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지적하는 이를 바로 그 문제의 원인인 듯 취급하는 인식은 비단 무용계만이 아니라 이 나라 어느 분야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이처럼 원색적인 반응은 나를 당혹시켰다. 내부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것은 부조리를 저지르는 것보다 극악스러운가? 내부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면, 이를 부조리라 칭하는 것은 너무도 가볍지 않은가? 대체 그 부조리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이길래 드러내기만 해도 무용인들이 다 죽는단 말인가?
--- p.18, 프롤로그 「구조가 숨기고 있는 것들」 중에서
인어공주의 다리는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의미하지만 그 자격은 왕자를 비롯한 다른 인간들, 원래 다리를 가지고 있었던 이들과 달리 인어공주에게는 발언권을 포기해야만 주어지는 것이다. 이 같은 다리와 목소리의 교환은 무용계의 작동 원리와 정확히 일치하는데, 무용 전공자들은 전문적인 신체 훈련을 통해 무대에 올라갈 자격을 얻는 대신 침묵을 강요당한다. 지난 몇 년간 거세게 터져나온 성폭력 고발의 목소리들 가운데 무용계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듣기 어려웠던 이유다.
--- p.33, 「인어공주가 선택한 것은」 중에서
김현경은 저서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람의 개념을 공동체의 성원권을 갖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누군가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이름이 불리고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됨의 자격을 얻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승인’이다. 공동체 내부의 승인이 떨어져야 비로소 사람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공동체에서든 동일하게 적용되는 조건일 테지만 무용공동체가 부여하는 ‘성원권’의 특징은 몸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 pp.35~36, 「태초에 ‘승인’이 있었다」 중에서
“너 춤 잘 춰?”는 무용계에서 입막음을 위한 협박처럼 통용되는 레토릭이다. 춤을 잘 추지 못하는 자는 발언할 자격이 없다는 뜻의 이 짧은 문장에는 무용계 성원권의 의미가 그 어떤 길고 자세한 설명보다 잘 압축되어 있다. 어떤 무용수가 춤을 잘 추거나 못 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이들은 성원권을 부여할 권리를 가진 이들과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p.65, 「성원권은 시민권이 아니다」 중에서
현대의 수많은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 역시 결혼에 대해 이와 동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은 여성이 자율성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로 존재하는 세계는 결혼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여성을 남성과의 관계 속으로 밀어넣어 남성의 파트너가 아닌 여성의 위치를 상상할 수 없도록 제약하는 동시에 결혼이 가부장제의 구성 원리라는 사실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 pp.83~84, 「결혼이라는 세계」 중에서
윤상은의 말처럼 발레리나의 연기와 춤이 발레의 모든 것이고 발레의 서사는 형식에 불과할진대, 왜 주인공이 사랑에 배신당한 충격으로 미쳐 죽음에 이르는 이 작품이 발레리나에게 선망의 무대가 되어야 하는가? 왜 다른 역할이 아니라 ‘죽는 여자’인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줄거리에 설득력을 불어넣는 발레리나의 신들린 연기력은 왜 하필 ‘죽는 장면’에서 그와 같은 전율을 불러일으키는가?
