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과학은 따분하고 고루한 학문이며, 그중에서도 동식물에 붙이는 라틴어 학명들은 그저 재미없고 고리타분하기만 하다. 이 이름들은 길고 기억하기 힘들 뿐 아니라 발음도 어렵고, 생물학과 학생들이 일종의 신고식을 치르며 외워야 하는 필요악이라고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다들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분명 어떤 학명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아주 경이로운 학명들도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사람, 즉 탐험가, 박물학자, 모험가, 심지어 정치가, 예술가, 가수를 기념하는 학명들의 뒷이야기를 나누어볼까 한다. 이 이야기들은 과학 문화와 과학자들의 개성을 보여주는 창이자, 명명자와 그 이름이 기념하는 사람과 그 이름을 가진 생물 사이의 놀라운 연관성을 드러낸다.
--- p.16
흥미롭게도 이 명명규약에는 법적 강제성이 없다. 하지만 생물학계는 --- p.대부분) 그것을 따르는데 명확한 규칙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 일어날 혼란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학술지들이 규약을 준수하지 않은 논문은 게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 p.40
학명은 종의 외형을 따서 짓는 경우가 많다. 미국미역취의 학명인 솔리다고 기간테아 Solidago gigantea는 아주 큰 미역취라는 뜻이다. 울음소리를 묘사한 학명도 있다. 발뜸부기의 학명인 크렉스 크렉스 Crex crex는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홍콩에 사는 개구리’라는 뜻의 아몰롭스 홍콩겐시스 Amolops hongkongensis처럼 분포 지역을 나타내거나, 이름에 ‘바위틈에 산다’라는 뜻의 ‘saxatilis’를 사용한 상사줄자돔 Abudefduf saxatilis처럼 해당 종이 선호하는 서식처를 표현하기도 한다. 신화나 종교를 상징하는 경우도 있다. 올리브개코원숭이Papio anubis의 학명은 이집트 신 아누비스의 이름을 따왔다. 동굴에 사는 한 메기의 이름은 사탄 에우리스토무스 Satan eurystomus다. 학명을 이용해 유머를 구사하는 과학자도 있다. 딱정벌레의 한 종인 아그라 바티온 Agra vation은 ‘짜증나게 하다’라는 영어 단어 ‘aggravation’을 변형한 것이다. 또 다른 딱정벌레는 카이사르가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외친 “브루투스 너마저You too, Brutus!”를 변형한 이투 브루투스 Ytu brutus라는 이름을 받았다.
--- p.41~42
수리남으로 가는 항해는 아주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녀는 쿡 선장이 처음 태평양을 항해하기 69년 전, 그리고 훔볼트가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로 원정을 떠나기 100년 전, 다윈의 유명한 비글호 항해가 있기 312년 전에 유럽을 떠났다. 1690년대에 유럽인이 설탕 및 노예 무역을 제외한 다른 이유로 수리남에 가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더군다나 여성 홀로 간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다른 17세기 예술가나 박물학자는 군주나 무역회사로부터 재정적 지원과 보호를 받아 항해했지만, 메리안은 꽃과 곤충을 그린 그림 255점을 팔고, 유럽 수집가들에게 표본 공급을 약속하며 자신이 직접 원정 자금을 마련했다. --- p.71~72
또 다른 박물학자 윌리엄 맥리는 유난히 《수리남 곤충의 변태》에 실린 그림 하나를 물고 늘어졌는데, 벌새를 잡아먹으려는 자세를 취한 타란툴라 거미를 그린 삽화였다. 맥리는 타란툴라가 나무에서 사냥을 한다거나, 더욱이 새를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진짜 믿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40년 뒤, 그리고 메리안이 타란툴라를 관찰한 지 170년이 지난 후 유명한 탐험가이자 박물학자인 헨리 월터 베이츠는 메리안이 옳았고 맥리가 틀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p.74~75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대중문화 유명인사들을 과도하게 미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들은 근대 과학이 그저 자기 일을 할 뿐인 가짜 영웅들에게 이미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것이 야구공을 멀리 치는 것이든, 웃기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든, 시간을 넘나드는 사이보그 암살자--- p.혹시 잊어버렸을 사람들을 위해 말하자면,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슈워제네거가 연기한 배역) 행세를 하든 말이다. 물론 과학자가 비욘세나 이치로의 팬이 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단지 팬심과 과학을 분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가? 왜 학명, 또는 과학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들은 비인간화되고, 무조건 진지해야 하고, 기능적인 것 이상이 되면 안 된단 말인가?
