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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판 한국전쟁사 부도

신판 한국전쟁사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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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9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184쪽 | 210*285*20mm
ISBN13 9791189205997
ISBN10 1189205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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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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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국토의 남북 분단

1. 분단의 전조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원칙은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3년 미 · 영 · 중의 수뇌가 참석한 카이로 회담에서 결정되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은 한민족의 자치능력을 과소평가하여 일정기간의 신탁통치를 필요로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8 - 15해방 후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三相) 회의에서 미 · 영 · 소의 외상(外相) 들은 구체적으로 향후 5년 간의 미 · 영 · 중 · 소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안을 채택했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미 · 소공동위원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소련은 그들이 내세운 세계의 공산화라는 목표 아래 북한공산세력의 확충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 · 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당초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점령 경계선으로 설정되었던 38선은 점차 철의 장막으로 변해 갔다. 여기에서 미 · 소간에 불신의 싹이 텄고, 한반도문제는 한민족 자체의 갈망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2. 38선의 설정
1945. 8. 15 일본은 마침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8. 8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 한 후 급속히 병력을 남진시키スト, 미국은 38선을 미 · 소 양군의 전진한계선으로 제의하였다. 스탈린이 이를 묵시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유럽에 이어 극동에서 미 · 소 양군이 직접 대치하게 되었다.
남 · 북한에 진주한 미 · 소 양군의 점령정책은 처음부터 대조적이었다. 미 군정당국은 한국민의 뿌리깊은 배일(排日) 감정과 독립의 열망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구체적인 정책지침도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반해 소련군은 재빨리 각 지역별로 통치권을 접수하면서 일본세력의 잔재를 조기에 불식한 다음, 사회질서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한때 민족주의적 토착세력까지도 포섭하였다. 이후 단계적 조치를 통하여 장애요인을 모두 제거하고 북한을 기지화한 후 소련의 전위세력으로 길러온 김일성 일파를 내세워 간접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3. 분단의 고착화
8. 9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 13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 22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 제24사단은 9. 8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는 없었으므로 한국의 통일 독립문제의 해결은 극히 곤란한 것이었으며,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개최된 미 · 소 공동위원회도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對韓)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간주되고 있던 유럽, 일본 등에 가용한 전력과 자원을 우선적으로 집중시키려 했던 미국은 1947. 9. 17 한국문제를 유엔에 제기함으로써 한국문제 해결에 대한 책임을 국제화하여 자국의 단독적 책임을 철회 내지는 축소하려 했던 것이다. 한국문제가 유엔총회의 정식문제로 채택되スト, 소련은 다시 토의과정에서 외교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1948년 초를 시한으로 하는 미 · 소 점령군의 동시철군 안과 남북한대표의 동시초청안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표결에 의해 소련측의 남북한 동시초청안은 부결되었다.
장기간의 논란 끝에 유엔 총회는 1947. 11. 14 유엔 감시하에 인구비례 비밀투표에 의한 전한국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반도의 통일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고, 이의 실천을 위하여 유엔한국위원단을 구성하였다. 이 위원단은 다음해 1월 활동을 개시하였으나 소련의 거부로 북한에서의 활동이 좌절되었으며, 유엔의 결의에 따라 남한에서만 선거가 실시되어 1948. 8. 15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한의 소련 군정당국은 사실상 일찍부터 김일성을 괴수(魁首) 로 한 괴뢰정부를 수립해 놓고 있었는데, 전한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적 정부인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발족시켜 분단을 고착화하였다.


