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그가 우울증으로 힘들어할 때 그 무엇도 거기서 그를 해방시키지 못했다. 크레이그는 자신의 첫 번째 정체성은 우울증 환자이며, 두 번째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속임수에 빠지고 말았다. 자신은 우울증 환자라는 생각이 그가 행동하고, 반응하고, 해석하고, 삶에 대응하는 모든 방식을 결정했다. 그랬기에 그는 삶을 오직 머피의 법칙이란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이미 깨끗해졌으며 새 삶을 얻었다고 단언한다. 즉 크레이그는 우울증 환자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울증과 싸우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어감상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크레이그는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다. 비록 그의 감정 상태가 매일 변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찾은 정체성은 결코 흔들림 없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다. 크레이그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 밖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힌 정체성을 갖추었다고 해서 날마다 죄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를 몸부림치게 하는 특정한 죄로 그의 신분을 규명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가의 문제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 chapter 2 변화는 정말 가능한가? _조작된 거짓 희망
“성경은 우리의 기원으로부터 궁극적인 결과까지의 그 모든 것을 알려 주는 이야기책이다. 하나님은 그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펼치신 채로 우리를 초대하셔서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듣게 하시고 그 후에는 우리의 삶을 다시금 바라보게 하신다. 요한계시록 같은 예언서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 일어나는지 알려 주는 예표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단언컨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계시록은 우리의 마지막 종착지가 어디인지 우리로 이해하도록 돕고, 그로써 바로 이 순간을 사는 우리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책이다.
영원한 삶이 없다면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아무 의미가 없다. 현재의 삶보다 더 나은 결말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죄는 정복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정결해져야 한다. 우주는 다시 회복되어야 하는데 그 회복은 최소한 전 세계적인 악의 멸망을 동반할 것이다. 모든 고통, 아픔, 시험, 희생 그리고 싸움은 말끔히 사라질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특별히 이를 강조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딘가로 인도하지 않으신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엄청난 시간 낭비일 뿐이다. 이보다 더 나은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존재한다!……
우리는 왜 충성할까? 우리는 왜 기쁘게 나눌까? 왜 다른 이들을 돌볼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까? 왜 끊임없이 기도할까? 왜 올바른 일을 위해 헌신할까? 왜 정의와 긍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까? 왜 자신의 것을 희생할까? 왜 인내할까? 우리는 왜 그 모든 예배를 드릴까?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라고 말씀하신 모든 일은 오직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에만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이 이야기에 궁극적인 끝이 없다면, 모든 믿는 자들은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이다. 우리가 애써 그 모든 일을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마지막 장이 남아 있다! 하나님은 그 장을 펼치고 우리로 하여금 들여다보게 하시며 그로써 갖게 되는 모든 이해와 소망 가운데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신다.”
--- chapter 3 어떤 변화를 꿈꾸는가? _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
“우리는 또한 무능력하며 죄에 종속되었다(골 2:9-15). 바울은 ‘죽었다’라는 단어를 사용해 우리가 얼마나 구제불능인가를 묘사한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죽은 사람은 자신을 개선할 수 없다. 설사 우리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하기 원할지라도(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그분의 원수가 된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설사 우리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알지라도(그러나 불의로 진리를 막는 어리석은 우리는 모른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롬 5:8). 어떤 면에서 이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결혼을 앞두고 처한 현실을 확인하게 한다. 만약 우리가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우리 마음은 장래의 남편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가득할 것이다. 우리는 그 배우자에게 적합한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이 결혼이 실패할 거라 생각하며 도망가거나, 결혼할 사람의 성품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
--- chapter 4 누가 우리를 변화시키는가? _그리스도와의 결혼
“많은 그리스도인이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방식으로 개인이 변화되기를 완강히 바란다. 이들을 구속적 관계의 풍성한 장으로 인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이 과정에서 실패를 경험한다. 우리가 현대사회의 무미건조한 개인주의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와 씨름하고 좀 더 예수님처럼 되고자 애쓰는 가운데 ‘예수님과 나’라는 사고 체계를 갖게 된다. 우리는 ‘안 될 게 뭐가 있어? 어쨌든 사람들과 엮이는 건 복잡하고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야. 다른 사람이 왜 필요하지? 성경 묵상도 기도도 혼자 하는 거잖아!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보다 큰, 솔직히 말해 그보다 복잡하고 어떤 면에서는 덜 효과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이번 장 도입부의 간증에서 살펴보았듯,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함께 변화를 체험하도록 의도하셨다. 변화는 공동체가 함께하며 이루어 가야 할 목적이다. 각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는, 전 시대를 통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관되는 보다 장대한 구속 이야기의 한 부분이다. 당신과 조 그리고 다른 모든 신자들이 이미 그 이야기와 가족의 한 부분이 되었다. 바로 그러한 정황 속에서 개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공동체의 변화는 우리 생각에 종종 반하지만, 성경은 명백하게 이것이 곧 우리를 예수님처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 chapter 5 변화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_공동체적 과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은 더욱더 악화되었다. 완전히 지친 상황 가운데 죄악된 인간의 보편적인 반응인 원망이 솟아나와 지목할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모세가 일차적인 원망의 대상이었지만 그는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에 대한 책임이 없었다. 오직 하나님이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이곳까지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인도는 구체적인 목적하에 이루어졌다. 광야 생활은 의심 많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또 다른 기회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상황을 그렇게 보지 못했다.
