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 검험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아직 살인범을 잡지 못했으니까. 사람을 죽인 것도 모자라 죽은 이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파렴치한 범인을 잡을 증거를 찾지 못했다. 아란은 복수가 아닌 처벌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검날이 원수의 목을 찌른다면 마음속 불길에 물을 끼얹을 수는 있어도, 안율의 아비가 살인 겁간법이라는 오명까지 벗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을 셋이나 죽이고도 떵떵거리며 사는 진범 또한 제 죄명으로 지탄받는 게 아니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복수할 방도가 없는 이들은, 다른 희생자들은, 그들의 가족은 어찌한단 말인가. 아란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검험을 포기할 수 없었다. --- p.55
아란의 무너진 세상은 정수헌을 죽인다고 해서 다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복수(復讐)는 받은 것을 되갚는다는 뜻이었다. 자행된 폭력을 폭력으로 앙갚음하는 것. 아란의 복수는 결국 다른 이의 세상을 부수는 것에 불과했다. 허나 저자가 쥐고 있는 험장은…… 저건 달랐다. 저건 부수는 게 아니라 부서진 걸 이어붙이는 거였다. 죽은 이의 원한을 씻어주고 상처받은 시친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세상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 살아남은 이들에게 이곳에 남아도 좋다고, 우리가 사는 곳이 아직은 살 만하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행위였다. 아란은 복수 대신 검험을 택했다. 그리고 이제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아란은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