--- p.85~86
신종과 새로운 지식을 찾아 세계 곳곳을 뒤진 빅토리아 시대 박물학자들의 그림은 주로 다윈, 베이츠, 월리스, 굴드 등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들은 교육을 받았거나 적어도 부유한 배경의 유럽 또는 미국인--- p.거의 남성)으로서, 오랫동안 탐험을 했고 또 그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 그러나 이 그림은 한심할 정도로 잘못되었다. 사실 이 그림에는 다윈, 베이츠, 월리스, 굴드라는 주인공을 위한 수십 명의 스펄링이 함께 있었다.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고 --- p.아마)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을 이름 없는 사람들 말이다. 이 중에 어떤 이들은 자칭 과학자였을 테고, 일삼아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가이드, 선원, 요리사나 기술자로서 탐험에 참여한 이들의 뒤치다꺼리가 없었다면 원정 자체가 불가능했음은 분명하다.
--- p.100
결론적으로 말해 누구나 자신의 이름으로 학명을 지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큰 결례이고 극히 드문 예를 제외하면 대부분 그러지 않는다. 그게 맞는 일 같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다. 종을 명명하는 과학자도 --- p.고정관념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다. 수줍고 내성적인 과학자가 있는가 하면 허풍쟁이도 있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과학자가 있는가 하면 뽐내지 못해 안달 난 에고이스트도 있다. 사회규범을 존중하는 과학자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파괴하는 과학자도 있다. 유혹에 맞서는 과학자도, 굴복하는 과학자도 있다. 이런 와중에 지금까지 거의 모든 이들이 신종에 제 이름을 붙이고 싶은 유혹을 용케 뿌리쳐왔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 p.145
단순히 사람 이름을 가진 종 수를 센다면, 적어도 다윈에게는 몇 명의 경쟁자들이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윈과 월리스라는 두 이름은 다른 이름들과는 크게 다르다. 리처드 스프루스 역시 200개가 넘는 종에 이름이 붙었지만 모두 식물이다. 이끼에서 교목까지 다양한 종을 아우르지만 결국은 식물이다. 그런 점에서 스프루스의 식물은 현존하는 종, 다시 말해 지구 생명이 가진 깊은 역사의 끄트머리를 장식하는 현재에 선택된 것들이다. 그것은 프링글, 베베르바우어, 스타이어마크, 후커 부자 모두 마찬가지다. 한편 생명의 나무 반대편에 있는 윌리 쿠셸, 제프리 몬테이스의 종들은 거의 곤충이나 거미, 그 외 다른 절지동물이다. 현존하는 종과 멸종한 종 모두에, 생명의 나무에 있는 모든 가지에서 나온 종들에 이름이 붙은 인물은 다윈과 월리스뿐이다.
--- p.188
그들은 종과 종의 이름은 우리가 함부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돈을 받고 원하는 대로 명명해주는 행위가 과학의 신성함을 더럽힌다고 생각한다. 특히 분류학자들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 명명권을 판다면 더 크게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p.그런 분류학자라면 걸리지 않도록 암암리에 판매하겠지만), 이런 식의 명명권 판매는 극히 드문 것 같다. 여기에는 실제로 흥미롭고 또 놀라운 측면이 있다. 개인의 부를 위해 종을 명명하는 행위에 기술적 또는 법적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며, 명명규약이 이를 금지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다음 둘 중 하나는 사실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보편적으로 분류학자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명명권을 파는 일을 윤리적인 측면에서든 동료들의 비난이 두려워서든 꺼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 또는 이름을 사는 사람들에게 그 이름을 통해 선행을 베풀려는--- p.또는 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여지고자 하는) 동기가 있다는 점이다.
--- p.256~257
명명권 경매를 위험하고 철저히 상업적이며 과학의 이상을 비도덕적으로 왜곡한 것이라고 비난해야 할까? 아니면 종 다양성과 보전에 대한 사회의 경각심을 높이고 기금을 모으는 영리한 도구라고 환영해야 할까? 이것은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중요한 면에서 잘못된 질문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질문은 이것이다. 어쩌다 신종 발견의 과학이 연구비 지원을 받지 못해 명명권을 팔아 연구비를 구하는 게 더 쉬운 지경까지 간 것입니까?
--- p.258
우리는 곤충--- p.또는 진드기, 벌레)에 의해 새로운 전염성 질병이 확산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 매개체 역할을 하는 곤충--- p.또는 진드기, 벌레)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대기에 방출된 이산화탄소로 인한 기후변화가 생존의 위협이 되고, 녹색식물과 해조류가 대기에서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인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얼마나 많은 식물과 해조류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지구의 생물다양성은 신약 발견, 화학 살충제를 쓰지 않는 작물 재배, 그 밖에 많은 것들의 열쇠를 쥐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 생물다양성은 알려진 것이 없다.
--- p.258~259
수치스러운 일과 용기 있는 행동, 무명과 명성, 적의와 애정, 상실과 희망. 이 모든 것이 라틴어로 된 학명 안에 모두 들어 있다.
--- p.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