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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

여진

[ 양장 ]
리뷰 총점9.6 리뷰 5건 | 판매지수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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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6월 28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36쪽 | 326g | 124*188*20mm
ISBN13 9788954699921
ISBN10 895469992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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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이요? 불쌍하죠. 불쌍해요. 그래서 전 개들 한 번도 구박한 적 없어요. 우리 개들은 원체 짖지도 않고 뭘 해도 덤비지를 않아서 돌보기도 수월했고요. 체념한 게 아니냐고 굳이 말씀하신다면야, 뭐 그런 점도 없지 않아 있겠죠. 짖고 덤벼봐야 굶거나 얻어맞으니까. 아니, 제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렇다고요.
--- p.39

개나 사람이나 결국은 지 팔자대로 사는 거 아니겠어요? 재벌가에서 태어나 뭐든 넘치게 사는 사람 팔자랑 차상위계층 부모한테서 미숙아로 태어나 시설에서 사는 사람 팔자랑 다른 게 당연하잖아요. 개라고 별다른가요? 부잣집 팔려가 영양제 오독오독 씹어먹으며 계절 따라 옷 바꿔 입고 발톱 다듬으며 사는 개도 있고, 개 공장에 갇혀서 평생 새끼들 무한 리필 해주며 사는 개도 있고 그런 거죠.
--- p.41~42

그들은 손쉽게 혀를 차거나 더욱 손쉽게 개를 동정하며 뒤돌아섰다. 개는 그런 순간들을 잘 견뎠다. 어쩌면 그 정도의 삶밖에 모르는지도, 개에게는 그런 게 다만 일상이었는지도 몰랐다. 오래전의 나와 누나가 그랬던 것처럼.
--- p.58

할머니는 자꾸 귀찮게 해드려야 해. 자꾸 뭘 해달라고 하고, 어디든 같이 가자고 해야 해. 그래야 할머니가 우울해지질 않아.
할머니 우울해?
할머니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셔. 그게 뭐냐면, 할머니가, 아무도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할머니는 아주 오랫동안 일을 해오셨잖아? 그런데 작년에 갑자기 그만두시곤 혼자 쓸쓸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하셨어. 일을 할 수 없게 된 걸 보니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나봐, 이런 식으로 말이야. 우리가 자꾸 알려드려야 해. 할머니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할머니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 p.82

소년의 누나가 두두두두 쫓아오면 소년은 누군가에게 발뒤꿈치를 베어먹힌 것처럼 종아리에 바짝 힘을 주고 달아났다. 도도는 쉽게 고꾸라졌고 두두는 수시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술래잡기일 뿐인데 저주라는 단어 때문인지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소년과 소년의 누나는 경쟁하듯 달리고 바닥을 뒹굴었다. 한참을 놀다보면 발바닥의 움푹 파인 곳이 쩌릿거리며 아팠다. 남매는 발을 주무르고, 서로의 땀냄새와 발냄새를 조물거린 손바닥으로 서로를 위협하고 쫓고 도망쳤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서서 이마를 맞대고는, 곧 저주받게 될 거야, 은밀하게 서로에게 속삭였다.
--- p.88~89

소년은 이제 알 수 있었다. 소년과 소년의 누나 안에서 어떤 세계가 완전히 막을 내렸음을. 희망이나 기적이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것들을 간직하고 있던 세계가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음을. 소년은 도도의 발가락과 두두의 발뒤꿈치를 간신히 바닥에 붙이고 섰다. 서서히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p.106

소년은 무엇을 바로잡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소년의 아버지가 소년을 직접 때린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단지 신체적 폭력이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보호받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답은 명백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헌신적인 보호자와 무자비한 학대자, 단 두 개의 선택지만이 주어졌으므로 소년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다.
--- p.139

