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중요한 저작이 1972년에 처음 출간된 지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인기가 식지 않는 것은 복된 소식을 기다리는 이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 곧 사역이라는 헨리 나우웬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나우웬의 글은 시대를 초월한 면이 있지만 출판사들과 헨리 나우웬 기념위원회(Henri Nouwen Legacy Trust) 관계자들은 현대 독자들에게 맞게 텍스트가 다듬어질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를 위해 수고한 숀 멀루니(Sean Mulrooney)와 캐스린 스미스(Kathryn Smith)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우웬이라면 이 책을 어떻게 다듬을까 깊이 고민한 끝에 통찰과 영감은 그대로 담아내면서 현대 독자들에게 맞게 다시 풀어냈습니다. 초판이 주로 사역자들의 관심을 끌었다면 이 개정판은 더 온전한 인간으로 가는 여정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더할나위 없이 귀중한 안내서가 될 것입니다.
---「개정판을 펴내며」중에서
매우 오래된 이야기지만 최근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목사가 성경에서 눈을 돌려 젊은이의 눈을 들여다봤다면 그가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우리의 잔학한 처사들을 피해 달아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눈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을 적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그 은신처에서 데리고 나와 그들이 속한 사람들에게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두려움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 p.50
만약 라이즈만(Riesman)이 말한 대로 오늘의 세대가 고독한 군중(lonely crowd)에 속한 익명의 일원들이라면, 내일의 세대는 이 고독한 군중의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있지만 아버지는 없는 세대와 우리는 맞닥뜨렸습니다. 이들 사이에서는 나이가 많다고, 좀 더 성숙했다고, 좀 더 똑똑하다고, 힘이 더 세다는 이유로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신뢰받지 못합니다.
--- p.56
그러나 아버지들을 거부하는 이 세대,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들, 제도의 적법성을 거부하며 두려워하고 있는 이 세대는 새로운 위험성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 p.59
우리는 젊은 도망자의 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는 내향적이고, 심적으로 아버지라는 존재를 상실했고 강박적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죽임을 당하도록 적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를 우리 마을 한가운데로 데려가서 그 젊은이의 모습 안에서 두려움에 싸인 이 세상을 구원해 줄 분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기 하기 위해 우리는 내면을 잘 설명할 수 있으며, 긍휼히 여기며, 묵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 p.80
결국 기도의 사람이란 다른 사람에게서 메시아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며, 숨겨진 것을 드러내고, 구체적으로 잡지 못하던 것의 실체를 파악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 p.81
해리슨 씨와의 대화 기록을 연구하면서 존은 이 환자가 가장 염려했던 것은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리슨 씨는 자신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습니다. 존과 나눈 짧은 대화 속에서 해리슨 씨는 세 번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냈지만, 존은 계속해서 그 주제를 회피하려하거나 그 고통스런 실상을 은폐하려 한 것 같았습니다.
--- p.93
“난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라는 말은 해리슨 씨가 신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믿음과 소망 가운데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당시 겪고 있는 고통은 삶의 경계 저편에 있으리라 생각되는 것에 비해서는 오히려 작은 것이었습니다. 해리슨씨는 지극히 실존적인 방식으로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 p.96
“아무것도, 아무도 없어요. 고된 일만 나를 기다리고 있죠.” 자신이 살든지 죽든지 신경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건강한 젊은이에게 이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고립된다는 것은 인간이 겪는 고통 가운데 최악의 것입니다.
--- p.98
고통받고 있는 인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태도가 있다면, 바로 무관심입니다.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얘기에 귀기울여 주고, 격려의 말을 해 주며, 용서하며, 안아 주며, 자신의 손을 꼭 잡아 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주거나 더 이상 도울 능력이 없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어 합니다.그런데 사역자들은 그들의 곤경에 깊이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 비극입니다.
--- p.116
그러나 이제는 기본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그가 처한 상황에 개입해야 하며, 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그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전인격으로 참여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마음이 상하거나 상처 입고 심지어는 파멸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 p.117
기독교적 삶의 방식은 외로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보호하여 값진 선물로 소중히 간직하게 합니다.
--- p.132
사역자가 이런 그릇된 기대와 환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인간 이해의 원천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을 진정으로 섬김 수 없습니다.
--- p.134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사역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내자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안내를 통해 소망의 표적이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고통을 회피할 필요가 없고 그 고통이 삶에 대한 공동의 추구에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 고통은 절망의 표현에서 소망의 표적으로 바뀝니다.
--- p.147
외로움이 사역자의 가장 큰 상처들 중 하나라면, 환대는 그 상처를 치유의 원천으로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 p.147
우리는 현대를 사는 인간이 당면한 곤경이 역사적 단절, 단편화된 이데올로기, 불멸의 추구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신비주의적 방법과 혁명적 방법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두 가지 방법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초월이라는 방식의 두 측면이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명백히 보여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략)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 그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것이고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커다란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언젠가 인간이 자유로워지리라는 확신, 곧 자유롭게 사랑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게 합니다.
--- p.4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