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제가 저술한 대다수 책은 신앙과 과학의 한두 가지 특징을 집중적으로 다루었기에, 전체 맥락을 잡을 수 있는 개관을 제공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쓰기로 했습니다. 이는 예전에 다루었던 세부 논의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이 주제의 주요 논점을 짚어 볼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동안 저는 이 주제에 대해 많은 강연을 해 왔고, 강연 후 이어지는 토론은 무척 즐거웠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저는 대중이 궁금해하는 주요 질문들이 무엇인지, 그들이 필요로 하는 통찰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과학과 종교는 모두 필요하며, 서로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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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믿음이라는 요소가 들어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이 믿음을 현실에 눈을 감고, 아침을 먹기도 전에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여섯 가지나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여기는 듯 합니다. 성서나 교황과 같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권위가 그냥 받아들이라고 해서 말이지요. 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물론 믿음은 도약을 수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도약은 빛으로의 도약이지 어둠으로의 도약이 아닙니다. 종교적 탐구의 목적 역시 과학적 탐구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추구하여 근거 있는 믿음을 갖는 데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 어떤 종교든 실제로 참일 때만 그 종교가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종교는 힘겨운 삶을 괜찮은 척하며 살아가게 해주는 기술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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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누구인지 잘 모르며, 이러한 통찰들도 무지한 우리를 비춰주는 희미한 빛에 불과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발견이 저급한 환원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현실은 관계 위에 서 있습니다. 전체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부분의 합을 넘어섭니다. 하지만 인간이 ‘유전자의 생존을 유지하는 기계’라거나 ‘살이 붙어있는 컴퓨터’라는 식으로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과학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한 과학자들의 학문적 노력과 그들의 통찰력들이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이를 전체를 이해하려는 시도에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규칙을 전체에 적용 가능한 것으로 과장합니다. 공교롭게도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 대부분은 생물학자나 인지과학자들입니다. 왜 그런것일까요? 실은 물리학자들도 그랬던 때가 있었습니다. 18세기 후반 물리학자들은 상당수가 ‘불과론자’였습니다. 뉴턴의 위대한 발견 이후 후속 연구가 이어졌습니다. 뉴턴은 그렇게 보지 않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한동안 물리적 세계(주로 태양과 그 주위를 공존하는 행성으로 구성된 태양계)를 일종의 거대한 시계장치로 보았지요. 그들은 모든 것이 시계장치와 같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기계로서의 인간』Man the Machine과 같은 제목의 책들을 써댔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뉴턴의 세계 내부에도 시계보다는 구름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시계를 먼저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묘하고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구름보다는 시계가 훨씬 이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초기에 기계적인 세계를 발견했을 때 그 내용을 모든 지식에 적용하고픈 유혹도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20세기 후반 생물학자들에게도 이와 거의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 pp.108-109
저는 우리가 기도할 때 두 가지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기도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합니다. 앞서 물리적 세계는 유연하고 열려 있다고,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가 되어가는 진정한 모습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렇기에 미래에 일어날 일에는 우리 역시 작은 부분을 담당하게 됩니다. 우리의 작은 움직임이 작동할 작은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에게도 미래를 위한, 섭리의 영역이 할당되어 있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하는 첫 번째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작은 영역을 그분이 움직이실 수 있는 영역으로 쓰시게 하는 것, 그분의 섭리, 그분의 뜻에 따라, 그 영역을 가장 효과적으로(선하게) 쓰실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언어로 말하면 우리의 뜻이 하느님이 뜻과 같아지도록, 우리의 의지를 그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치가 이루어지면, 인간의 소망과 하느님의 소망이 협력하게 되어 불가능하던 일들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참된 도구입니다. 기도는 진정으로 세계를 변화시킵니다.
--- pp.135-136
과학의 지적 전략은 과도한 신뢰도, 끝없는 의심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계속 의심하기만 한다면 진보는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다른 모든 사람이 그렇듯, 과학자들도 오랫동안 유지한 믿음을 바꾸라는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이해는 결코 의심할 나위 없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 발생하는 일은 종종 이해하기 어렵고 어떤 것들은 심지어 완전히 불가해합니다. 과학자들은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일반적인 과학 이론이 전반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것은, 그 이론이 우리의 수많은 물리적 경험을 가장 잘 설명해주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성공이 계속 누적되고 있기에, 우리는 과학의 지적인 전략이 충분히 효과적이라고 믿으며 계속해서 과학 연구를 이어갑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라는 실재에 대해서도 저는 같은 전략을 펼쳐보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는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지식과 경험에 잘 들어맞습니다. 예를 들어, 물리적 세계의 질서와 비옥함이 그렇고, 실재의 다층적인 특징들이 그렇고, 예배, 희망과 같은 거의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이 그러하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현상(그의 부활을 포함해서)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예들을 여기서 더 깊이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양쪽 모두 매우 비슷한 사고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과학이라는 영역에서 종교라는 영역으로 옮길 때, 무슨 기어를 바꾸듯 괴상한 지적인 방식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무언가 신비로운 보증을 받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 지식의 원천에서 솟아나는 것이고, 합리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재고의 여지가 없는 폐쇄적인 지식 체계에서 믿음이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그 속성상 무한한 풍요로움을 갖고 있으며, 그 풍요로움에 견주면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부적절한 상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궁극적으로 더 큰 실재 앞에 부서질 수밖에 없는 우상입니다. 오랜 신학의 역사는 이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 pp.176-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