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들이 한 권의 책이 되어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 있는 상상을 해본다. 그 누군가가 카페에 앉아, 혹은 이불 속에 엎드려, 내 부끄러운 페이지들을 버스럭거리며 읽고 있을 생각을 하니 아찔해온다. 그런데 이 아찔함은 무대에 오르기 전의 기분 좋은 긴장감과 닮아 있지 않는가. 마치 막이 오르기 전, 내가 연기하는 인물이 처음으로 관객을 만날 때의 긴장감과 설렘처럼. 그렇다. 내가 쓴 글들이 한 권의 책이 되어 독자를 만난다는 것은, 어느 극 중 인물도 아닌 사람 최희서가 관객과 마주하는 일일지 모르겠다. 내가 연기하는 인물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 p.5~6
그렇게 나는 2014년 4월, 지하철에서 연극 대사를 외우다가 신연식 감독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해 겨울,
신연식 감독님이 제작하고 이준익 감독님이 연출하는 시인 윤동주의 영화, 〈동주〉에 캐스팅되었다.
그야말로, 영화와 같은 일이 나에게 벌어진 것이다.
--- p.77
인간은 쓸쓸하고 고독한 존재다. 인간은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고 싶은 존재다. 인간은 권력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쟁취하는 존재다. 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투쟁의 끝에서, 그녀가 미화되고 동정받고, 혹자에게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현재의 가네코 후미코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나는 그 누구보다도 그녀를 인간적으로 그려내고 싶다. 어느 기구한 운명의 여인, 박열의 아내, 일본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 어떤 사람의 찬란했던 투쟁의 기록으로. 그러나 그 과정을 그 무엇보다도 인간적이고 솔직하게 담아내고 싶다.
--- p.111
처음으로 모른다고 해버렸다. 잘 모르겠고, 이 역할을 잘할 자신이 없다고 실토해버렸다. ‘어렵다.’ ‘잘 모
르겠다.’ ‘내 한계인 것 같다.’ ……그런 나약한 말은 내뱉는 순간 내 발목을 휘어잡고 놓아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말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모멸감이 밀려올 줄 알았는데, 웬걸, 이
상하게 기분이 좋다. 속 시원한 눈물이 터져 나온다.
--- p.207
우리가 하는 많은 일이 그렇듯이, 산다는 것은 매일 나 자신을 단련하고, 감당하는 일이겠지? 이겨내기와
진실 찾기에 몰두하던 서른한 살 윤자영, 서른두 살 최희서를 지나, 서른여섯 최희서가 묻는다.
나는 오늘 왜 달릴까./ 나는 지금 어디를 달리고 있을까./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나는 내 자신을 오늘도 단련하고 있는가.
그 단련의 끝이 비록 실패더라도, 그 보잘것없는 내 모습을, 그 진실된 내 모습을, 나는 감당하고 있는가.
--- p.218~219
‘예술가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의 가슴에 점을 찍어야 합니다. 미미하고 희미할 수 있으나 색깔 혹은
말, 소리 혹은 촉감으로라도 점이 되어 오랜 세월 동안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 무대에서도, 혹은 영화나 뮤지컬 같은 또 다른 형태의 예술로도, 관객의 마음에 점을 찍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작게나마 점을 찍다 보면, 언젠가는 점들이 모여서 선이 되겠지요. 그리고 그 선들이 그린 지도가 언젠가는, 당신이 기억할 저의 얼굴이 되지 않을까요. 먼 훗날 완성될, 한 예술가의 초상이 되지 않을까요.
--- p.284~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