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들은 많은 경우에 싸움이 법률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관계에 대한 분쟁에서 생겨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법률이야 충분히 명확했다. 로마 시민들은 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경험이 없는 일반 시민일지라도 사실관계가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판단할 능력은 충분히 있다고 여겼다.
--- p.28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동로마제국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사실 5세기 후반에는 콘스탄티노플과 베이루트에 법률 학교들이 생겨나면서 법률 교육의 부흥기를 맞이했다. 문헌들은 물론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지만 설명은 그리스어로 이루어 졌다. 527년에 즉위한 황제의 이름은 영원히 로마법과 관련을 맺게 되는데 그가 바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이다.
--- p.76
유스티니아누스는 565년에 사망할 때까지 칙법을 계속 제정하여 공표했다. 이들 '신칙법'은 그리스어로 적힌 경우가 많았는데 누군가가 이것을 사적으로 모아 세 구성 부분[칙법집, 법률의견선집, 법률교본]으로 이루어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법률 편찬물에 추가했다. 이 전체를 로마법 대전Corpus iuris civilis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교회법과 대비되는 세속사회의 법civil law을 집대성하여 일체一體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이 작품은 1,000년 동안 이루어진 법률 발달의 정수를 보여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법률 편찬 작업이 없었더라면 그 전 시대 법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몰랐을 것이다. 고전기 로마법이 우리에게 직접 전해 내려온 사례는 드문데, 그 대표적 예가 바로 가이우스의 법률교본이다.
--- p.81
로마법 전통을 보존해온 주체는 교회였다. 법 적용에 있어서 속인주의를 따랐으므로 지리적으로 유럽 어디에 있든 간에 교회라는 제도에 적용되는 법은 언제나 로마법이었다. 라인강변 프랑크족의 법령집인 리푸아리아법에도 규정되어 있듯이 ‘교회는 로마법을 따른다’. 교회는 자신만의 고유한 법을 여러 문서를 통해 축적해가고 있었다. 교회가 직면하는 문제들이 점점 복잡해짐에 따라 로마법에 대한 언급도 늘어났다.
--- p.89
주석가들은 유스티니아누스의 법률 문헌을 신성하게 여겼고 거의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를 부여했다. 이 문헌들에는 섬세한 마음으로 살펴봤을 때 해소되지 않는 모순이 없다는 유스티니아누스의 확언을 주석가들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유스티니아누스의 편찬물 전체에는 상상 가능한 모든 법률 문제에 답하는 데 충분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법률의견선집 첫 머리에서는 법률가들을 사제司祭라 하고,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법률 지식을 ‘인간에 관한 것과 신성한 것에 대한 지식’이라 하고 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주석가들은 ‘법률가는 신학도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후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 따르면 ‘모든 것이 로마법 대전에 있기 때문’이다.
--- p.101-102
교회법의 공백이 있는 부분에 로마법을 적용하는 문제는 좀 더 큰 두 가지 쟁점과 엮여 있었다. 즉, 황제와 동등한 권위를 부여받은 교황이 가지는 입법 권한의 문제와 교회 법정에서 진행되는 절차의 성격 문제였다. 속죄규칙집과 같은 전통에서 윤리 규범을 적용하고 신의 판단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교회 법정에서의 분쟁 절차도 공적 절차이므로 다른 공적인 법정에서 적용되는 것과 비슷한 법규에 따라야 하는가?
--- p.109
로마법 법률가와 교회법 법률가들은 로마법 텍스트에서 합리적 소송 절차를 도출해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인정했고, 공동 과제로 소송 절차를 개발했다. 교회법 법률가들은 교회 법정의 업무를 위해 절차법이 필요했는데, 오직 로마법만이 그러한 절차의 바탕을 이루는 권위를 부여해줄 수 있었다.
--- p.122-123
지역의 법이 현실적 효력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사람들은 로마 시민법이 제공한 '마음가짐'을 받아들였고 그것이 유럽 전역에서 정치적·법적 사고의 바탕을 이루었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유럽의 공통 문화 유산의 일부로서 로마법은 위대한 철학이나 문학 작품에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나 단테의 《신곡》은 바로 그런 사례를 보여준다.
--- p.141-142
알투지우스는 처음으로 ‘법’과 ‘사실’을 구분했는데, 그가 ‘사실’이라고 지칭한 것은 법적 효과를 낳는 사인 간의 거래를 의미했다. 알투지우스는 법률교본 체계에서 ‘actions’는 소송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동을 포함한다는 코나누스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켜 ‘거래negotium’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 p.171
그로티우스는 자연법은 신이 강요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심지어 신이 없다거나 인간사는 신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믿더라도 자연법은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연법은 로마 시민법의 확장 또는 로마 시민법의 완성으로 묘사되었다. 로마 시민법은 모든 약속에 구속력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연법에 따르자면 진지한 약속은 모두 구속력이 있으므로 조약도 일단 체결되고 나면 지켜야 한다. 이 점을 설명하는 격언이 "합의는 지키는 것이다pacta sunt servanda"이다.
--- p.204
자연법과 윤리철학이 하나로 합쳐지는 분위기는 사무엘 푸펜도르프에 의해서 분명해졌다. 푸펜도르프는 (1661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철학과에서) 자연법 및 국제법 담당 석좌교수로 최초로 임명되었는데, 이로써 자연법이 독립된 학문 분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로티우스와는 달리 푸펜도르프는 자연법의 기독교적인 특성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자연법적 권리보다는 자연법적 의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전 세기에 체계화에 골몰하던 인문주의자들이 로마 시민법을 학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키케로의 제안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푸펜도르프는 의무에 대한 키케로의 저술 《의무론》을 모델로 삼았다. 푸펜도르프의 주된 저술은 자연법과 국제법에 대한 방대한 논문이었지만, 그의 영향력을 전반적으로 높인 것은 그보다는 짤막하고 대중을 겨냥하여 1673년에 출간된 《자연법에 따른 인간과 시민의 의무》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그동안 친숙해진 법률교본 체제를 버렸고, 로마법 개념을 사용하긴 했으나 그것들을 다른 순서로 제시했다.
--- p.221-222
로마 시민법에 대한 18세기 후반의 인식은 1748년에 출판되어 크게 성공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몽테스키외는 로마적 요소가 대부분 제거되어 없어진 형태로 자연법 사상가들이 제시하는 추상화된 합리주의적 법 형식을 배격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로마법을 더 많이 참조하라는 쪽으로 간 것이 전혀 아니었다. 우선 그는 법이 일반적으로 ‘사물의 이치에서 생겨나는 필연적인 관계’이며 인간의 법은 이성이 적용된 결과라는, 당시로서는 논란이 없을 주장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이성이 적용되어야 할 대상에 해당하는 사물의 이치가 사회마다 다르다고 보았다. 법은 보편적일 수가 없고 해당 사회의 기후, 경제, 전통, 습관, 종교 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 모든 요소들이 합쳐져서 그 사회의 ‘법에 내재한 정신’을 이루고 있으며, 입법자는 이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p.226-227
1857년에 예링은 로마법이 현대의 문제에 대처할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학문 연구를 목표로 한 학술지 발간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호에서 그가 선언했듯이 ‘로마법을 통해 로마법을 넘어서는 것’이 이들의 모토였다. 그 중요한 예는 계약 체결 상 과실culpa in contrahendo, 즉 무효이거나 불완전한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범한 잘못에 대해 그가 쓴 논문이다. 그는 법률의견선집의 몇 구절에서 출발하여 계약이 체결되지 않았더라도 계약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정교한 이론을 수립했다.
--- p.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