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들이 작은 교회에 느끼는 감정을 ‘양면적ambivalent’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다. 많은 사람이 장밋빛 향수에 젖은 안경을 쓰고 작은 교회를 보며, 실제로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로 돌아가길 갈망한다. 골짜기에 자리한 작은 갈색 교회가 삶의 중심이었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런가 하면, 동시에 사람들은 작은 교회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는다. 작은 교회는 왠지 이류로 보이고, 현대 세계에서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 p.13
그럼에도 작은 교회는 여러 장점이 있는데, 이 장점들이 성장과 크기를 강조하는 대중 사회에서 간과되고는 한다. 작은 교회에서는, 개개인이 전체에 더없이 중요하다. 교회는 구성원 하나하나가 필요하다. 누군가 빠지면, 모두가 다 안다. 작은 교회는 예배에 참석하는 비율이 큰 교회에 비해 일반적으로 높다. 이유는 분명하다. 모든 사람이 다 필요하며, 한 사람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모두가 아쉬워하고 걱정한다. 작은 교회에서는 개개인이 절대로 투명 인간이 될 수 없다.
--- p.32
작은 교회는 주일 예배에서 강한 주인 의식을 자주 표현하는 한편, 예배의 변화에 자주 저항할 것이다. 익숙한 예배 패턴이 깨질 때 분노를 표현할 것이다. 이러한 저항과 분노는 작은 교회의 삶에서 주일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증거이며, 따라서 목회자가 교묘하게 극복해야 할 부정적 특징이 아니라 인정하고 풍성하게 해야 할 긍정적 특징으로 여겨야 한다.
--- p.65
왜 예배 때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광고하고, 선포하는 일을 목회자 혼자 다 하는가? 설교, 성찬식 기도, 용서 선포, 축도 같은 행위를 목회 행위로 보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평신도가 예배에서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미 많은 작은 교회들에서, 목회자가 없을 때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하거나 목회자가 다른 교회를 함께 섬길 때 주일 예배를 인도한 경험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배사역에 함께 참여한다는 표시로, 평신도에게 요청하고 평신도를 인정하며 훈련시켜야 한다.
--- p.80
온전한 세례를 위한 셋째 조건은 세례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개인주의적이고 자조적이며 펠라기우스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세례를 베푸는 공동체의 행위보다 세례를 받는 사람의 행위를 강조해 왔다. 세례를 베푸는 교회의 태도와 믿음에 더 주목해야 할 때에, 오히려 세례 받는 사람의 적절한 태도나 지식이나 행동에 대해 논했던 것이다. 예부터 세례를 입양이라 일컬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입양하시며,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를 교회 구성원으로 입양한다. 어떤 입양이든, 받아들이고 선언하고 행동하는 대부분 일의 주체는 입양되는 쪽이 아니라 입양하는 쪽이다.
세례 받는 적정 연령에 관한 과거 논쟁들을 봐도, 우리의 초점이 세례 받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와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방식에 맞춰져야 한다는 사실이 흐려지기 일쑤였다. 믿음과 행위의 큰 짐은 세례를 베푸는 자들에게 지워진다. 세례식을 몇 살에 행하든 간에, 세례를 베풀고 가르침으로써 ‘제자로 삼는’ 책임은 교회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세례는언제나 주의 만찬의 전주곡으로 시행해야 한다.
--- p.130
작은 교회의 결혼식을 위해 제시한 기준들과 지침들을 장례식에도 적용할 수 있다. 결혼식이 결혼을 통한 연합이 초래하는 위기에 교회가 전례를 통해 취하는 대응이듯이, 장례식은 죽음이 초래하는 위기에 교회가 전례를 통해 취하는 대응이다. 삶에서, 죽음만큼 교회에게 자발적이고 세밀하며 신학에 입각한 반응을 요구하는 일도 없다. 그리고 작은 교회만큼 이 위기에 잘 대응할 수 있는 집단도 없다.
--- p.144
우리는, 좋은 설교를 가리는 최고의 테스트는 설교가 말씀에 충실한지 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청중의 크기나 성격이 설교를 가늠할 수는 없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에 충실한 작은 교회 설교자들은, 청중이 많지 않기 때문에 설교의 권위를 청중의 크기가 아니라 다른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들의 이점이다. 우리는 앞서 예배와 성찬에 관해 언급했던 희망을, 이제 설교의 르네상스와 관련해서도 말하고자 한다. 갱신이 일어난다면, 작은 교회에서 먼저 일어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설교의 진정한 목적과 권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적은 이들이 바로 작은 교회 설교자들이기 때문이다.
--- pp.159-160
크기와 성장을 성공의 잣대로 여기는 주변 문화의 기준을 받아들이는 목회자는 작은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작은 교회는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듣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단 관계자들이 필수라고 여기는 잘 갖춰진 교회 프로그램이나 조직도 없을 것이고, 교단이 각종 자선 프로젝트를 위해 요청하는 후원금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들이 성취의 기준이라면, 이 목회자는 계속해서 좌절하고 자신이 역부족이라 느끼게 된다.
--- p.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