이 구절은 인간의 고통이 얼마나 쉽게 분노로 변하는지 보여 준다. 또한 죄인인 우리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얼마나 죄악되게 반응하는지 겸손히 인정하라고 권면한다. 짜증난 환자는 간호사에게 소리를 지른다. 아내에게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남편은 어떻게 해서라도 트집을 잡으려 든다. 교통 체증에 갇힌 판매원은 앞차를 향해서 빵빵 댄다. 스트레스를 받은 엄마는 자녀들에게 짜증을 내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시련 중에 쏟아내는 분노는 시련보다는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이 말해 준다. 성경은 항상 우리를 주목한다. 성경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외부의 환경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고 영적 시력을 상실한 우리의 실체를 직시하게 한다. 우리는 흔히 상황이나 장소 혹은 관계가 변하면 나 역시 다르게 반응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환경의 어려움이 우리가 죄악된 반응을 하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죄악된 반응은 환경 탓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것들은 단지 우리 마음 상태를 말과 행동으로 나타낼 뿐이다.”
--- chapter 8 현실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_더위2: 현실 속에서의 우리
“교회 안에는 존과 같은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을 알기는 하지만 삶의 변화가 명백히 필요한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인격적인 성숙에 대한 증거나 절박감 없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그저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 쉽게 만족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무 쉽게 만족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는 만족하지도 말고, 멈추지도 말고, 배고파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감사가 넘치는 불만족 상태 혹은 기쁨이 넘치는 불만족 상태여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에 매일 감사를 드리되, 아직 만족해서는 안 된다. 왜일까? 자신을 정직하게 직시한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나의 전부는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누리는 많은 것들에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그분의 기업을 완전히 상속받을 때까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소유가 된 것을 모두 원하는 것이 옳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께 풍부히 받고도 아주 일부분만 즐거워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까지 씨름하고, 묵상하고, 주시하고, 탐색하고, 싸우고, 달리고, 인내하고, 고백하고, 저항하고, 순종하고, 따르고,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자기 탐색과 기쁨 가운데 만족하지 않는 삶을 혼란스러운 자아 비판적인 삶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혐오에 빠지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스스로의 삶을 기꺼이 탐색하기 원하신다. 그 소망은 용서에 대한 약속뿐 아니라, 개인의 구속과 회복에 대한 약속에 근거한다. 나를 용서하신 바로 그 은혜가 또한 나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킨다. 그 변화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 chapter 9 무엇이 그렇게 반응하게 하는가? _가시1: 우리를 얽어매는 것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자신을 단지 새롭게 만들었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죽었을 때 예전의 바울이 좀 더 나아진 바울로 대치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대치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새 바울이 마음속 죄를 능히 다룰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죄가 군림하던 곳을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마음은 한때 죄의 다스림 아래 있었지만, 이제는 의와 지혜와 은혜와 능력과 사랑의 궁극적인 원천이신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곳이 되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잠재력에 대한 기쁜 소식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영원히 사시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일이 필요했다. 예전의 죄악된 나는 죽었다. 그런데 그 나는 좀 더 나은 나로 대치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대치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거하심으로 내 마음이 새로워졌고, 그분이 거하시며 생명을 주시니 마침내 내 마음이 살아났다. 더는 죄가 내 마음을 주장할 수 없으며, 그분의 은혜로운 통치로 내 마음이 해방되었기에 새로운 생명의 방식으로 반응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내 삶과 마음에서 놀라운 변화와 성숙의 가능성이 생겼다.”
--- chapter 11 우리는 왜 변화될 수 있는가? _십자가1: 새로운 정체성과 가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