?그 동화 속 남자는 슬픔을 정말로 없애버리는 게 아니었단다. 자기 몸으로 잠시 옮겨둘 뿐이었지.
?옮겨요?
?슬픔이란 건 손쉽게 없애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힘을 내서 아주 오랫동안, 더 두껍고 단단한 다른 감정으로 덧씌워나가는 거거든. (……) 그러니 남자가 그 많은 슬픔을 어떻게 없앨 수 있었겠니. 자기 몸속에 무작정 쌓아둔 거지. 그게 또 얼마나 무거웠을까.
?슬픔은 무거운 건가요?
?무겁지. 참치만큼 무거울걸.
--- p.152~154

그건 이상한 얘기가 아니에요, 할머니.
뱃고동 소리를 내며 슬픔이 울려퍼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무얼 했나요. 그토록 크고 무거운 슬픔을, 그렇게나 시끄러운 슬픔을 왜 다들 모른 척했어요? 남자의 슬픔을 지워주는 사람은 왜 없었을까요. 그러니까 할머니, 그건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 외롭고 슬픈 이야기예요.
--- p.162

우리는 그애들임을 인정하고 살았다. 스스로를 비웃고 조롱하며 살았다. 서로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마주한 채 살았다. 왜? 그것이 더 편했기 때문에. 우리를 헐뜯고 학대하는 게 우리를 헐뜯는 자들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일보다 쉬웠기 때문에. 방어하는 것보다 방치하는 게 훨씬 수월했기 때문에.
--- p.194

뛰면 안 돼. 뛰면 안 돼.
우리는 그 말 속에서 영원히 뛴다.
뛰지 않기 위해 누나와 나는 온종일 매 순간 뜀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양발을 동시에 들어올려선 안 된다. 그것은 파렴치한 짓이니까. 몸을 허공으로 날아오르게 해서는 안 된다. 무릎에 힘을 주어 바닥을 딛거나 위로 솟구쳐선 안 된다. 그건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니까. 뛰면 안 돼. 뛰면 안 돼. 그런 생각을, 그런 생각만을 한다.
뛰면 안 돼.
그래. 그러기 위해서 누나와 나는 영원히 뛰는 사람으로 남는다.
--- p.205

남자는 사람들의 슬픔을 삼킬 때마다 빠르게 늙어가. 얼굴에 금세 골이 패고 손등이 쪼글쪼글해져. 슬픔이 쌓인 몸은 바윗덩어리만큼, 쇳덩어리만큼 무거워져. 남자가 발을 옮기면 삼사 센티미터씩 땅이 꺼질 정도로 말야. 남자는 배를 띄워 바다로 향했지만 얼마 못 가 가라앉고 말았어. 사람들의 슬픔을 떠안은 채 깊이깊이 가라앉았지.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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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잔인함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에겐 자신도 모르게 갖게 된 특유의 온도가 있다고, 안보윤의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작가는 폭력이 얼마나 여러 존재에게 연쇄적으로 파장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차가운 통찰을 유지한 채로 아픈 현장으로 내려가 직시하고, 우회하며, 때로 망설이고, 다시 다가서면서 중층적 질문들 사이사이에서 끝끝내 어떤 온기를 길어올려낸다. 슬픔을 지닌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고 또 쓰다듬을 수 있는지를 아주 깊은 어둠에 발을 담갔다 나온 이들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소설을 다 읽고 산책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돌본다는 것에 대해, 살고, 함께 걷는 일에 대해 내가 어느 때보다 은은한 위로를 받았음을. ‘살 자격’을 스스로 심문해본 적이 있는 이들과 이 소설을 함께 읽고 싶다. 이 외로운 온기에 대해 쓴 사람이 다름 아닌 안보윤이기에 더더욱.
- 최은미 (소설가)
어떤 순간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 그 무엇보다 가장 정확한 대답이 된다. ‘무슨 말’을 가져가버리는 것, 그것은 소설이 주는 아주 커다란 선물이다. 『여진』을 읽고 나서, 나는 기꺼이 할말을 빼앗긴 채로 다만 슬픔을 쥐고 있었다. 두 소년처럼, 누나처럼, 개처럼 나도 나의 슬픔을 꼭 쥐고 있다. 나의 희망도 또한 이 꽉 쥔 주먹 안에 있을 것이다.
- 요조 (뮤지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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