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이라는 단어 자체는 마태복음에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임마누엘”이라는 주제, 즉 하나님(예수님)의 함께하심은 여기저기에 등장한다. 특히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승천이 “임마누엘”이라는 주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실현하기 위해 예수님이 버림받으신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 위해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예수님의 버림받으심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임마누엘을 경험하며 누릴 수 있다.
--- 「임마누엘을 위한 십자가」중에서
희년은 누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의 다른 말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희년이 실현되는 나라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기도하신 죄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희년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관문이다. 죄의 책임과 처벌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희년의 시작이다. 이러한 죄 용서의 은혜에 감사하며 희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긴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공동체를 이룬다. 또한 죄 용서의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물질을 다른 사람과 나눈다. 약한 자들을 돕고 섬긴다. 그래서 희년의 하나님 나라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신분의 차별과 물질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나라다.
--- 「희년을 위한 십자가」중에서
‘구원’이라는 말만큼 그리스도인에게 익숙한 말이 있을까. 그러나 ‘구원’만큼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말도 없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 말씀은 구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을 넓히고, 사고의 깊이를 더해 준다. 처음에는 ‘내가’ 구원받기 위해 ‘내가’ 믿은 것 같은데, 사실 알고 보면 나를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열심’이 있었다. 그 은혜로운 열심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다. 십자가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예수님의 구원의 열심의 결정체가 십자가다. 따라서 이러한 구원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를 자랑할 것이 없다. 십자가를 자랑하고 사랑할 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런 놀라운 구원을 주신 예수님을 바라볼 뿐이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역사하시는 분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풍성하게 이루시는 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열심, 예수님의 열심이 나의 열심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열심은 죽음보다 강하고, 복수보다 강하며, 원수보다 강하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은 우리를 변화시켜 열매를 맺게 한다. 예수님의 열심은 우리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른 자로 만들지 않는다. 예수님의 열심에 감동해 그분을 뜨겁게 사랑하게 한다. 예수님의 구원에 감사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게 한다.
--- 「구원을 위한 십자가」중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그분이 작정하시고, 그 작정하신 뜻을 따라 능력으로 일하신다는 의미다. 믿음은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러한 믿음의 본을 보여 주셨다. 십자가 고통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 있는 돌보심에 맡기셨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알고, 그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목숨을 맡기신 것이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이러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충성했다. 갖은 비방과 핍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살았다.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겼으며, 자신의 가족과 교회를 하나님께 맡겼다. 지금은 비록 암울해 보이는 현실이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이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았다. 이러한 믿음으로 서로를 격려했다.
믿음을 위한 십자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을 선언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하게 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하나님께 누구보다 소중하다. 독생자의 희생으로 세워진 자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십자가로 정결하게 된 소중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 십자가의 정신으로 서로를 겸손하게 섬겨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다른 곳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을 선언하신 뜻이다.
--- 「새로운 가족을 위한 십자가」중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겪으신 목마름의 고통은 시편 69편 21절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시편 69편에서 다윗은 육체적으로, 관계적으로, 영적으로 목마른 고통을 당했다. 육체적으로 목이 마른 고통을 당했지만, 그것은 적들로부터 온 것이었다. 대적자들의 비난과 모욕 때문이었다. 또한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고 응답하지 않으시는 영적 고통이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이러한 고통을 당하셨다. 육체적으로 목이 마르고, 사람들의 조롱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으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목마른 고통은 그분을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목마른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목마른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풍성한 생명을 누린다. 더 이상 그를 조롱하거나 모욕하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육체도 아프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다. 이러한 구원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히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을 얻는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 중생한 자로 살게 된다.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는 풍성한 생명에 비해 제한적이다. 사람들로부터 여전히 상처를 받고, 육체의 약함으로 고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성령의 생수를 마시기 때문에 이 세상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
--- 「목마름 해소를 위한 십자가」중에서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요 19:30)라는 말씀은 그분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현이다. 십자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사형 현장인데, 예수님은 그곳에서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선언하셨다. “아이고 망했다!”라고 하셔야 할 것 같은데,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성취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새 생명을 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새 생명들로 구성된 새 창조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목적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다. 따라서 십자가는 죄 용서를 위한, 생명을 위한, 새 창조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의 사역이 완성되는 곳이다.
--- 「새 창조를 위한 십자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