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가? 인류가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기에 이 타락한 인류를,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와 그의 후손을 통해 구원하려 하신 것이다. 본문 2절에는 이런 창조, 타락, 그리고 구속의 역사가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이 창조, 타락, 구속의 역사를 이어주는 중요한 끈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종, 즉 노예 상태 가운데서 구원하셨다는 것은 십계명이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낸다. 십계명을 잘 지켜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그렇게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십계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구원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났다. 따라서 십계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언약백성으로의 관계를 신실하게 유지하기 위한 합당한 행동 양식을 기술한 것이다. 나에게 큰 호의를 베푼 정말 고마운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땅한 반응은 그 사람과 계속해서 고마운 관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 아닌가? 은혜를 알고 이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반응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아는 언약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해 주신 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십계명 : 하나님의 언약 사용설명서」중에서
“먼저, 출애굽기 20장 5절에 나오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른다’는 표현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언뜻 보면 아버지의 죄 때문에 삼사 대에 걸쳐 불행을 당한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 당시 고대 근동의 대표자 사상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은 보통 삼사 대가 대가족을 이루며 함께 살았다. 한 지붕 아래 동거하는 가족 구성원이 삼사 대였다. 보통 아버지는 그 가족의 대표를 의미했고, 아버지가 벌을 받으면 그 파장이 할아버지, 아버지, 자녀, 손자까지 미쳐 사대 전체가 고통을 받았다. 특별히 본문은 십계명이라는 언약의 맥락에서 선포된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삼사 대 가족의 생명을 담보로 하나님 앞에서 지키기로 약속한 언약규정인 것이다. 그만큼 이 언약이 엄중하고 중요하다는 의미다. 따라서 본문에서 언급하는 저주는 세대와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주술적 저주가 아니라 언약 위반에 관한 엄중한 경고로 보아야 한다.”
---「제2계명 (2) :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없다」중에서
“그렇다면 그 이름을 ‘망령되게’ 부른다는 뜻은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여기 ‘망령되게’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라샤웨’라는 단어다. ‘라샤웨’는 전치사 ‘라’와 명사 ‘샤웨’가 결합되어 있는 단어다. ‘라’는 영어 ‘in’ ‘by’와 같은 뜻이 있고, ‘샤웨’는 ‘공허’ ‘헛됨’ ‘허망함’ ‘가치 없음’, 여기서 더 나아가 ‘거짓’ ‘속임수’ ‘해를 끼치는 능동적인 힘’ 등을 의미하는 단어다. 이에 기초하여 ‘망령되게’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첫째, 공허한 일에, 헛된 일에, 허망한 일에, 가치 없는 일에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의미다. 이것을 남용이라고 한다. 즉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은 내 욕망과 이기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이다. 둘째로, ‘망령되게’라는 뜻은 ‘거짓되게’ ‘속임수로’라는 뜻이 있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행하신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이름을 동원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고, 저렇게 하라고 했다 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 ‘샤웨’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능동적인 힘’이란 뜻으로, ‘망령되게’란 뜻은 다른 사람을 해하려고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 안에 있는 힘을 오용 또는 악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협하고 협박하고 겁주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어떤 황당한 일 앞에 이따금 “하나님, 맙소사!” 또는 영어 욕설로 “Jesus Christ!” “God damn it!”이란 표현을 사용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제3계명 :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중에서
“탐심이 우상 숭배인 이유는 인류 최초의 타락이 바로 이 탐심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탐스럽다’(히. 하마드)는 단어는 십계명에 나오는 ‘탐내다’와 같은 동사다. ‘하마드’는 ‘무엇인가를 갈망하다’ ‘무엇인가를 소유하려 하다’ ‘무엇을 얻으려고 애쓰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동사 ‘하마드’의 용례를 보면, 항상 심리적인 염원에 그치지 않고 외적인 행동이 이어지는 동사가 나온다. 대표적인 동사가 ‘취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 동사 ‘라카흐’다. 영어로 하면 ‘take’ 정도가 된다. 하와는 선악과를 보고 이를 탐하였다. 선악과를 갈망하고 소유하려고 했으며 얻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열매를 ‘따먹었다.’ 여기서 ‘따먹었다’는 동사가 히브리어 ‘라카흐’다. 탐하니까 억제하지 못하고 선악과를 취하고 소유하여 불순종으로 치달은 것이다. 탐욕은 이성이 판단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탐욕은 우리 이성을 순간적으로 마비시키고 곧바로 행동으로 나가게 한다. 그래서 탐욕에 사로잡히면 자신도 모르게 상당히 성급하게 행동한다.”
---「제10계명 :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중에서
“생각해보라. 거친 조각목이 잘 다듬어져서 금 코팅을 했다. 이런 실내에 덮개를 덮고 그 안에 메노라, 7개의 등불을 켠다고 생각해보라. 하늘은 온 우주 삼라만상이 펼쳐진 소우주의 모습인데, 그 내부는 금벽이 사방을 두르고 있다. 이것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겠는가? 이런 영광스러운 모습을 성막 안에 담기 위해서는 이 성막의 프레임이 공교하게 잘 연결되어야 한다. 금을 입힌 촘촘한 널판 48개와 널판 한 개당 2개씩, 총 96개의 은으로 만든 받침, 그리고 널판에 부착된 총 192개의 고리, 거기에 가운데를 연결하는 5개의 가로 막대가 모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연결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담는 성막 구조물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신약의 교회를 연상시킨다. 구약의 성막을 이루는 원리가 사실상 신약교회에 고스란히 적용된다. …각 널판을 통해 도움을 받아 연결되고 결합하여 성막을 세워가는 것처럼 신약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왕 같은 제사장인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서로 지체 간에 연결되고 결합하여 사랑 안에서 그의 몸을 세워간다. 성막과 같이 아름답게 정교하고 긴밀하게 연결되면 교회는 하늘의 영광을 담는 견고한 그릇이 된다. 든든하게 연결되어야 하늘 영광을 풍성하게 담는다.”
---「성막 (2) : 든든하게 세워가야 한다」중에서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를 다 치실 때 이스라엘의 장자를 살리셨다. 또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홍해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들의 생명을 살리셨다. 이들의 생명은 거저 얻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비싼 희생을 치르시고 놀라운 능력으로 이들에게 주신 생명이다. 그러니 이 인생의 값이 소중한 것임을 기억하고 대속물을 내라는 것이다. 대속의 속전은 가난한 자나 부자나 모두 동일하게 내야 한다.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출 30:15). 모두가 동일한 속전을 내라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은혜가 필요한 동일한 죄인이란 뜻이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속죄의 은혜가 필요하다. 주목할 점은 신약의 성도에게는 예수님이 바로 이 생명의 속전이 되어 주셨다는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우리는 정말 귀한 가치가 있는 존재다. 그렇기에 주님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잡아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볼 뿐만 아니라 장차 영원한 본향으로 우리를 데려가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의 소중한 가치는 우리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발견하게 되는 가치다.”
---「분향단과 속전 : 성도의 자존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