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며 ‘비장애형제’인 나의 누나를 생각했다. 누나는 내가 수술을 받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서울의 병원으로 떠나면, 할머니 할아버지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형제의 장애 정도나 부모님의 돌봄 상황 등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신체적 장애는 저자들의 말처럼 정신적 장애와 다를 것이다), 비장애형제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것은 어린 시절에 겪어야 했던 이 ‘정당한 소외’일 것이다.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이, 언제나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소외의 경험을 장애인인 나는 느끼지 않았다. 적어도 20대가 된 후에는 나를 사회로부터 배제하고 소외시킨 현실은 정당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누나가 경험한 소외는 언제나 당연하고 감내해야 할 것으로 남았다.
비장애형제를 한 세계의 ‘타자’로 만든 것은 형제의 ‘장애’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어떤 종류의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느꼈다(물론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다). ‘장애’가 나를 소외시켰고 나의 형제를 소외시켰다. 이 장애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며 사회 구조적인 문제와 밀접히 관련된 것이라는 (온당한) 주장도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장애는 생생하게 가족 안에 자리 잡은 고통스러운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 p.5~6, 「추천의 글」 중에서
우리는 비장애형제의 서사가 지금보다 더 많이 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이 말해지고, 이 세상에 더 널리 퍼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비장애형제가 장애가정 안에서 어떤 고민을 안고 어떻게 성장하는지 각자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아주 사소한 이야기까지 가감 없이 담아내다 보니 인명이나 지명은 모두 가상이지만, 그밖의 내용은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한 개인의 서사가 아니라, 한국에서 살아가는 보편적인 비장애형제의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비장애형제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더 많은 사람이 비장애형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계기가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 p.12, 「들어가며」 중에서
“비장애형제라…. 우리 같은 사람들을 ‘비장애형제’라고 부르는군요?”
처음 듣는 단어에 해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태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맞아요, 장애인의 비장애인 형제, 비장애형제. 미정 님처럼 저도 그 캠프 뒤로 비장애형제를 또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캠프에 대한 기억은 좋게 남아있어요. 최근에 여러 가지 고민을 하게 되면서 다른 비장애형제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해졌어요. 만약 그때처럼 비장애형제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무엇인가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고요.”
--- p.20~21, 「프롤로그, 그들의 첫 만남」 중에서
친구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마저도 태은은 장애인 동생과 가족 이야기를 했다. 비장애형제라는 정체성에 몰두한 나머지 가족 안에서도 동생의 진로와 교육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하고 참견을 하면서 태은과 어머니는 점점 밀착되어갔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비장애형제라는 것 말고 진짜 ‘나’는 어떤 사람이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한동안 사람들을 만나면 최대한 동생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해 봤어. 그랬더니 할 얘기가 없더라고. 비장애형제가 아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던 거야.”
나 자신의 가치가 다른 존재에게 달려있다면 그 삶은 과연 나의 것일까? 태은은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장애인 동생의 착한 언니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존재 가치라고 여겼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사랑받으려고 끊임없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가족의 요구에 맞추려고 노력했던 자신이 처음으로 불쌍하게 느껴졌다.
--- p.46~47, 「태은 _ 나에게로 가는 길」 중에서
진설은 그런 행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조현병이 있다고 다 저렇게 살아도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조현병이 무슨 국가 공인 개차반 자격증도 아니고. 원래대로라면 보호자인 부모가 그의 재교육을 책임지는 것이 맞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는 아들이 조현병을 이겨내고 다시 정상적으로 살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고, 자연히 그가 조현병과 함께하는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재활 치료에 소홀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가장 참지 못하는 사람이 독박을 뒤집어쓰게 되어있고, 따라서 그 역할은 자연스럽게 오롯이 진설의 몫으로 넘어갔다.
어린아이 티를 벗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열다섯 살 중 학생이 그 역할을 결코 감당할 리 없었지만, 진설에게 다른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진설은 그저 지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의 마른 뺨이 조현병을 짊어진 그보다 더 불쌍해 보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우리 집엔 이제 너밖에 없다’며 진설의 등을 두드리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진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가족이야? 아니면 너야? 네가 먼저 살리고 싶은 게 누군지 잘 생각해보라고.”
그때 진설은 어렸고, 그만큼 어리석었으며, 또 아주 필사적이었다. 자기 한 명이 희생하면 가족이 전부 살 수 있다고 믿었고, 자신이 노력하면 무너진 가정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는 일종의 우월감인지 사명감인지 모를 감정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비극의 전조였다.
