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큰 인기를 얻었던 [미스터 선샤인]이란 드라마가 있습니다. 일반 백성이 왜 의병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었죠. 드라마는 허구지만, 그 속에는 우리가 배웠던 많은 역사가 있었습니다. 극 중 초반에 나오는 신미양요는 미군이 강화도를 침략했을 때 조선군이 이들을 물리치고 척화비를 세웠다고 학창 시절 중요하게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단순히 미국이 쳐들어와 병사들이 이를 물리쳤다는 내용만이 아닌, 조선 병사들이 무기가 떨어지자 미군 병사의 눈에 모래를 뿌리며 저항하고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드라마는 물론 우리가 알던 역사가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요?
--- p.5-6
젊은 시절 이성계는 고려의 앞날을 걱정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 함경도 안변에서 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이성계는 해몽을 잘한다는 노파를 찾아갔다. 꿈 이야기를 들은 노파는 자신이 해몽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며, 이성계에게 설봉산에서 불도를 공부하는 무학대사를 찾아가라고 알려줬다. 꿈의 의미가 더욱 궁금해진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찾아가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했다. “첫 번째 꿈에서는 어떤 마을을 지나가는데 닭이 울어대고, 집집마다 방아 찧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꽃이 떨어졌습니다. 두 번째 꿈에서는 헛간에 있는 서까래 3개를 등에 짊어지고 나오다가 거울 깨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이성계의 꿈 이야기를 들은 무학대사는 서까래 3개를 가로로 맨 것은 왕(王)자의 모습으로 훗날 그가 왕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 덧붙여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꿈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 p.15
세종은 부모가 없거나 버려진 아이들에게도 신경을 기울였다. 아이를 버린 사람을 고발할 경우 포상을 내리는 한편, 고아를 입양하도록 사회적으로 장려했다. 국가에서도 제생원을 통해 아이들을 돌보도록 했다. 80세 이상이 되는 노인은 신분에 상관없이 양로연을 통해 장수를 축하해주고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이처럼 장애인, 임산부, 죄인, 아동, 노인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사회적 약자에 대해 배려한 경우는 역사상 흔치 않은 일이었다.
--- p.75
인종이 성장할수록 많은 사람이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며 좋아했으나, 오로지 문정왕후만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자신이 낳은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싶었던 문정왕후에게 인종은 반드시 사라져야만 하는 아들이었다. 그렇다고 인종을 해칠 수 없었던 문정왕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노골적으로 인종을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뿐이었다. 인종도 문정왕후가 자신을 내치고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을 왕으로 앉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았다. 그러나 효심이 깊은 인종은 늘 쌀쌀맞게 자신을 대하는 문정왕후에게도 진심으로 예의를 갖추어 행동했다.
--- p.151
신사임당은 38세에 강릉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 오늘날 종로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머물며 남편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신사임당은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신사임당은 죽기 전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남편에게 순종하고 아이를 잘 키우는 여성을 현모양처로 인식하던 당시 상황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유언이었다. 어린 자녀들이 계모 아래에서 고생할 것을 우려해 남편 이원수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정확하게 신사임당의 유언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지는 아직까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신사임당이 매우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 p.166
일본에 잡혀간 지 2년 9개월 만인 1600년(선조 33년)에 조선으로 돌아온 강항은 일본 정세에 관한 비밀 보고서인 『간양록』을 작성했다. 『간양록』은 강항이 겪은 정유재란, 적국에서 올린 상소, 강항이 본 일본, 귀국해 왕에게 올린 보고서, 마지막으로 제자 윤순거가 쓴 발문으로 구성되었다. 강항은 『간양록』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성질이 간사하고 교활해 늘 해학과 우스개로써 부하들을 희롱했다.”처럼 일본을 낮춰보는 인식을 드러내면서도 일본의 풍속과 가치관을 자세히 소개했다. 동시에 자신이 생각하는 일본에 대한 방비책도 남겨두었다. 『간양록』은 조선 후기에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들에게 꼭 읽고 가야 하는 책이었으며,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조선총독부가 금서로 지정해 한국인들이 읽지 못하게 했다.
--- p.200
이튿날 덕진진을 무혈입성한 미군은 기세를 몰아 광성보로 향했다. 진무중군 어재연은 600여 명의 병력으로 미군에 맞서 분전했으나 무기의 열세로 미군의 상륙을 허용하고 말았다. 조선 병사들은 광성보로 올라오는 미군과 백병전을 벌였으나 방탄복으로 입은 무명 13겹의 면제배갑이 오히려 움직임을 제한하면서 백병전에서도 밀렸다.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도 조선군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미군에 맞섰다. 당시 미군 슐레이 대령은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중략) 대부분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싸웠는데, 모래를 뿌려 적들의 눈을 멀게 하려 했다. 항복 같은 것은 아예 몰랐다. 부상자들은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익사했다.”라며 당시의 치열한 전투를 회고했다.
--- p.349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했음을 알게 된 순정효황후는 옥새를 자신의 치마폭에 숨겼다. 나라를 일본에게 갖다 바치려는 친일파 관료들이 쫓아왔으나 어느 누구도 순정효황후의 치마 속에 있는 옥새를 빼앗지는 못했다. 젊은 황후의 치마를 들치고 강제로 옥새를 빼앗았다가는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비난받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 p.369
경덕궁을 가장 사랑한 왕은 영조였다. 재위 기간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낸 영조는 1760년(영조 36년)에는 원종으로 추존된 정원군의 시호에 쓰인 경덕(慶德)과 궁궐의 이름이 같다 해서 경덕궁을 경희궁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경희궁은 조선 후기 1,500칸에 달하는 전각이 들어설 정도로 매우 큰 궁궐이었다. 경희궁에서는 숙종이 태어나고,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했다. 그리고 숙종, 영조, 순조가 경희궁에서 죽으면서 경희궁은 조선 후기 궁궐로서의 기능을 다 했다.
--- p.3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