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역사 속 전통이자 유물인데, 계속 보존하고 계승해야 하는 것인가요? 시조를 쓰는 사람은 전통을 계승하는 사람이자, 애국자인가요? 마치 택견이나 씨름, 사물놀이나 판소리 같은 한국 고유의 것을 계승하고 지키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가진 시조에 대한 오해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시조는 현대적인 것이 아니라 고전적인 것(촌스러운 것)이며, 3장 6구 45자라는 형식으로 인해 시의 리듬을 아주 쉽게, 바로 느낄 수 있다는 것! 따라서 복잡다단하고 최첨단인 현대인의 감정을 짧은 시 형식에 다 담을 수 없다는 것! 결국, 시조는 시(자유시)보다 덜 세련되고 열등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 현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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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이 지켜야 할 것은 시조가 아니라 문학이고, 민족정신이 아니라 시인정신입니다. 전자를 내세울수록 우스워지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시조시인들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도, 또한 앞으로도 시조는 ‘민족적인 것’임을 내세우는 시조시인들이 많을 것이나, 미안하게도 시조라는 장르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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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률이 폐쇄적이라는 말. 그래서 답답하지 않냐는 말. 저는 늘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번도 답답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믿어줄까요? 저는 무엇이든 3행으로 말하지 못한다면 장편소설 한 권의 분량을 써도 말 못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3행으로 얼마든지 무엇이든 썰 수 있다고 말이죠. 아주 잘 벼린 칼처럼 말입니다. 정형률이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정형률을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이 폐쇄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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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시조시인들은 시조(時調)라는 명칭이 ‘시절가조(時節歌調)’의 준말임을 알고, 시조가 어떤 장르보다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절가조’라는 말은 조선 영조 때 이세춘이라는 가객이 단가에 곡조를 붙여 부른 일종의 ‘유행가’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인데, 현재 시조시인들은 그 말을 ‘현실비판’의 의미로 받아들이고(착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사회 현실에 대한 예민한 반응과 비판의식을 자유시와의 변별 지점으로서 시조의 ‘임무’ 혹은 ‘역할’로 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시조 자체에 대한 천착보다는, 자유시와 따로 구별하려는 차이의 강조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등감만 보여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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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조는 무엇이든 쓸 수 있고 어떤 말이든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시조는 이래야지, 하고 말하는 사람은 딱 거기까지. 시조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시조 종장은 우주의 괄약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우주의 괄약근을 보여줄 것입니다. 우주 삼라만상을 담을 것입니다. 나의 세계는 우주. 나의 그릇은 우주. 당신은 얼마나 큰 세계를 갖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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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수율에 음보율을 보완해 시조의 정형 미학을 설명하는 것이 기존의 방식이었다면, 이처럼 박자와 강세라는 한국어의 리듬 요소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난초 4」에서 종장의 전환(twist)은 음보나 자수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강세도 기여합니다. 「물의 저쪽」도 마찬가지로 ‘꽃’과 ‘새’라는 강세가 마디 분절의 표지가 되면서 리듬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이때 강세는 의미론적 차원과 음성 차원 모두에서 발생합니다. 이는 안확, 서우석, 김인환 등이 제시한 ‘의미론적 박자’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의미론적 혹은 음성학적으로 무게가 있는 단어가 ‘강(强)’, 무게가 약한 수식이나 단어는 ‘약(弱)’의 역할을 하는 것인데, 이는 앞서 언급한 ‘음보(音步)’라는 개념을 보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리듬 요소가 될 것으로 저는, 기대합니다.
물론 창작자가 강세와 박자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작품을 창작하지는 않을 것이며, 작품에 강세와 박자가 무조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리듬 충동’이 드러난 작품에서 ‘의미론적 강세’ 등을 찾아낼 수 있고 입증할 수 있다면, 기존 리듬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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