명중 44명 B- 100명중 63명
Q. 연애로부터 결혼에 들고 싶노라.
A- 100명중 98명 B- 100명중 67명
Q. 양친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결혼하겠노라.
A- 100명중 33명 B- 100명중 6명
Q. 결혼 후에도 직업을 가지겠노라
A- 100명중 6명 B- 100명중 73명
Q. 결혼 후 5년 이내는 자식을 아니 낳겠노라.
A- 100명중 83명 B- 100명중 62명
--- p.335-337--- 설문자료 발췌
일본에 의한 강점으로 식민지화한 현실에서 보통의 지식인은 더 큰 좌절의 굴레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그들은 사각모에 망토를 둘러 쓴 모습만으로도 선민의식을 가져도 좋았지만 그러나 식민지 관료가 되거나 학교선생으로 남지 못하면 대개는 '고등실업자'가 돼 버렸다. 그들은 방구들을 짊어지고 하릴없이 신문이나 뒤적이는 것이 일이었으니 자연 퇴영적이고 나태한 사고로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1930년대가 되어 신식교육이 확산되면서 지식인의 수효는 훨씬 많아졌다. 그러나 그만큼 고등실업자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룸펜'이라는 말이 하나의 유행어처럼 번졌고 스스로를 멋스럽게 룸펜이라고 부르는 치도 늘었다. 룸펜이란 말은 독일어에서 누더기, 넝마란 뜻으로 제정러시아 시대의 서구파 자유주의자들을 이르는 말로 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회층 지식계급을 의미하며 이들의 본질적인 속성은 반항과 불안, 무기력 등이다.
--- p.120
이 책은 처음 한국근현대미술사의 기본연구로서 현대문화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비롯되었다.애초부터 우리의 현대성과 현대문화 자체를 살펴보려던 것은 아니었다. 근대미술(현대미술과 구분하여 해방공간 이전의 미술을 근대미술로 부르는 것은 미술계의 통례이다)에서 가장 먼저 논의의 출발이 되는 것은 `근대(현대)`이며, 미술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근대성(현대성)`이 현재의 미술과 어떠한 연관을 지니고 있는가를 따져보는 작업이 근현대미술연구이다.
미술사를 연구하는 것이 `죽은 화가들의 뒤꽁무니를 캐고 다니는 일`이거나 아니면 `버려진 공동잡동사니에서 우연히 발견한 작품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 아닐 바에야 근현대미술에서 현대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미술 이전의 사회 전반에 관련된 문제이며 따라서 미술에서 `미적 의미에서의 현대성을 따져보는` 것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의미에서의 현대성을 가늠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해진다.
이는 단지 미술사에서 언급되는 미술작품에서 벗어나 건축, 광고, 사진, 만화를 이루어내는 모든 시각언어 현상들을 `현대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들여다보고 거기서 현대미술이라는 개념을 다시 되짚어 나가는 것이 근현대미술연구의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데에는 몇 가지 전제되어야 할 바탕연구가 필수적이다. 먼저 몇 십년을 거슬러 당시의 시각적 체험과 동질화된 추체험을 가능케 하기 위한 잡다한 현대에 대한 자료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우리의 손닿는 곳에 적어도 현대 이후의 지성사나 문학사적 흐름을 맥락지을 수 있는 삶과 의식에 대한 기록들이 일목요연하게 놓여져 있어야만 했다.
현대성에 관한 기존의 논의나 현대의 개념에 대한 수많은 저술들이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현대가 시작될 무렵의 그리고 현대가 전개되는 동안의 구체적인 사회상을 그려보는 데에는 더 실제적인 자료가 필요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또 다른 엄청난 작업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근현대미술에 관한 연구는 당분간 뒷전으로 물러앉게 되었다. 게다가 현대가 태어날 무렵의 상을 대충이라도 가늠하기 위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해버렸다.
이 책은 현대의 처음 모습을 그려보기 위한 그 지난한 과정을 초입에서 게으름에 지쳐 버리고 남은 결과이다. 애초에는 현대를 이해하기 위한 글들을 묶어 자료집을 만들 생각이었지만 거기에 해제를 붙여쓰고 설명을 달다보니 어느새 그 일이 더 커지고 말아 앞뒤가 뒤바뀌고 말았다.
필요에 의해서 이 책은 매우 제한적인 원칙을 적용했다. 하나는 기존의 정치, 사회, 경제, 문학 등에서 언급하거나 인용된 관념적이며 논리적인 글들은 가급적 중심에서 배제하려 했다.오히려 그 반대가 되도록 일상적이며, 구체적인 현상들에 대한, 시답지 않게 보이거나 시시껄렁한 것으로 취급되는,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현대성`에 대해서 풍부하게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글자료와 시각잘표들을 판단의 중심에 놓았다.
