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가 아닌 비非퀴어, 다수 집단은 퀴어, 소수 집단의 이러한 모습을 지나치게 독특성에 몰두하는 것으로 보고, 그들의 행동이나 생각이 과민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어쩌면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퀴어로서, 퀴어하게 보이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몰두해서 고찰한다. 내 눈에 팬픽과 팬픽의 향유자들은 충분히 퀴어해 보인다. ‘팬픽’과 ‘퀴어’의 연관성은 너무도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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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퀴어들이 팬픽을 읽고, 팬픽의 동성애적 서사를 즐긴다. 그리고 많은 퀴어들이 자신이 난생 처음으로 접한 퀴어적 콘텐츠가 ‘팬픽’이었다고, 팬픽으로 ‘퀴어’를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곤 한다.
--- p.35
본질적으로 팬픽은 어떤 비퀴어적인 것을 좀더 퀴어하게 해석하며 노는 서사놀이이다. 그것이 이성애의 유해함을 모방한 ‘가짜’라 불릴지라도, 그리고 ‘실제 퀴어의 삶’과는 멀고 먼 것일지라도, 어떤 퀴어는 그것을 가지고 놀며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다
--- p.42
내가 꼴리는 대로 그들은 ‘LGBTQ 어쩌고’를 넘어서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하는 이야기들은 자연스럽게 ‘이상해졌다’. 멤버들의 시스젠더 헤테로스러움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착즙해 그저 알페스 문법 내의 규범적인 동성애로 해석하며 노는 보통의 알페스와는 달라지고 말았다. 이 이상한 이야기들은 절대적으로 내가 그런 것을 쓰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나는 왜 그랬을까?
--- p.60~61
이 글 또한 실패했을지도 모르고, 결국은 어떤 실패작으로 읽힐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욕망을 직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나,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수많은 억압과 차별을 없애는 작업에 끊임없이 참여할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나의 ‘퀴어됨’과 ‘러버됨’이 함께한, 나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 p.78
남성 아이돌을 여성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여성의 당사자성을 빼앗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여성’이라는 것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 ‘여성’이라는 것은 BL 속 캐릭터의 젠더 문제처럼 모호할 수 있으며, ‘여성서사’란 앞서 나왔던 ‘여성서사 표’의 구분처럼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여성’의 모호함, ‘여성서사’의 모호함을 무시할 때, 우리의 ‘여성서사’는 오히려 더 좁아질 수 있다.
--- p.93
왜 여성 아이돌이 아닌 남성 아이돌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었느냐 묻는다면, 레즈비언 부치 등의 겉모습이 여성 아이돌보다는 남성 아이돌에 더 가깝기 때문이라는 말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어떤 레즈비언들은 싫어할 이야기겠지만, 레즈비언 클럽이나 바에 갔을 때 더 자주 보이는 사람들은 지코나 지드래곤, 조승연(우즈)과 같이 생긴 사람들이지, 트와이스, 블랙핑크 같은 스타일의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 p.94
나는 무언가에 미달하는 애매한 존재들이 역시 애매하고 미달하는 무언가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뭐가 미달이냐”라며 ‘진정성’을 따지거나 그것의 어떤 애매함을 무시하고 단편적으로 그들을 판단하는 데 완전히 질렸다.
--- p.97-98
나는 비퀴어인 시스젠더 헤테로가 퀴어한 ‘척’도 안 하고 비퀴어 시스젠더 헤테로답게 사는 걸 보느니, 차라리 퀴어인 척하는 걸 보면서 내 상상 속에서나마 그들을 퀴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훨씬 재밌다.
--- p.115
레즈비언을 재현한다는 콘텐츠에서 자신의 모습이 누락되었다고 느끼는 레즈비언 가운데 BL이나 남성 아이돌 같은 다른 콘텐츠를 대안적으로 소비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안에서는 적어도 ‘티부’, 젠더가 모호해 보이는 존재와 비슷한 것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레즈비언이 딱히 소수인 것도 아닌데, 백합만을 소비하는 레즈비언들은 그런 이들을 가짜, ‘짭레즈’로 취급하며 자신의 취향이 레즈비언 정상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 p.131
그렇기에 이 뮤직비디오에서는 여성-남성 간 섹스 장면 등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레즈비언 ‘펨’의 시각으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한없이 ‘여성적’ 판타지로 그려낸 이 작품이 어떻게 펨적으로 읽히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이 뮤직비디오 곳곳에는 펨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흥미로운 여지가 잔뜩 남겨져 있다.
--- p.158
우리의 퀴어 커뮤니티는 이런 식이다. 우리는 나쁜 경우 서로를 혐오하고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며, 덜 나쁜 경우에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고 존재 자체도 잘 모른다.
--- p.178
퀴어 커뮤니티를 다정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실패할 혁명’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한다. 이미 실패할 혁명을 하기 위해 비퀴어들 사이에서 나와 퀴어들 사이로 숨어들었으므로, 이제는 퀴어들의 사회를 교란하고 또 실패하고 싶다. 나는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에서, 반드시 실패할 거라 믿는 혁명을 하기 위해 꿈을 꾸고 싶다.
--- p.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