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분리해서 취하거나 버릴 것은 본래 없다. 본래 없는데 본인이 조작하여 이것저것을 분리하고 좋다, 나쁘다 차별하며 아우성을 치고 아수라장을 만들고 있다. 참되게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허망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래서 승찬 스님은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 없네.”라고 『신심명』의 첫머리에 못 박았다. 승찬 스님의 이 말씀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헛소리인가, 왜곡되었는가, 과장되었는가? 거듭거듭 물어보고 스스로 답해보라. 그렇지 않다. 적재적소에 잘 맞아떨어지는 매우 정확하고 명료한 진실이다.
중도적으로 삶의 문제를 다루고 공부하면 놀라운 결과를 얻는다. 같은 내용을 『중론』에서는 “적멸희론, 희론(62견)이 고요히 사라진다.”라고 표현했다. 보통 희론이 사라진 상태를 불교에선 열반이라고 한다. 중도적으로 문제를 직시하고 다루면 바로 열반을 얻게 된다는 말이다. 정법의 등불을 밝혀온 역대 붓다를 위시로 한 스승들께서도 우리가 참되게 알아야 할 참된 진리, 참된 자신의 참모습을 ‘중도연기’, ‘유아독존’, ‘법성원융’, ‘연기 공’, ‘본래붓다’, ‘무상대도(無上大道)’, ‘본래면목’, ‘일심법계(一心法界)’, ‘불이세계(不二世界)’, ‘부사의경계(不思議境界)’, ‘존재의 실상’, ‘즉심즉불’, ‘심즉시불(心卽是佛)’, ‘평상심도(平常心道)’, ‘유식무경(唯識無境)’, ‘중도실상(中道實相)’, ‘팔불중도(八不中道)’ 등으로 표현하여 같은 뜻을 드러내고 있다. 옛 스승들은 한마디로 인생(불교) 공부를 중도적으로 하기만 하면 진리는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격’이라고 말하고 있다. 승찬 스님이 “어려울 것 없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 p.41~42
사람들은 우리가 보고 듣고 먹고 걷고 하는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자체가 참된 최고의 기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대신 본인이 믿고 있는 삼매니, 깨달음이니, 신통이니 하는 것을 기적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찾아 헤매 다니고 있다. 한번 물어보자. 눈으로 푸른 하늘을 보는 것과 깨달음?삼매?신통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열이면 열, 눈이 먼 상태에서 누리는 삼매보다는 마음껏 자유자재로 푸른 하늘을 보는 것을 택할 것이다.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면 우리가 누리는 일상이 진짜 기적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상식을 확고히 하여 흔들림이 없는 삶이 되도록 하면 바로 우리가 희망하는 날마다 좋은 날, 무사태평의 삶이 현실이 된다.
그동안 죽자사자 매달려온 것이 있다면 직접 확인해보라.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기적 같은 일상을 내어주고 매달려온 그것이 과연 그럴 만한 것이었는지. 길은 분명하다. 중도, 있는 그대로를 참되게 잘 알고 받아들이고 잘 활용하고 사는 길이 붓다의 일생이었다. 그 삶을 무사태평의 삶이라고 한다. 우리가 갈 길도 그 길임에 틀림이 없다. 참된 길, 그 길이 영원히 새로운 길이다.
--- p.63~64
삶의 문제를 다루는 그대의 태도는 어떤 방식인가? 우리는 보통 부정적인 습관을 하나하나 없애는 쪽에 치중한다. 예컨대 자만심을 없애기 위해 자만심을 알아차리고, 후회하고, 없애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다. 물론 틀린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더 나은 방법이 있다. 일상적으로 평소 만나는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든 내 앞에 있는 그를 진심으로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면 그 순간 나는 바로 겸허한 사람이 된다. 그렇게 되면 자만심은 저절로 사라진다. 자만심을 다 없앤 뒤에 겸허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겸허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 자만심은 저절로 사라진다. 내 안의 번뇌를 모두 없애기 위해 애쓰는 것과 지금 당장 해탈열반의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이지만, 실제 삶의 과정에서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삶의 뿌리에 주목하고 다루는 태도, 이것이 승찬 스님이 말한 “귀근득지”다.
--- p.100
깨달음은 참된 앎(반야)을 뜻하고 그 앎은 지금 바로 순간순간 삶으로 실천(바라밀)되어야 할 내용이다. 그런데 깨달음이 너무 심오하고 신비하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먼 훗날에야 이룰 수 있고, 나아가 깨닫기만 하면 놀라운 신비와 기적이 펼쳐지는 것으로 설명되고 이해된다. 이에 더하여 ‘불교는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양적으로 어마어마하게 많아졌다. 불교에 입문할 때부터 그 많아진 모든 것을 다 공부해야 불교를 제대로 하는 것처럼 말하니 그야말로 막막하기 그지없다. (중략)
붓다의 입장은 너무나 명료하고 확고했다. 내용이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붓다는 우리들이 문제 삼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참모습인 중도실상에 대한 무지와 착각의 병 때문에 온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병에 대한 ‘응병여약’으로써 가르침을 설하였다. 그렇지만 수많은 붓다의 가르침은 사실 무지와 착각에 사로잡힌 전도몽상의 허망한 소견에서 깨어나도록, 벗어나도록 하고자 함일 뿐, 그 어떤 다른 사연도 말하지 않았다.
붓다가 뜻한 바를 한마디로 옮기면 “전도몽상인 ‘양극단의 길’을 버려라. 있는 그대로의 길인 ‘중도’의 길을 가라.”이다. 그러면 바로 분명해진다. 복잡하고 어려울 하등의 이유가 없다.
--- p.105~107
내가 사는 극락전 마당에는 수십 종의 풀꽃이 피어 있다. 작고 소박한 풀꽃들이다. 누구는 선택받고 누구는 버림받는 일이 없다. 모두 다 꽃으로 인정받고 존중받는다. 차별과 다툼이 생길 이유가 없다. 여실지견, 주의를 기울여 들여다보면 종류도 대단히 다양하고 더 아름답다. 자기에게 주어진 현장에서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야 그 삶의 품격이 높아진다. 풀꽃 밭 사고방식이라야 일상의 아름다움, 일상의 신비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진정 삶의 품격과 만족이 높아진다. 저절로 날마다 좋은 날이 된다.
최고라고 하는 일승(一乘)은 어느 하나도 차별하지 않는 풀꽃 밭의 사고방식이다. ‘마음에 드네, 안 드네’ 하는 양극단에 빠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적재적소에 맞게 잘 쓰는 풀꽃 밭의 사고방식이 최고의 수레다. 그 사고방식으로 삶을 다루는 그 순간 양극단의 마음인 ‘좋네, 나쁘네’, ‘마음에 드네, 안 드네’가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발붙이지 못한다. 그 자리, 그 상태 그대로 편안하다. 홀가분하다. 그럼 충분하지 않은가. 이 사실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한가. 다른 것을 더 찾으려고 하는 것을 스승께선 “소 타고 소 찾는 바보짓이다.”라고 하셨다.
--- p.166~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