02. 냉전과 한반도의 전운

1. 냉전의 표면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위 Pax Russo-Americana로 특징지워진 시기부터 냉전의 기운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종전 후 소련은 줄곧 대전중의 군사점령지역에 그들의 위성공산정부를 수립하고 자유진영과의 관계를 점차 폐쇄하는 한편 터키 및 중동지역에 압력을 가하고 그리스에서는 공산화운동을 추진시켰다. 1946. 3월 미국을 방문한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 은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의 연설에서 “공산주의 자들이 스테틴 (Stettin) 에서 트리 에스트 (Trieste)에 이르기까지 유럽대륙을 횡단하는 철의 장막을 치고 있다”고 말하였다.
공산주의의 위협이 점차 확대되어 전쟁 후 피폐한 유럽대륙으로 전파되자 '미국도 루즈벨트 (Roosevelt) 대통령 이래 수행해 온 소련과의 타협을 통한 세계질서와 평화의 유지정채을 버리고 소련의 팽창주의정책에 대항하는 봉쇄정책을 공식화했다. 이 정책의 일환이 바로 트루만독트린 (Truman Doctrine) 과 마샬플랜 (Marshall Plan) 으로 나타났다. 소련은 이 마샬플랜이 동구지역에서 실시되는 것을 거부하고, 1947년 10월 코민포름을 창설하였올 뿐만아니라, 이어서 베를린봉쇄를 실시하여 국제적 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냉전을 표면화시켰다.

2. 미국의 극동정책과 주한미군의 특징
냉전에 임하는 미국의 자세는 이른바 봉쇄정책이었지만 실질적 군사력이 뒷받침되지는 못하였다. 유럽을 전략적으로 중요시하는 기본전략개념과 실질적인 군사력의 부족은 중국대륙의 공산화를 방치하였고, 다른 중요한 지역에서의 효율적인 적용이라는 원칙 아래 주한미군의 철수를 합리화시켜 주었다.
1947. 9월 '웨드마이어 (Wedmeyer) 보고서'에서 한반도에서의 공산군의 침략가능성올 인정하였으나, 2차대전 후의 급속한 복원 (종전 당시 1,200만명-*1947년 174만명) 과국방예산의 감축에 따라 미국은 해외주둔 병력을 재조정하였다. 공산진영의 바로 옆에 미국이 후원해서 수립된 자유민주국가를 유지하려 했던 정치적 고려와는 달리 미국의 합참본부에서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다른 지역에서 이 병력을 운용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그 구체적인 이유로서 다음 몇 가지를 들었다.
첫째, 한반도는 상대적으로 미국의 방위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다.
둘째, 한반도에서 미군의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쟁발생시에 자동개입의 좋은 군사적 구실이 된다.
셋째, 전략적 판단으로서, 전면전쟁 발발시 한반도에서 병력의 유지는 오히려 미국의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며, 만일 남침이 있다해도 해 ? 공군력으로 충분히 저지가능하다.
넷째, 전면전쟁시에 미국이 아시아 전쟁에 개입을 한다 해도 한반도는 우회가 가능하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미군은 한국정부 수립과 동시에 철수를 시작하여 1949. 6. 29까지 500명의 고문단만을 잔류시키고 철수하였다.
더구나 1950. 1. 12 애치슨(Dean G. Acheson) 미 국무장관의 발언에서 한국이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제외되었음이 밝혀지고, 한국이 미국의 단독적인 군사조치에 의하여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되었다. 주한미군의 철수 이래 일관되어온 미 행정부와 의회의 한국문제에 대한 소극적 태도는 소련 및 북한으로 하여금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위해 무력을 사용할 경우, 비교적 작은 모험으로 상당한 전망올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3. 국군의 창설과 발전
미군의 철수계획과 한국내 사회질서 유지를 위하여 비록 소극적이나마 미군의 주도하에 국군의 모체부대가 창설 및 발전되었다.
미 군정당국은 치안유지를 위해 각종 사설군사단체를 해체하고 군사영어학교를 창설하는 한편, '뱀부플랜 (Bamboo Plan)'에 근거하여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했다. 미 군정 치안책임자 챔퍼니 (ArthurS. Champeny) 대령이 세운 '뱀부 플랜에 의하면 우선 각 도에 1개 중대씩 8개중대를 창설하되, 각 중대는 20% 초과 편성하고, 미 군사훈련단(2/4) 의 단기훈련을 거친 후 2개 중대로 확대 편성하여 대대, 연대로 발전시켜 최종 25,000명의 병력을 확보할 예정이었다. 미 군정당국은 이 계획을 토대로 하여 1946. 1. 14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총사령부를 태릉에 설치하였다. 1946. 1. 15부터 남한 8개도에 각각 1개중대의 규모로 발족한 경비대는 정부 수립 당시 약 5개여단으로 증가되었으며, 1946. 6. 20에는 8개사단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로 장비면에서 대비태세의 향상에 차질을 가져오게 되었다.