--- p.97~98. 「진설 _ 남겨진 사람」 중에서
말이 쉽지, 엄마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어쩜 그렇게 자기들밖에 모를까. 미정은 그날 온종일 꺽꺽 울면서 Family-oriented가 얼마나 자신의 삶을 옭아매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엄마, 아빠의 말을 잘 듣고, 오빠의 장애를 개의치 않고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잘 돌보고, 틈날 때마다 조부모님의 식사를 준비하고 챙겨드리는 착한 딸, 그런 딸로 살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바람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폭풍 같은 한 달이 지나갔다. 미정은 한국 땅에서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말든 애써 외면하고 당장 눈 앞에 펼쳐진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최대한 누렸다. 부모님도 늘 충실하게 중재자의 역할을 하던 착한 딸의 ‘파업’을 결국에는 받아들이고 두 분 사이의 흐트러진 조각들을 삐거덕거리며 스스로 맞춰 나간 듯했다.
‘다신 오지 않을’ 시간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미정은 ‘Family-oriented’라는 쳇바퀴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없으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집구석이라는 것도 이상하고,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집구석을 보며 자신이 박탈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했다. 미정은 미정이고, 가족은 가족이다. 서로의 삶에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 당연한 게 아니었다. 미정은 이사실을 깨달은 자신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 p.160~161, 「미정 _ 당신들과 나 사이, 띄어쓰기」 중에서
“넌 진짜 자기 얘기를 너무 안 해.”
소진은 거짓말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랐다. 3년간의 연기가 물거품이 된 느낌이었다. 가족에 대해 숨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끝내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소진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애써 화제를 돌렸다. 지금은 그 친구와 연락도 뜸해졌지만, 그날 들었던 그 한마디는 이후로도 몇 년 동안 소진을 괴롭혔다.
‘티 안 나게 동생을 숨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결국에는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는구나. 연기하는 거 너무 피곤해. 나한테도 동생 얘기, 가족 얘기를 맘 편하게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장애형제가 있다는 걸 내 약점으로 보지 않는 친구, 아니 나랑 똑같이 장애형제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 친구를 만나고 싶다.’
이런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고 지내온 지 4년. 소진의 우울은 그 응어리가 곪을 대로 곪은 것이었고, 드디어 터질 게 터진 것이었다.
--- p.169~170, 「소진 _ 말할 수 없는 비밀」 중에서
“해수야, 사실 난 20대 초반에 엄마와 싸우는 건 흔한 일이라고 생각해. 성인이 되면서 가족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과정에서 부모님과 말다툼하는 일 정도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그런데 너는 유난히 엄마한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왜 그러는 거야?”
정우의 질문에 해수가 반사적으로 툭 내뱉듯 말했다.
“선배, 나는 장애인 동생이 있어. 동생이 자폐인이야.”
정우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 그렇구나. 그래서?”
정우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 번 더 물었다. 해수는 무슨 말을 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던 정우가 왜이걸 이해하지 못하는지 답답해하며 다시 말했다.
“내 동생이 장애인이라니까. 그래서 내가 잘해야 해.”
“그래, 그런데 동생에게 장애가 있는 거랑 엄마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는 게 무슨 상관인데?”
해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듣고 보니 자신이 생각해도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당황한 나머지 해수는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니, 동생이 아프니까 내가 더 잘해야지. 착한 딸, 좋은 누나. 그게 내 역할이란 말이야. 그래서….”
해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동생에게 장애가 있으니 나는 가족으로부터 떠날 수 없다고 말하는 건가? 내가 현수를 핑계 삼고 있나? 부모님에게 좋은 딸, 현수에게 좋은 누나인 게 정말 나의 전부인가?
해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세계가 조용히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 p.215~216, 「해수, 우리가 처음 가족이 된 날」 중에서
서영은 그제야 자신에게 씌워져 있던 멍에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것 같았다. 나는 여태껏 잘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구나. 언제나 ‘멀쩡’해야 하고 ‘잘’해야 한다는 게 나에게 짐이고, 책임감이었구나. 그래서 잘하지 못하면 죄책감을 느꼈던 거구나.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서영은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스스로 소리 내어 대답했다.
“내가 나로 살면 됐지, 꼭 잘해야 할 필요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니 더는 엄마의 애정을 갈구할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 돌변한 엄마의 태도에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서영은 지금에 와서 시시비비를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여전히 엄마에게 잘잘못을 따져 묻고 허심탄회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엄마를 비난하고 자신이 용서하는 구도를 바라지는 않았다. ‘나는 이런 마음이었고 이런 생각을 했었다’라고 엄마에게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금껏 서영은 엄마와 자신을 떼어놓고 생각하는 방법을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서영과 엄마는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서영은 그저 서영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제야 서영은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서는 법을 알게 되었다.
--- p.254~255, 「서영 _ 일단 나부터 껴안아 보기로 했습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