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은 문자적으로 ‘대적하는 자’ ‘반대하는 자’라는 뜻이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은 이중적 의미다. 한편으로는 ‘너는 나를 반대하는 자구나!’라는 뜻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의 그런 이기적인 마음 뒤에 역사하는 사탄아 물러가라!’는 뜻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고백까지 했다. 그런데 자기가 고백한 그리스도가, 기대하고 생각했던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다. 그래서 참된 메시아의 길인 수난과 모욕과 죽음의 길 앞에 도리어 발끈하며 예수님을 따로 붙들고 가서 꾸짖었다. 그만큼 베드로의 자아는 펄펄하게 살아 있었다. 자기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과도하고 무모한 확신 속에 ‘지금 선생님께서 이러시면 안 된다’라고 따로 붙잡고 나가 스승을 혼낼 정도다. 이런 것을 보면 베드로는 입술로는 주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했지만 아직 맹인이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 길을 가셔야 하고, 그분을 따라가는 베드로는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베드로의 영적 메타인지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베드로의 영적 시력은 아직 온전하지 못했다.”
---「35. 모든 것을 밝히 보게 하소서」중에서
“‘연자맷돌’(헬. 뮐로스 오니코스)은 직역하면 ‘나귀의 연자맷돌’이다. 이것은 사람이 돌리는 연자맷돌이 아니라 나귀가 돌리는 커다란 연자맷돌을 말한다. 이렇게 큰 돌을 목에 매달고 빠지면 나올 수 없다. 예수께서는 작은 자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신다. ‘작은 자’는 제자들이 티격태격하면서 싸울 때 누가 크냐, 누가 작냐, 할 때의 작은 자를 말한다. 이는 객관적으로 작은 자가 아니다. 우둔한 자기 판단으로 볼 때 작은 자를 말한다. 제자들은 이미 그 마음에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자’보다 자신들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큰 자가 아니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연수는 길었지만 귀신을 제대로 쫓아내지 못했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 지실 것을 두 번씩이나 예고했지만 그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러면 안 된다고 가로막는 무지함을 계속해서 드러냈다(막 8:31-33, 9:31-32). 제자들은 착각하고 있었다. 사실 이들은 연약한 자를 실족하게 하는 잔인한 제자들이었다.”
---「41. 우리를 위하는 자를 품으라」중에서
“당시 이스라엘 성전에 예배드리러 오는 모든 남자는 성전세를 내야 했다. 성전세는 반드시 세겔로 내야 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왔다. 그리스, 로마, 시리아, 이집트, 페니키아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성전세를 내려면 자기 돈을 성전에서 유통되는 성전 세겔로 바꿔야 했다. 성전 세겔은 노동자의 이틀 치 수입 정도의 금액이었다. 그런데 그중 3분의 1이 수수료였다. 또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양과 비둘기를 가져왔는데 성경에 따르면 흠 없는 제물이어야 했다. 그래서 성전에는 제물이 흠이 있나 없나 검사하는 감찰관리가 있었다. 멀리서 양과 비둘기를 가져오는 것도 힘들거니와, 가져오다 보면 다치거나 병 들 때가 많았다. 또 어떤 관리들은 일부러 흠 있다고 퇴짜를 놓기도 했다. 그러면 이거 난감하다. 그래서 성전에서 흠 없는 제물을 판매하는 서비스를 대행했다. 당시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주후 66년 유월절 희생 제물로 드려진 양이 25만 5,600마리였다. 이 제물의 몇 퍼센트만 팔아도 큰 이익을 취할 수 있다. 성전에서 이런 사업은 규모가 꽤 큰 비즈니스였고, 이것을 허락하는 권한은 제사장에게 있었다. 이렇다 보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에서 참된 예배와 기도는 사라지고, 오직 비즈니스와 자기 이익만 남게 되었다.”
---「50. 신앙은 열매로 드러난다」중에서
“오늘날, 신앙 언어의 의미를 축소하고 모호하게 만들거나 뒤집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이것은 빅 브라더가 아니라 빅 이단들에 의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에는 계시록 최종 완성의 비전을 ‘새 하늘 새 땅’으로 제시한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말씀한다. ‘새 하늘 새 땅’ 얼마나 좋은가? 이것을 예전에는 한문을 사용해서 신천신지(新天新地)라고 했다. 이것을 줄이면 ‘신천지’(新天地)다. 그런데 오늘날 신천지라고 하면 느낌이 어떤가? 코로나 19 집단감염을 일으켰던 부정적인 이단 단체라는 느낌이 든다. ‘보혜사’라는 단어도 그렇다. ‘보혜사’ 하면 성도들은 성령을 생각하지만 이단들은 교주의 이름 앞에 보혜사를 붙인다. 요한계시록에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고 이긴 자 예수 그리스도가 나온다. 그런데 이긴 자는 이단들이 자신들의 이단 교주에 붙이는 칭호이기도 하다. 이 좋은 단어들의 의미가 축소되고 모호하게 되고 뒤집어진 것이다. 이들은 성경 단어의 의미를 성경이 원래 말하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로 해석하려고 한다. 이것을 자의적 해석이라고 한다.”
---「61. 인자의 오심? 인자의 가심!」중에서
“로마 군병은 예수에게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운다(막 15:17). 자색옷은 당시 수많은 작은 홍합에서 자색 염료를 추출해서 염색하는, 수많은 손길과 공정을 거치는 매우 고가의 옷이었다. 그래서 자색옷은 왕이나 소수의 귀족이 걸치는 외투였다. 가시관은 왕이 쓰는 왕관을 조롱하기 위한 의미로 만들었다. 거기에 갈대를 손에 들려주었다. 갈대는 왕이 들고 다니던 홀(scepter)을 상징했다. 홀은 통치의 상징이다. 로마 군인은 예수님에게 이 외투와 왕관을 씌우고 경례를 붙이며 말한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막 15:18). 이것은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충성 인사, ‘아베 가이사’를 패러디한 것이다. 그러고는 갈대를 뺏어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고 조롱하고 그 아래 꿇어 절했다. 로마 군병들은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으로 사형선고가 내려진 예수님을 비참한 왕으로 대우하고 있다.”
---「72. 예기치 못한 길을 마주할 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