03. 북한의 남침 준비

1. 소련의 극동군사전략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은 극동의 적화를 위해 우선 중공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북한을 위성국화하는 전략으로 나왔다. 만주를 점령한 소련은 국민당정부와 맺은 우호조약을 무시하고 국부군의 만주진입을 거부하였다. 소련은 만주를 중공군의 성역으로 보호하는 한편, 구일본군 조병 창 (造兵廠) 을 중공에 인계하고 만주의 자원을 동원할 수 있게 하여 중공군의 전력증강에 힘썼다. 중공의 대륙제패가 거의 확실해지자 소련은 북한군의 강화에 주력했다. 김일성은 소련 및 중공의 대폭적인 지원 하에 무기를 들여오고 남한내에 각종 게릴라활동을 전개하는 둥 온갖 수단방법으로 적화통일을 위해 광분하였다.

2. 북한군의 창설
소련군은 북한지역 점령 초기부터 김일성을 후원하여 군사력을 조직 정리하기에 급급하였다. 그들은 1946. 2 이른바 '평양학원'을 창설하여 장교를 양성하였고, 1946. 8에는 '보안간부 훈련대대부'를 창설함으로써 북한군 창설과 강화는 급속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 정책연구보고서에도 나타나고 있었는바, 1947. 9 웨드마이어 보고서는 북한군이 소련군의 지원 아래 잘 훈련되고 충분히 준비된 125,0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혔다.

3. 소 · 중공의 對북한 군사전략
북한에 괴뢰정부와 침략적 군사력을 조직한 후 소련군이 이른바 철수를 하기 직전인 1948. 12 소 중공, 북한수뇌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장차 18개월내에 북한이 남침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지원할 것올 결정하였다.
(1) 한인계 중공군을 다수 입북시켜 북한군의 전력을 증강시킨다.
(2) 북한군에 500여대의 전차를 공급하여 2개의 기갑사단을 편성케 한다.
(3) 북한군을 총 22개 사단으로 증편한다. 후일 전차는 한반도의 지형을 고려하여 242대로 감소되고 그 대신 200여대의 공군기가 지원되는 등 다소의 변동이 있었으나 근본적인 북한군의 현대화계획은 큰 변경 없이 강행되었다. 또한 한인계로 편성된 중공군 사단을 입북시켜 무기만 소제 (蘇製) 로 교체한 후 그대로 북한군 사단으로 탈바꿈 시키거나 또는 중공군 사단에서 한인계 병력을 차출, 북한군 사단을 형성하여 주전투사단화하였는데 북한군 제 5, 6, 7사단 전부와 제1, 4사단의 일부가 이들이었다. 소련으로부터는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 참전했던 한인 5,000명이 입북하여 주로 전차부대에 배치되었다.

4. 전쟁준비의 강화
소련은 대일선전(對日宣戰) 당초부터 한반도를 적화할 야욕을 가지고 북한을 점령하였다. 소련은 그들의 진주지역에 칸막이를 치기 시작하였고, 남북간의 교통, 통신을 단절하였으며 도로를 차단해 버렸다. 또 38선을 화선 (火線) 으로 제압할 수 있게 기관총을 배치하였다, 소 · 중공의 북한에 대한 경제 및 군사지원은 1949. 3의 조 ? 소 경제문화협정 및 비밀군사협정과 조 · 중공 상호방위협정 둥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소련은 북한군에 3,000여명의 군사고문관을 배치하여 직접 남침훈련을 지도하였으며, 소련 출신 한인들을 중심으로 제105전차여단올 창설하였고, 해 · 공군의 창설을 돕는 한편 내무성 산하에 보안대, 경비대 둥의 이름으로 막대한 군사예비대를 확보케 하였다. 김일성은 남한에 끊임없이 게릴라를 남파하거나, 남한내 불순세력을 조정하여 사회 · 정치적 불안을 조성시키고, 한국군의 훈련과 전력증강을 방해하였다. 북한 전역은 1949년초부터 전시체제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병력충원을 위한 인적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각도에 민청훈련소를 설치하여 청장년을 훈련 시키는 한편, 고급중학 이상의 모든 학교에 배속장교를 두어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또한 북한 전역에 조국보위후원회를 조직하고 17세로부터 40세까지의 모든 남녀를 동원하여 강제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북한군은 사단별 훈련을 완료한 다음 1949. 2말에는 적진돌입 및 적배후침투를 위한 보전포합동훈련올 실시하였으며, 1950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남한 전역의 지형을 연구하면서 이를 토대로 훈련을 계속하였다. 북한의 남침준비가 완료되자 소련군사고문단은 1950. 6월 개전에 임박하여 북한에서 철수함으로서 남침기도를 은폐하였다.