다른 하나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모더니티에 대한 담론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매우 유효하고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시각들을 일단 적용하지 않으려 했다. 자료를 몇 개 살펴보는 동안 현재까지의 논의가 앞세우는 그 전거들은 대부분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원칙에 충실한 낯선 개념들의 엮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날 것`으로서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체험들을 내용의 중심으로 삼으려 한 것은 현대가 관념에 빠지는 것을 막고 싶은 이유에서다.
따라서 이 책은 현대성에 대한 연구서의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당연하게 이 책이 우리의 `현대성`을 개괄하거나 망라한, 일목요연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가 형성될 무렵인 1930년대를 중심으로 한 것도 그렇거니와 거기서도 매우 부분적인 전거들로 엮어진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맨 처음 의도했던 것처럼 현대의 모습을 그려보기 위한 혹은 현대가 시작될 무렵을 체험하기 위한 작은 장소를 제공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 책은 일곱 개의 서로 다른 그러나 서로 중첩과 중복을 피할 수 없는 장으로 나뉘어 있다. 각각의 장들은 실제 현대성을 경험하는 층위와 각도에 따라 구분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당되는 장의 성격을 전반적으로 망라한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매우 제한적인 자료를 통해 우리의 현대성의 경험 속에서 추출할 수 있는 몇 가지의 문화적 혹은 일상적 특징을 주목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예를 들면 첫 장은 현대의 개념, 특히 동시대인들이 인식했던 현대성을 간단한 사상적 흐름과 현대에 상응하는 용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지만 1930년대 `모던`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중심으로 짜여 있으며, 두 번째 장은 지식인 문화의 성격 특히 룸펜문화와 데카당으로 불리는 문화적 현상과 모더니티와의 관계를,
세 번째 장은 문물과 과학을 통해 새로운 인식적 범주가 확산되는 계기를, 네 번째 장은 스포츠와 영화, 유행가 등 대중문화가 형성되는 과정과 유행의 양태를, 다섯 번째 장은 현대화 과정에서 여성의 인식변화와 사회 속에서의 역할에 대해서,
여섯 번째 장은 건축을 중심으로 한 도시화의 과정과 도시적 감수성의 형성, 그리고 도시의 경제적인 삶의 환경을, 마지막 장에서는 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육체의 서구화 그리고 이를 통한 현대적 인간의 탄생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몇 가지를 적어놓았다.
각 장마다 앞의 글은 뒤에 수록된 원문에 해제 성격을 지닌 글이다. 어쩌면 각 장의 어수선한 앞글이 아니라 뒤쪽에 실린 글들만을 읽어봄으로써 현대에 대한 간접적인 체험을 더 실감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록된 원문자료는 대략 1900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잡지의 글들을 가려 뽑은 것이다. 이 글들 이외에 각 장에 해당하는 더 그럴 듯한 많은 글들이 책을 부피를 줄이기 위해 실리지 못했으며 또한 자료의 대상이 되었어야 할 신문의 기사나 단행본의 글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다.
뒤에 실린 읽어볼 문헌자료의 글들은 가급적 현대어로 바꾸었지만 당시의 어투를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했으며, 앞글에 인용된 글들은 원문에 되도록 충실하도록 했다. 다만 국한문혼용체의 난삽한 글은 현재의 독자를 위해 상당 부분 풀어놓았다.
우리에게 현대란 무엇인가? 현대는 사건으로 점철되는 역사를 통해서 밝혀지지 않는다. 개항, 식민지배, 해방공간의 좌우갈등, 전쟁과 원조, 선거부정에 이은 학생혁명, 쿠데타와 경제 재건, 광주시민운동과 노동자봉기, 금융위기와 IMF체재 등등의 역사의 파노라마속에서, 천천히 그렇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적'의식과 정서의 잠재된 형태들은 모습을 감추어왔다. 사건이 주는 숫자의 무게와 가시적인 효과에 길들여진 역사학은 결코 그 형태들을 그려낼 수 없었다.
현대는 정치사의 밑바닥이나 사회사의 행간속에 간간히 섞여 있었을뿐이며, 연속적인 그러나 단절적인 집단의식의 변화들만이 사건의 지각변동을 통해야만 측정될 수 있는 단위로 치환되고, 으레 그래야할 당연한 현상으로서의 분노와 갈등, 폭력과 위기의 폭발만이 주목되었을뿐이다. 그리하여 연사의 학문적 층위들의 사이를 비집는 현대적인 삶의 조건들은 그리고 거기서 끊임없이 상투화하고 반복되는 삶과 의식의 변화들은 오히려 매우 낯선 모습으로 비쳐진다.
---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