--- p.95, 「죽기 위해 사는 여자들」 중에서
결국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죽는 여자’를 통해 창작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대중문화에서 광적이기까지 했던 ‘죽는 여자’의 유행이 잠잠해진 뒤에도 클래식발레는 ‘전통’이라는 이유로 똑같은 ‘죽는 장면’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여성 배우들이 그러했듯이, 발레리나가 ‘죽는 여자’가 됨으로써 프리마 발레리나로 도약하고, 프리마 발레리나가 ‘죽는 여자’를 통해 프리마의 자격을 증명하는 이 구조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 p.112,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죽는 여자’」 중에서
무대 위 ‘죽는 여자’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지 않다. 무대 위, 미디어 속, 그리고 현실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여성들은 무대 위에서도, 미디어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죽어가고 있다. 아니, ‘죽는 여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p.120, 「무엇이 여자들을 죽이고 있나」 중에서
그리고 이 모습은 대중의 애정과 충성도를 기반으로 활동을 이어가는 대중예술인들과도 매우 닮아 있다. 유지영이 《교환신체론》에서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전과 교환될 수 있는 재화의 성격을 갖게 된 ‘웃음’이 예술인에게는 필수 재화가 된 지 오래이며, 이러한 웃음은 백여 년 전에는 기생들에게, 현대에 와서는 여성 예술인들에게 요구되며 이들이 자신의 예술을 펼치는 데 있어 마땅히 함께 제공해야 하는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pp.130~131, 「무대 위 여성의 ‘웃는 얼굴’」 중에서
자니가 프랜시스에게 춤을 가르치며 가장 강조하는 점은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고 춤을 추지만 스텝을 밟는 동안 둘 사이에는 팔의 길이만큼 공간이 유지되어야 한다. 파트너가 한 걸음 다가가면 상대방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처음의 공간을 유지하는 식이다. 자니는 프랜시스에게 이렇게 공간에 대한 감각을 주지시키며 여기는 당신의 영역이고 허락 없이 누군가를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 p.153, 「공간, 경계, 영역」 중에서
이는 신체를 재정의하기 위해 국가, 영토, 주권의 개념을 가져온 것으로, 내 몸을 나 자신이 주권을 행사하는 하나의 독립된 영토로 정의할 때 ‘나’라는 개인은 적어도 내 몸에 대해 서는 국가에 맞먹는 권위를 가지게 된다. 신체를 ‘신체영토’로 이해할 때 ‘신체주권’이란 신체에 대한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이며, 대내적으로는 최고의 절대적 힘을 가지고, 대외적으로는 자주적 독립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 p.156, 「가장 존엄한 공간, 신체」 중에서
성폭력을 당한 시기를 살펴보면 피해자는 미성년자 시절부터 성폭력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초중고 시절 성폭력을 당했다는 응답이 24.6%를 차지했고, 무용과 재학 시절이라는 응답이 47.4%로 가장 높은 응답을 보여 무용을 전공하는 학생 시절 성폭력이 집중됨을 확인시켜주었다. 무용수로 활동하며 피해를 당했다는 응답도 21.8%로 나타나 학교를 떠난다고 해서 성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무용강사로 학교에 출강하면서 성폭력을 당했다는 응답(2.8%)도 있었고, 무용을 전공하기 시작한 뒤로 성폭력이 없었던 시기가 없다는 응답(2.1%)도 나와 설문에 시기를 구분해놓은 것이 무색해지기도 했다.
--- p.171, 「예비무용인들이 위험하다」 중에서
무용계의 균형 있는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우수한 남성 무용수들을 길러내기 위해 작동시켜 온 유리에스컬레이터가 제자에 대한 성적 착취로 무용생태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결과로 나타났을 때, 무용계는 공동체의 자정을 꾀하고 안전한 교육환경과 창작환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무용계에서 추가 피해자가 발생해 무용계를 떠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한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유리에스컬레이터가 이처럼 가해의 수단이 되는 것을 방관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가해자와의 굳건한 연대를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 pp.190~191, 「가해의 수단이 된 유리에스컬레이터」 중에서
그러나 우리가 예술가의 성적 일탈이라고 부르는, 실제로는 성폭력이라는 범죄의 가장 심각한 점은 그 행위가 사회에 만연한 강간문화에 편승하는 방향으로 일어나 남성의 지배권력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면서도 이것이 예술가 개인의 특수한 성적 일탈로 받아들여짐으로써 구조의 문제를 가리는 데 있다. 금기 위반이라는 명분을 두르고 있지만 성적 일탈에 특별한 예술적 영감이 동반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 p.192, 「예술가라는 특별한 지위」 중에서
무용계에서 피해자는 소리 없이 사라지지만 가해자는 영향력을 잃지 않은 채 동료로, 스승으로, 권위자로 여전히 남아 있다. 충격을 받고 참담함을 느껴야 하는 것은 가해자가 우리의 동료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가해자를 우리의 동료로 받아들이고 가해자의 재기를 적극적으로 도와온 무용계의 풍토 그 자체다.
--- pp.233~234, 「미투, 무용계가 잃어버린 몸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외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