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금구성언에 의존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걸 떠나서는 안 돼요. 가끔 성인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렇게 성인을 우습게 보고 성인의 말씀을 쉽게 취급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훌륭한 사람도 100년 동안 이름이 남기가 어렵습니다. 사람 많이 죽이고, 역사적인 큰일을 해서 이름을 낼 순 있겠죠. 나폴레옹이라든지, 알렉산더라든지.
그러나 그런 게 아니라 진리를 이야기하고, 삶의 이상을 이야기한 것으로 천 년, 이천 년, 몇 천 년을 인류의 스승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거든요. 성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분들…. 부처님뿐만 아니라 공자, 예수, 소크라테스 이런 분들은 정말 위대한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 죽인 것도 아니고 전쟁 일으킨 것도 아니고, 단지 정말 진리를 얘기하고 올바른 이상을 이야기한 것으로 몇 천 년 이름을 남긴 이런 분들의 말씀을 금구성언으로 여겨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의 말을 아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정말 위험합니다.
--- pp.54~55
내가 잘못해서 누군가가 잘못됐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굉장한 망상이에요.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헤쳐 나갈 줄 아는 사람인데, 나 때문에 저 사람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남을 무시하는 업장입니다. 내가 잘못한 건 반성해야 되지만, 나 때문에 저 사람의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그런 일은 없어요. 특히 부모들이 아이에게 이런 마음을 갖기가 쉬운데, 그러면 안 돼요.
내가 잘못 키워서 애가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많은데, 아니에요. 내 잘못도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다 내 잘못이라고 스스로 죄를 다 걸머지기 시작하면 아이를 더 잘못되게 만들어요. 아이들도 다 부처님이에요. 다 이겨 갈 만한 힘이 있습니다. 그 아이를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그건 오만이에요. 내 잘못을 아는 것과 그것 때문에 자책해서 죄의식에 빠지는 건 별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 p.144
불교가 마음만 먹으면 된다고 계속 주장하는 것이 참 위험한데요. 그렇게 자꾸 강조하다 보면 불교는 최면술이 됩니다. 최면을 걸어서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거예요. 불교는 최면술이 아니에요. 마음을 잘 먹어서 현실도 바꾸고 그렇게 바뀐 현실이 다시 마음을 바꾸고 하는 게 불교입니다. 마음과 현실이 둘이 아니고 세상과 내가 둘이 아닌 것이 불교지요. 그런데 지금 불교가 너무 마음타령만 합니다.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뀌어야 돼요. 그리고 세상이 바뀐 만큼 마음이 바뀌는 겁니다. 이게 건강한 불교의 사고방식이란 말이죠. 부처님이 열어 놓은 연기설의 장점이 이것입니다.
--- pp.151~152
사실 선 수행을 한다고 화두를 드는 순간 번뇌가 더 끓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생각은 지금 거센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어요. 거센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데 우리가 함께 떠내려가니까 그렇게 흐르고 있다는 걸 모릅니다. 버스 안에 있으면 버스 속도를 모르는 거랑 똑같아요. 그런데 화두를 든다는 건 물속에서 우뚝 선 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우뚝 서면 그동안 못 느끼던 흐름이 다 와서 내게 부딪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흐름과 싸우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서 있다 보면 차츰차츰 흐름이 줄어요. 그렇게 자연히 번뇌가 줄어야지, 이 번뇌하고 씨름하면서 새로운 번뇌까지 겹치기로 만들면 영원히 못 이기게 되는 겁니다.
--- p.217
불교 이전에 인도 전통에서 요기들이 하는 수행법의 궁극은요,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모르는 겁니다. 이런 수행이 굉장히 큰 정신적인 힘을 주죠. 하지만 그게 궁극적인 불교 수행의 특징은 아니에요. 불교 수행은 십리 밖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듣는 수행입니다. 이걸 잊으시면 안 돼요. 그러니까 삼매 수행을 하더라도 성성적적의 수행이 일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겁니다. 일상 속에서 수행한다는 건 늘 자기를 반성하되 깨어 있음과 고요함, 두 측면에서 반성하는 겁니다. 깨어 있되 깨어 있음에 빠져서 산란해지면 안 되는 겁니다. 고요함이 바탕이 되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 p.234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면서 연기법을 알게 되지요. 내가 있다는 아상에 매달려 모든 것을 내 소유로 만들어 가려는, 아집을 바탕으로 하는 욕망의 삶이 이 지점에서 바뀌게 됩니다. 연기의 눈을 뜨면 아상이 줄게 되지요. 자연스럽게 나에게만 매달리던 삶이 나와 남과 이웃과 사회, 국가를 아우르는 건강한 목표를 가진 삶으로 전환됩니다. 그것이 ‘환도중생’(還度衆生), 즉 ‘중생을 돌이켜 제도하는 것’이죠. 그 건강한 목표를 서원이라 하는 것이고요. 이제 욕망이 이끄는 삶이 아니라 서원이 이끄는 삶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억지로 일으키지 않아도 일어나는 자비와 지혜가 따라오게 되지요.
그런데, 사실 ‘중생을 제도한다’라는 표현도 맞지 않습니다. 중생이라는 대상이 따로 없어요. 원래 나 하나를 따로 떼어서 닦을 길도 없구요. 나를 닦는다는 것은 바로 남을 편안케 하는 것, 이웃과 사회를 보다 좋게 만들어 나가는 과정, 그 속에 있는 것이지요.
--- pp.321~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