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가치체계에 바탕하여 활동하는 ‘천수천안 NGO’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절대빈곤이 사라지고 진정한 법치가 이루어질 때 과도한 재산이나 권력은 ‘골방의 족보’처럼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갖고 있는 ‘힘’보다 ‘콘텐츠’에 가치를 둔다. 부유하게 사는 것보다, 의미 있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다. 누구에게나 언젠가 죽음이 닥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정체와 불교도의 역할」중에서
사회를 향한 이타행은 참여주체의 권위와 명예를 향상시킨다. 속되게 표현하면, 참여주체로 하여금 ‘잘난 체’를 하게 만드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타심에서 시작된 현실참여가 결국은 지극히 이기적인 성취로 귀결되고 마는 것 아닌가? 또, 현실참여는 언뜻 보기에 불교의 궁극적 가르침과 상치되는 것 같아 보인다. 시비와 선악을 분명하게 판가름해야 하는 현실참여는 일체를 무차별하게 부정하고 일체를 무차별하게 긍정하는 듯한 반야(般若)와 화엄(華嚴) 사상과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 아닐까? 또, 고통받는 자에 대한 동정이 위선이 되지 않고 억압하는 자에 대한 비판이 증오가 되지 않기 위해서 참여주체가 갖추어야 될 마음자세는 무엇일까? 필자는 본 글을 통해 이 모든 의문에 대한 불교적 조망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시민운동을 향한 불교의 고언」중에서
제3의 길은 통치이념의 변화만으로 실현될 수 없다. 정보통신문명과 손을 잡은 '익명의 보살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우리 사회의 부를 창출하는 것은 경제인들이다. '이분법'과 '소유'에 근거하여 활동하는 상업인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아날로그(Analog)적 힘의 독주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세력은 불교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NGO들이다. 이는 정보통신기와 함께 하는 디지털(Digital) 세력이다.
---「불교NGO 활동에 대한 이론적 모색」중에서
‘무한입력, 무한처리, 무한출력’이라는 4차 산업혁명의 방식은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을 닮았다. 천안으로 전지(Omniscient)하고 천수로 전능한(Omnipotent) 관세음보살이다. 4차 산업혁명은 바로 전지전능의 인간사회를 지향하는 듯하다. 인공지능은 그 몸통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모든 과학기술이 그렇듯이 인공지능의 경우도 명(明)과 암(暗)의 양면을 갖는다. 만일 우리가 모든 인류와 생명의 행복을 염원한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무한입력의 전지’와 ‘무한출력의 전능’을 구현하는 4차 산업혁명의 기술사회에서 ‘무한처리의 인공지능’은 무엇을 목적으로 작동하는가? 관세음보살과 같이 고통 받는 모든 생명을 위하는 대자대비의 실천을 위해 작동하는가, 아니면 4차 산업기술을 선점(先占)한 소수의 이익만을 위해 작동하는가?
---「불교와 인공지능 - 인공지능의 용 그림에 불교의 눈 그리기」중에서
아메리카대륙의 발견 이후 부르주아들이 세계를 주도하더니, 제2의 신대륙인 가상세계의 출현으로 오타쿠적 인재들이 인류의 부를 창출하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계급의 탄생이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로 설명하면 이들 오타쿠들은 가상세계를 능숙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종교적 가상의 전문가였던 브라만에 비견되리라. 가상세계에 나타난 화장장엄의 신대륙을 개척하는 오타쿠. 근대의 문을 연 부르주아를 대체하는 이 시대의 새로운 계급이다. 오타쿠적 인재가 인류의 미래를 개척한다. 오타쿠적 인재가 인류의 부를 창출한다. 오타쿠의 어깨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
---「화장장엄세계를 누비는 오타쿠의 어깨에 인류의 미래가」중에서
이제는 동물적 힘의 통치인 ‘인치(人治)의 시대’가 종식을 고하고, 백성(百姓)이 주인이 되는 ‘법치의 시대’를 훈련하고 있다. ‘소떼 이벤트’로 남북 간의 육로가 개척된 이후, 잠시 꽃샘추위를 겪고 있지만 통일의 조짐이 점점 짙어진다. 스님께서 ‘지구의 중심’이라고 갈파하신 계룡산 주변으로 행정수도가 옮겨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퍼진다. 서양의 금풍(金風)이 간방(艮方)에 불어서 익은 ‘문화의 열매’다.
---「탄허스님의 예지, 그 배경과 의의」중에서
화엄학에서 가르치는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에서 보듯이, 어느 곳이든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국가의 경우도 이는 마찬가지다. 어느 나라든 자국(自國) 중심의 세계관, 역사관, 미래관에 근거하여 국가관을 정립하고 그 토대 위에서 인류의 평화와 복지를 모색하는 일이 가능하다. 정역의 시대가 열리면서 가을의 결실과 봄의 파종 기운이 가득한 간방의 코리아가 세계 문명을 선도할 것이라는 탄허 스님의 긍정적 국가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면서, 온 인류의 행복을 지향하는 참으로 바람직한 선교방편이다.
---「탄허학으로 조명한 4.19혁명의 세계사적 의의」중에서
사람들은 지금도 간화선사 퇴옹이 입적하면서 남긴 열반송을 입에 오르내리면서 그 의미에 대해 설왕설래한다. 그의 삶이 역설이었고,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역설이었고, 그의 행동이 역설이었고, 삶의 끝자락에 남긴 그의 열반송이 역설이었다. 간화선사 퇴옹은 ‘역설의 화신(化身)’이었다. 퇴옹에게 화두는 오매일여의 관문을 넘어서 ‘삶과 죽음’조차 관통하였다. 생사일여(生死一如)가 되었다. 그 분은 가셨지만 그 분이 남긴 열반송은 활구가 되어 아직도 우리의 가슴속에서 훨훨 타고 있다.
---「현대 한국 사회와 퇴옹성철의 위상과 역할」중에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을 ‘종교전파방식’에 적용할 때, ‘식사 전’과 ‘식사 후’를 나누어 풀이할 수 있다. ‘식사 전’에는 금강산보다 ‘식사를 제공하는 측’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앞에서 보았듯이 근현대 한국 종교의 세력 추이(推移)가 그랬다. 그러나 ‘식사 후’에는 식사가 아니라 ‘금강산’의 절경(絶景)을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현대 구미 사회에 티벳불교가 전파되는 모습이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한(恨)’이 풀린 지금의 우리 사회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티벳불교가 그렇듯이 다른 종교 이상의 ‘절경’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은 ‘청정한 승가’와 ‘체계적인 교학’이다.
---「한국종교의 정치종속성과 불교의 미래」중에서