04. 피아 전력 비교

1. 병력 · 주요장비

2. 훈련수준
(1) 국군
공비토벌작전 둥으로 부대를 분산 배치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의 소극적인 지원으로 충분한 대부대 훈련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공비토벌작전 및 38선 충돌사건 등을 통하여 개별적인 전투경험은 얻었으나 조직적 훈련은 거의 불가능하였고, 소수의 부대만이 대대별 훈련을 마친 상태였다.
(2) 북한군
장교의 1/3 이상이 중공군 출신일 뿐만 아니라 사병들도 전투경험이 있는 중공군 출신이 많았으며, 소련군사고문단에 의해서 사단급 훈련까지 완료하였다. 북한군의 남침준비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전차여단의 창설과 훈련이었다. 평양 사동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 전차사단은 1947. 5 북한군 제115전차연대를 창설하고 교육훈련에 착수하였다. 북한군 H5전차 연대는 훈련을 계속하다가 1949. 5 제 105전차여단으로 승격하여, 예하에 제 107, 109, 203전차연대와 제 206기계화보병연대 등을 편성하고, 그해 8월부터는 본격적인 야전기동훈련에 주력하였다. 1950. 4에 이르러 북한군 제105전차여단은 242대의 전차 이외에 76. 2mm 자주포 154대, 싸이드카 560대, 트럭 380대 등의 장비와 병력 8,800명을 보유하게 되었다.

3. 편성과 배치
(1) 국군
국방부 예하에 육 · 해 · 공군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해 · 공군은 빈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전투사단을 가지고 있는 육군이 주방어병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내 치안유지 및 공비토벌작전 등으로 남한 각지에 분산되어 있어서 지휘통제가 매우 곤란한 상태에 있었다. 8개 사단 중 수도사단은 서울에, 제2사단은 대전지구에, 제5사단은 전주 · 광주지구에, 제3사단은 대구 부산지구에 분산배치되어 있었으며,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제1, 6, 7, 8사단들도 많은 병력을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하고 있었다.
(2) 북한군
민족보위성 예하에 있던 2개 군단과 예비 1개 사단으로 전선사령부를 설치하고 작전의 협력과 통제의 원활을 꾀하려 하였다. 제1군단은 제1, 3, 4, 6사단과 제 105전차여단을 전방에 위치시켰고, 제10사단을 예비로 보유하고 있었다. 제2군단은 제2, 5, 12사단 및 제12 모타찌크연대, 제766군부대 및 단대호 불명의 전차연대와 제15사단을 후방예비로 가지고 있었다. 또한 대남교란작전을 위하여 유격대를 편성하여 남한의 대공(對共) 방위체제의 약화를 획책하였다.
--- 「제1장 한국전쟁의 배경」 중에서


