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파예트]는 파리 시민들에게 군복을 입혀 조국의 병사로 만들더니 곧바로 전제정의 앞잡이로 둔갑시켰다. 게다가 미라보와 공모해서 왕에게 봉사했다. 낭시의 현실을 호소하려고 파리에 온 군인들을 옥에 가두었으며, 낭시 군사반란을 진압하는 데 일조했다. 뱅센을 제2의 바스티유로 만들지 못하게 노력한 시민들을 붙잡아 가두었다. 루이 16세가 바렌에서 잡혀온 뒤 튈르리 궁을 감시해야 한다는 핑계로 대중을 튈르리 궁은 물론 국회의사당에도 마음대로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바르나브, 당드레, 르샤플리에 같은 의원들이 헌법을 마음대로 주물러 왕을 복권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p.66
레옹Leon이라는 아가씨가 대표로 서명하고 아낙네 300여 명의 서명부를 첨부한 이 청원은 여성이 공식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요구한다. 여성은 남성만이 헌법을 지키는 막중한 과업을 수행하기 벅찰 테니 자신들도 무기를 들고 적들과 싸우겠다고 주장한다. (중략)
그들의 청원을 들으면서 의원들은 박수를 쳐서 그들의 애국심을 칭찬했지만, 그들이 연병장에서 무기를 다루는 훈련을 하겠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웃기도 한다. 물론 여성의 애국심을 칭찬해야 마땅하지만, 그들에게도 무기를 허용한다면 질서는 어떻게 될까? 이렇게 걱정할 남성이 있음을 염두에 두었는지, 청원서에서는 치안규칙을 잘 따르고, 남성의 지휘를 받을 것이며, 파리 시장이 부과하는 규칙도 충실히 따르겠다고 약속한다. 1789년 가을비를 맞으면서 대포를 끌고 베르사유 궁을 향해 가던 파리의 아낙네들은 특별히 허락을 받지 않고 무기를 들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뒤, 그들은 창, 권총이나 소총, 칼을 허용하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한다. 그들은 정치무대에서 더욱 큰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p.130~131
기요틴은 혁명이 급진화하면서 더욱 많이 쓰였다. 앞으로 보겠지만, 8월 10일의 ‘제2의 혁명’이 일어난 뒤 21일부터 카루젤 광장에서 왕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는 데 쓰였다. 1793년 1월 21일에는 혁명광장(처음에는 루이 15세 광장, 오늘날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루이 카페를 처형하는 데 쓰였다. 형 집행자는 늘 상송 부자였다. 공포정 시기에 특히 활용도가 높았으며, 1982년 미테랑 대통령이 사형제를 폐지하기 전까지 범죄자들을 처형하는 데 쓰였다. 프랑스의 마지막 형 집행관은 마르셀 슈발리에Marcel Chevalier(1921~2008)였다. 그는 프랑스 혁명 200주년에 즈음해 잡지에 실린 대담에서 “목이 잘린 사람이 되살아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기요틴’은 산업혁명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기계였다. 오늘날까지도 손재주habilete는 사람마다 다른 결과를 낳지만, 산업화 이후의 과학기술technologie은 규격화한 결과를 낳는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이라도 조작하는 방법만 제대로 따르면 똑같은 결과를 얻는다. 한마디로 ‘기요틴’은 사형의 대량화요, 기계화다. ---p.136~137
4월 9일 월요일에 샤토비외 병사 40명은 베르사유를 거쳐 파리에 들어가면서 국회에 들러 인사를 하겠다고 전했다. 의원들 가운데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부류도 있었다. 특히 파리 국민방위군 총사령관 라파예트의 부관 노릇을 하다가 입법의원이 된 구비옹은 자기 피붙이가 애국자로서 명령을 수행하다가 낭시의 반도들에게 총격을 받고 죽었다고 강조했다. 결국 호명투표를 실시했다. 참가자 546명 가운데 281명이 찬성해서 반대자 265명을 겨우 누르고 그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찬성자와 반대자의 수를 비교하면서 우리는 다수결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혁명의 주도권이 입법의회에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과반수가 이기는 원칙 뒤에는 그에 조금 못 미치기 때문에 승복해야 하는 의견이 있었다. 이번에는 찬성자가 이겼지만, 앞으로 혁명을 이끄는 세력이 변화를 싫어하는 세력에게 밀리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볼 것이다. 그래서 입법의회를 다그쳐 혁명을 급진화할 수 있는 원동력은 국회의 바깥에 있었다. 대의민주주의만으로 혁명이 추진력을 얻기는 어려웠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p.183~184
파리 도는 전날 밤에 명령한 대로 질서유지를 위해 지난해에 발동했던 것처럼 계엄령까지 고려했다. 궁 앞으로 진입하는 문 뒤에는 헌병 200명과 스위스 수비대 100여 명이 파리 도의 정규군 사령관의 명령을 받으면서 대기했다. 사령관은 병사들에게 총기에 장전하라고 명령하고, 스위스 병사들에게도 임무를 다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스위스 병사들은 대부분 뇌관을 던졌고, 사령관은 그들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했다. 대치상태가 깨지는 순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진압군 병사들에게 청원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대기하게 하는 한, 주도권은 청원자들에게 있었다. 상테르와 르장드르는 대포 2문을 입구에 놓고 위협했다. 수비대가 문을 열고 물러났다. 8,000명이 큰 파도처럼 궁을 향해 밀려갔다. 물론 그들이 모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수비병력은 두려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궁 앞마당으로 옷차림과 무기가 각양각색인 민중이 궁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들은 현관의 철책 앞까지 대포도 끌어다놓았다.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들을 지키는 병사들이 버텼지만, 상퀼로트들이 어깨에 대포를 얹고 문을 향해 나아가니 더는 버티지 못했다. 시위대는 왕의 처소 문을 도끼로 내리쳤다. ---p.257~258
제헌의원들이 힘들게 만들어낸 헌법을 지키는 것이 모든 의원의 바람인지 당장 확인하자는 라무레트의 제안대로 의장이 말하자마자, 의원들이 자발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청석에서 일제히 환호와 박수가 터지고, 의원들이 서로 격려하며 공중에 모자를 흔들면서 라무레트의 연설에 열광적으로 공감했다. “네, 우리는 그렇게 맹세합니다!”라는 함성이 지붕을 들썩이게 했다. 곧 우파와 좌파가 서로 뒤엉켜 얼싸안았다. 공공의 행복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가지고 진정한 뜻의 통일을 이루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방금 전까지 철천지원수처럼 굴던 의원들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중략) 방청객들도 의원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똑같이 맹세하고 서로 얼싸안았다. 한순간일지언정 진정한 화합과 평화의 순간, 사람들은 이 순간을 ‘라무레트의 포옹baiser d'amourette’이라 부른다.
---p.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