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4일, 어머니 아버지의 아들 박기종이 ‘대한민국의 문화예술 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문화 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옥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훈장을 받으러 식장으로 향할 때, 걸음걸음마다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이 어른거리며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생전에 이런 소식을 들으셨다면 부모님은 몇날 며칠 동네가 떠나가라 잔치를 하셨겠지요. 하늘에서 제 모습을 지켜보셨다면 저보다 더 기뻐하시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홀로 떨어져 온갖 고생을 다하며 공부하고, 또 열심히 일하며 소리를 가르친 평생의 모습도 다 짐작하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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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홍 선생님과 5,6년 공부하면서 서도소리의 장절민요 1절, 2절, 3절, 4절, 이렇게 절을 구분하고 마디마디 끊어서 하는 민요는 거의 다 배웠다. 유년시절에 동네 문화판에서 자연스럽게 얻어듣고 흥얼거렸던 서도소리를 산홍 선생님은 정식으로 가르쳐주셨다. 그때 배운 장절민요만 해도 4,50곡이니 산홍 선생님의 지도로 나는 본격적인 소리의 세계에 입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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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민형식 선생님이 삼팔선을 넘어 이사 가려고 한다는 걸 짐작도 못했다. 아직 어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공부는 난봉가 아홉 가지 중에 못 배운 거 보충하고, 악양루가, 기성팔경 같은 긴소리잡가 몇 곡 배우다가 끝났다. 짧은 공부였지만 두고두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런 긴소리는 느리고 재미가 없으니까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서울 지역에선 이 노래가 없어졌다고 했다. 그러니 그때 민형식 선생님에게 잡가를 배운 건 참 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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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선생님이 무대에서 공연하는 건 보지 못했지만 얘기는 많이 들었다. 사람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노래를 부르는 자세가 차분하고 노래 가사에 따라서 묘사가 달라진다고 했다. 슬픈 내용에는 구슬픈 목소리가 나오고 즐겁고 유쾌할 땐 즐겁고 유쾌한 소리가 나오고. 소리로 사람들을 울려도 마무리를 할 때는 편안하게 웃으며 끝내는 분이셨다. 한마디로 천상 소리를 위해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했다. 선생님한테 소리를 배우면서 나도 꼭 선생님처럼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나를 보면 선생님을 많이 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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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피난살이에는 생존이 우선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소리에서 멀어졌다. 혼란이 잦아들 무렵에야 소리에 대한 욕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경찰로 근무하는 동안 지인의 소개를 받아 이반도화 선생님에게 신조 긴아리를 배웠고, 최경명 선생님에게는 신나는 배따라기 같은 소리를 다시 배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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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도소리꾼들은 옛날부터 민요와 정가를 구분하지 않고 부르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국립국악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서도소리가 갖는 광범위한 실체적 내용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연구했고, 그동안 알고 있던 서도소리의 가치에 대한 깊은 확신과 사명감을 뚜렷하게 느꼈다. 이 모든 게 평양에 있을 때 선생님이 간곡하게 권하신 것을 따른 것이지만, 이 배움으로 나는 어디 가서든 소리에 대해 제대로 아는 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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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적으로 경기소리는 근대시기에 나온 게 많은 반면, 서도소리는 역사가 깊은 옛날 노래다. 경기소리는 가사도 쉽고 창법도 친근해서 외우기가 쉬운 편이다. 서도소리는 옛 문헌이나 고사를 인용한 가사가 많고 한자도 많이 들어 있는 데다가 창법도 옛날식이라 가사를 외우는 것도, 부르는 것도, 매우 어렵다. 노래구조가 그렇게 다르니, 삼팔선 남쪽에서 정통 서도소리를 부르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서울의 서도소리는 경기소리하듯 한다’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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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분단의 한이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서도소리 문화가 중대한 고비를 맞은 지도 어느새 70여 년이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더 사라져갈 귀중한 서도소리를 어떻게든 우리 힘으로 소생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진 사람도 이제 거의 사라졌다. 설령 남아 있다 해도 소리를 수집할 능력도 기력도 다 없어지는 중이다. 그런 절박한 위기의식이 나에게 《전통서도소리 명곡대전》을 만들게 했다. 서도지방의 사투리, 속성, 습관, 서도소리의 유래 등을 나름대로 기술하여 후학들에게 전승되는 좋은 자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했다.
--- p.232
10대에 시작한 나의 소리공부는 80여 년의 세월을 지나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의 소리, 죽어도 잊지 못할 서도소리를 올바르게 보존하고자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다.
--- p.248
가끔 가족도 알아주지 않는 노래를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물론 나도 가족 중에 후계자가 없다는 게 많이 아쉽다. 하지만 남이든 자식이든 스스로 와서 해야지 억지로 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지금 시중에서 부르고 있는 서도소리 중에는 실제와 다르게 부르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가 된다고 본다. 나는 그저 내가 좋아서 일생을 소리에 바친 것뿐이다. 평생을 불렀어도 수심가를 부르면 언제나 ‘멋있다!’ 스스로 감탄한다. 소리를 가르칠 때도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게 되지만, 그 또한 지독한 애정이니 제자들도 탓하지 않는다.
--- p.263
돌아보면 나는 자상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요즘은 자식들이 찾아올 때마다 작은 것이라도 악기 하나 자료 하나씩 손에 들려 보내려 한다. 성장기에 좀 더 세심하게 돌보지 못한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갚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게 내가 평생 품고 살았던 소리에 대한 염원이 자식들에게도 작은 씨앗으로 전해져서 그들의 삶에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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