01. 피아의 작전계획


1. 북한군의 남침계획
북한은 미국의 지원 가능성은 희박하고 지원하더라도 시간이 지연될 것이며, 효과적인 대응조치를 취하려면 적어도 2개월 이상의 시일이 소요되리라고 예상하였다. 특히 남한은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데다가 병력은 열세하고, 50만 남로당 세력이 건재하므로 남한의 조기점령이 가능하리라고 판단하였다. 북한군은 수도 서울을 최단시간내에 탈취한 후 한강 이남으로 신속히 전과를 확대함으로써 부산으로 신속히 진출하여 남한 전역을 해방한다는 기본목표 아래 1일 진격속도를 평균 1아皿로 보고 50일간의 작전기간을 산
정하였다. 작전단계는 수원점령까지 제1단계, 대전~안동선 점령을 제2단계, 대구를 중심으로 마산, 포항을 연하는 제3단계, 최종목표 점령시까지의 4단계로 계획하였다.
또한 남한지역의 지세와 교통망올 고려하여 최종 목표에 이르는 주요접근로를 동해안로, 중앙로(춘천~원주~대구? 영천), 경부본로, 호남우회로(전주~광주~순천~진주)로 판단하고 단계적 진출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경부간선도로에 주공을 두며, 조공은 주공과 병진공격하되 수원일대에서 우회, 포위, 차단하는 것을 비롯하여 상황에 따라 곳곳에서 우회포위공격을 실시하며, 또한 특수임무부대로 하여금 산악지역에서 게릴라 활동을 통해서 조공부대의 전진올 엄호하도록 하였다. 조공의 공격로로서는 중앙로 및 동해안로를 택하되 필요에 따라 호남 우회로도 중요한 조공로로 고려하였다.
이러한 기본작전계획에 의거하여 북한군은 저ロ군단을 주공으로 하여 저1105전차여단을 앞세워 서울을 점령한 후, 경부선을 따라 남진하도록 하고, 조공을 담당한 제2군단의 제2, 12사단이 춘천에서 용인을 거쳐 수원
으로 우회공격하여 서울 일대의 국군주력을 포위하도록 계획하였으며, 각종 특수부대의 지원올 받는 제5사단은 동해안로를 따라 진출하도록 하였다. 북한군의 남침계획은 국군의 주력을 한강 이북에서 포착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반면, 한강 이남지역으로의 진출을 위한 후속계획 및 그 준비는 비교적 소흘한 것이었는데, 북한군은 그들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 주도 하에 남한 각 지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 힘들이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2. 국군의 방어계획
1949년 이래 육군본부 정보당국의 적정판단은 대체로 정확하였다. 정보당국은 북한군이 사용할 수 있는 주접근로를 서부지역 (개성~문산~서울) , 중부지역(의정부 회랑) , 중동부지역 (춘천~원주) 둥으로 상정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의정부방면을 중요시하여 북한군이 남침해올 경우 이곳에 주공을 두고 개성 · 춘천 둥지에 조공을 두어 38선상의 아군진지를 돌파하려 할 것이며, 그후 아군의 주력을 한강선 이북에서 포착하여 결전을
강요해 올 것으로 예상하였다.
1949. 12. 27 연말 종합정보보고에 의하면 1950년 봄에 북한은 대남 후방요원의 기반획득과 내부 붕괴공작을 감행하여 남한침공의 구체적 여건을 조성하는 동시에 38선에서 전면적 공세를 취하여 일거에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특히 195?. 6. 24 육군본부 정보당국은 북한군이 38선 전 전선에 걸쳐 전투사단과 전차포를 배치하여 공격해 올 것이며 공격시기는 6. 24 밤이나 6. 25이 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이러한 정보판단에 기초를 두고 육군본부는 북한군이 침공해 올 경우 일차적으로 38선에 배치된 4개 보병사단 및 1개 연대로 하여금 이를 저지토록 하고, 상황에 따라 옹진반도의 국군 제17연대를 인천으로 철수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육군본부는 국군의 주방어선을 임진강 남안~고랑포~초성~양문리~가평북방~춘천북방~주문진북방을 연하는 선으로 하여 적의 진출을 최대한 저지하는 한편, 후방 사단을 가장 위급한 지역부터 조속히 투입하여 38선을 회복한다는 내용의 방어계획을 수립하였다.
육군본부는 만일 국군이 서울 이북에서 적을 격퇴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방어계획도 세웠다. 이 경우에 국군은 한강 이남으로 전략적 후퇴를 감행하면서 적의 진출을 최대한으로 지연시키는 한편, 후방지역에서 전투력을 재편성, 강화하여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반격으로 전환함으로써 적의 주공을 38선 이남지역에서 포착 섬멸하려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구체적인 세부사항이 결여된 채 수립되었다.
--- 「제2장 북한군의 불법 남침」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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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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