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원효는 우리가 진리를 탐색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코끼리를 더듬는 격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귀를 만진 이는 코끼리가 커다란 부채와 같다 하고, 다리를 만진 이는 둥근 기둥 같다 하고, 코를 만진 이는 뱀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각자의 주장이 온전한 진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리의 일면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 책을 통하여 필자는 7세기 동아시아 불교의 거봉인 원효의 삶과 생각을 탐색하였으며, 원효의 불교가 ‘승속불이(僧俗不二)의 거사불교(居士佛敎)’를 지향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것이 원효의 진면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온전한 원효상으로 나아가는 올바른 방향이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그러한 뜻을 담아 이 책의 제목을 ‘원효의 발견’이라 하였다. 그것은 원효가 발견한 불교적 진리이자, 필자가 발견한 원효이기도 하다.
---「저자의 말」중에서
근대 불교학 성립 이래 원효에 대한 연구성과가 1,000편을 상회하는데, 이는 한국학의 어떤 연구 주제에 뒤지지 않을 정도이다. 또한 1990년대 이래 단행본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는데, 이는 원효 연구가 심화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양적인 축적에도 불구하고 원효의 저술이나 사상에 대한 종합적·체계적인 이해는 여전히 미흡하다.
---「제1장 근대적 원효상을 넘어」중에서
여전히 남는 문제는 승려와 공주의 결합이, 다소 파격적이기는 하지만 있을 수 있는 두 사람만의 결합으로 그 의미를 한정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중국 불교사에서 파문을 일으킨 비슷한 사례를 감안할 때, 국왕의 동의 없이 두 사람의 만남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의문시된다. 앞의 설화를 보더라도 원효의 수수께끼 같은 노래를 듣고 제일 먼저 그 의사를 간파하고 적극 호응한 이는 태종무열왕이었다. 이것은 두 사람의 만남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되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결코 평범할 수 없으며, 그만큼 두 사람만의 문제 이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제4장 중대 왕실과의 관계」중에서
『삼국유사』를 통하여 원효를 접근할 때 우선 유념해야 할 것은, 일연이 언급한 자료가 모두 원효 당시의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는 ‘시차’의 문제이다. 예컨대 『삼국유사』 권3 동경 흥륜사 금당십성조(金堂十聖條)와 같이 원효 사후 100여 년 무렵의 자료가 있는가 하면, 권3 「전후소장사리조」와 같이 고려 시대에 정리된 자료도 있다. 일연(1206~1289)과 원효(617~686) 사이에 6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연이 접한 자료 역시 시대에 따라 조금씩 윤색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행장(行狀)은 유실되고 두 개의 비석은 훼손되면서 조선시대 이후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이하 「원효불기조」)가 원효 전기의 거의 유일한 국내전승이 되다시피 하였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이 원효의 전기를 복원하는 데 있어서 「원효불기조」를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
---「제5장 원효에 대한 인식의 변천」중에서
근대 학문의 진전에 따라 『금강삼매경』이 7세기 중엽 신라에서 성립한 위경이라는 점은 현재적 사실(事實)이 되었다. 그 결과 더 이상 불설(佛說)이라는 권위를 갖지 못한 채 단지 학문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화(化)하였다. 그러나 원효를 포함하여 동시대의 동아시아 불교도들은 한결같이 『금강삼매경』을 진경으로 존숭하였으니, 이 또한 명백한 사실(史實)이다.
---「제8장 『금강삼매경론』의 찬술」중에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 성찰한 원효는, 마침내 윤회하는 고통스런 삶으로부터 모든 생명, 모든 인간 ? 불교도는 물론, 불교를 몰랐거나 알았더라도 믿지 않았거나 심지어 비난한 일천제조차 ? 은 불교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원효에게 남은 과제는, 불교적 이상에 근거한 평등한 인간관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종교적 사명이었다.
---「제12장 인간관과 중생제도행」중에서
원효는 신라 불교에 국한하지 않고, 불교계의 변화에 대응하고자, 인식의 지평을 동아시아에서 유통되고 있던 대승불전 전체로 확대시켰다. 그는 불교 경전에 대한 전면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서로 대립하고 있던 교리를 적극적으로 화해시키려는 화쟁주의(和諍主義)의 관점을 표방하였으며, 그것을 다시 일반민에게 회향시키려는 이타행(利他行)을 직접 실천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석가모니 당시의 무쟁정신(無諍精神)과 대승불교의 보살도(菩薩道)를 온전히 회복시켰다고 하겠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립된 일심사상은 원효 사상의 핵심이자 시대정신의 반영물인 것이다.
---「제13장 원효 사상의 의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